<김초록 에세이> 골목길에 대한 명상

 

나는 서울의 거리를 걸어 다닐 때마다 무엇에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고층 건물들이 들어찬 거리를 걷다 보면 여유보다는 조급함이 앞서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젖어들 때도 있다. 무엇이 이런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일까? 예전보다 한결 편리해졌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위적으로 뜯어고친 편리함은 정겨움을 앗아갔고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딱딱한 콘크리트숲에서는 정서가 흔들리기 쉽다.

세계 속의 서울은 모든 것을 바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터이다. 전통과 현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진정한 서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더러 남아 있음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가회동이나 안국동, 계동은 잘 보존된 한옥과 함께 소박함을 느끼게 해준다. 안국동에 가본 분은 알 것이다. 그 살갑고 투박한 멋을. 한옥들이 밀집된 골목길로 접어들면 옛날로 회귀한 듯한 정감에 사로잡힌다. 그렇다.  아무리 삭막하고 거친 서울이지만 그래도 살만하다는 느낌이 불쑥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도 개발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다. 새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그 소박한 이미지를 많이 상실해버렸다. 한 마디로 서울의 멋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 달이 멀다 하고 바뀌는 서울의 거리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서울에 골목이 없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정서불안에 젖게 한다. 옛 모습이 지워진다는 것은 세상을 메마르고 가파르게 만들뿐이다. 새 것, 큰 것만을 찾는 현대인들의 삐뚤어진 의식. 나라 경제가 어려워진 것도 어찌 보면 이렇게 작은 것의 소중함을 망각한데서 일어난 일이다.

개발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삶터를 바꾸는 것이 무어 대수냐고 말할 것이다. 도시 개발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네들은 삶의 중요한 부분은 외면한 채 오직 개발만을 부르짖는다. 이런 태도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반쪽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분별한 개발 뒤에는 그 소중한 무엇이 파묻히게 된다는 것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옛 사람들은 골목길을 가장 정다운 낙원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골목길은 답답할 정도로 가로막혀 있음을 본다. 곡선보다는 직선으로 뻗은 거리, 사람과 자동차가 뒤엉킨 거리에서는 마음의 불안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연 친화적 개발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도시의 현대화를 굳이 반대하지는 않지만 너무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개발은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층 건물 밑에 답답하게 나 있는 골목길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서글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지 못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편리할지는 몰라도 한 번 스러진 정서의 안정 영역은 영원히 되돌려놓을 수 없다. 앞으로 서울에서 전통적인 골목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끔 덕수궁 돌담길이나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다닐 때가 있는데, 아늑하고 조용한 느낌을 받곤 한다. 문제는 서울에 이런 골목길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는 한 옛 골목길을 보기란 쉽지 않다.  

종로구 명륜동. 필자는 이 동네를 잘 안다. 회색빛으로 뒤덮인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나는 한때 이 동네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새 20년이 지난 얘기다. 지금은 서울을 떠나 살고 있지만 어쩌다 볼일을 보러 서울에 가면 내 발길은 명륜동으로 향한다.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일까? 그래, 추억의 힘이다. 내가 2년 동안 살았던 하숙집은 성냥갑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언덕배기에 있었다. 비탈진 골목길을 한참 돌고 돌아야 비로소 나타나는 집. 성균관대학교 담장을 끼고 얼마쯤 들어가면 분위기가 사뭇 다른 주거지역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한옥들이 밀집된 명륜동이다.

재작년 가을 무렵이 생각난다. 모처럼 서울에 올라와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문득 하숙집이 생각났다. 내 발길은 그곳으로 향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동네였다. 하숙집은 성균관대학교 담장을 끼고 들어가야 했다. 좁은 골목길을 몇 번 휘어 돌자 황토색 벽돌집이 보였다. 추억을 담은 집, 희망을 담은 집, 삶의 한 부분이 녹아 있는 집이었다.

집 마당에서는 혜화동과 성북동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언제 들어섰는지 높은 건물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고 고층 아파트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셨다. 나는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골목길 순례에 나섰다. 세탁소, 구멍가게, 문구점, 복덕방, 이발소, 편의점…. 그 시절 내가 한번쯤 거쳐 간 곳이었다. 비좁은 골목길을 나오면 큰길이었는데, 자동차와 학생들로 왁자했다. 상점에서 내뿜는 불빛의 현란함.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은 그렇게 뚜렷이 나누어져 있었다.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을 보면서 모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같이 하숙을 했던 그 분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나와 한 살 터울인 그 이는 어렵게 살면서도 꽃처럼 늘 웃음을 달고 다니던 착한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그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서로의 어려움을 같이 나누자며 용기를 주곤 했었는데, 세월은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구멍가게집 청년의 근황도 궁금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다가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동네를 돌아다니며 함을 팔던 모습이 아련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소중한 낭만이었다. 

추억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추억은 우리들의 정서를 위무해주는 정신안정제이다. 다시 그곳에 가보고 싶다. 정든 골목길이며 하숙집 아주머니의 선한 얼굴도 보고 싶다. 
오늘날 서울의 골목은 따뜻함을 잃어버렸다. 답답하고 거친 느낌만 줄뿐 인간적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자동차까지 그곳을 점하고 있어서 복잡하고 위험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휑뎅그렁한 골목을 활력과 정이 넘치는 골목으로 만드는 것은 서울에 몸 부비고 사는 이들의 몫이 아닐까?

골목에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을 생각하며 돌아볼 골목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추억이 있는 골목길은 우리 모두의 정신의 고향이다. 그곳에는 사랑과 미움이, 기쁨과 슬픔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꿈과 좌절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마음이 허허로울 때, 추억이 있는 골목길을 거닐어볼 일이다. 사진첩을 들여다보듯 골목길을 맴돌다 보면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멋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추억의 그 골목길을 다시 찾아가 텅 빈 마음을 따뜻하게 채우고 싶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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