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좌충우돌 인도 여행기-15회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다. 애정 혹은 진저리. 애정은, 드넓은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수많은 문화유산, 그 속에서 맥을 잇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경의다. 반면 가난, 더러움, 무질서와 끊임없는 골탕, 치근거림은 인도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이유다. 필자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인도에 두 번이나 가면서 때마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도 순간순간 용솟음치는 감동과 환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도는 그래서 애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멀리 떠나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억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때 그 시절의 인도 유랑기를 펼쳐본다.

 

▲ 첸나이 지하철의 여성전용칸 : 내부에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탑승 전에 칸의 위치를 미리 알아둬야 한다.



아그라에서 오르차 가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 때문에 2일 머물 예정이었던 아그라에 무려 5일이나 눌러 앉았다. 오르차 다음 행선지인 아우랑가바드에 가는 일정에도 차질이 생겼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일정이 꼬여 제때에 출국을 못하면 어쩌지?’

오르차에 도착하자마자 어렵게 아우랑가바드행 밤기차 표를 구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다. 무려 16시간을 달리는 고된 이동인데 웨이팅(대기좌석) 표라는 것이었다. 좌석이 없다는 얘기였다. 도중에 빈 좌석이 생겨 앉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16시간을 꼬박 서서 가야만 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민이 됐다. 하지만 일정을 더는 늦출 수가 없었다. 출발 당일 밤,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웨이팅 표네. 저쪽 복도로 나가 있어요.”

표를 들여다본 검표원이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듯 복도로 내쫓았다. 자리를 찾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피신할 곳이 필요했다. 필자와 친구는 복도 양옆의 문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바닥은 몹시 더러웠다. 여기저기 껌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묵은 때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게다가 바로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사람들 때문에 물방울이 자꾸만 얼굴로 튀었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와중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봐요, 지금 사람들 내리고 타야 하니까 저리 비켜요.”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놀라 잠에서 깼다. 기차가 서서히 멈췄다. 잠을 깨운 직원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기차 밖으로 빠져 나갔다. ‘내린 사람이 많으니 이제부터 앉아 갈 수 있겠구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 창문을 활짝 열고 달릴 때마다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큰 위안이 됐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린 사람보다 족히 세 배는 됨직한 사람들이 우르르 기차 안으로 달려들었다. 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기차 문이 닫혔다. “그래, 우리가 밤을 지새워야 할 곳은 여기인가보다.” 다시금 닫힌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신문 몇 장을 바닥에 깔고, 몇 장은 바람막이 방패삼아 허리 위로 뒤집어썼다. ‘아! 이 익숙한 광경.’ 청량리역 벤치 위에 신문 몇 장 뒤집어 쓴 채 웅크리고 누워있던 만취한 아저씨들, 딱 그 모습이었다.

이 상태로라도 계속 잠이나 잤으면 좋으련만 머무는 역마다 직원들이 “비키라”며 흔들어 깨웠다. 검표원 또한 수시로 우리 앞을 지나가며 새로 탑승한 사람들의 표를 일일이 검사했다. 필자 일행은 그때마다 “우리를 잊지 말고 빈자리가 생기면 꼭 좀 알려 달라”고 호소했다. 애니메이션 슈렉의 귀여운 고양이 마냥 울상을 지으며 몹시도 가여운 연기를 펼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냉랭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몸이 점점 더 피곤했다. 기차에 오른 지 7∼8시간 정도 지났을까. 깜빡 잠이든 필자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어느 아주머니였다.

“지금 기차에서 내릴 거니까 내 자리에 가서 쉬어.” 고마워 미칠 지경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 반복하고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 가족은 3명이었는데 침대칸은 2층에 고작 하나였다. 그럼 지금까지 2명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친구와 교대로 쉬기로 하고 먼저 침대칸에 올랐다. 간신히 돌아누울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발을 뻗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수가! 잊고 있던 고마움을 새삼 떠올리며 다시금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그 시각 서서히 동이 텄다. 

 

▲ 고아의 버스 터미널 : 해안가에 위치한 고아는 덥고 습한 날씨로 인해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때 조양은 사진 찍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 형제들을 앉혀 놓고 ‘셀카 놀이’에 빠져 있었다. 형제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 인도에 와서 한 발짝 떼기가 무섭게 사진 찍자고 덤비는 사람들 밖에 못 본 터라, 촬영에 무관심한 인도인을 보니 몹시 생소했다.

형제들은 필자가 잠들어 있던 때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던 조양에게 아침 식사를 함께 하자며 들고 있던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단다. 진한 향신료 마살라가 잔뜩 든 음식. 강철 위장을 자랑하는 조양도 목 넘김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마운 호의를 마다할 수도 없어 간신히 먹어치우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나. ‘정말 간신히, 였을까? ㅋㅋ’

기차에 탄 지 어언 16시간. 전날 저녁부터 따지니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이 20시간이 넘었다. 무언가를 먹었다가 또 탈이 날까 겁이나 입에 아무것도 갖다 대지 않았던 것이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찰싹 달라붙는다는 말이 딱이었다. 또 다시 서러움이 겹겹이 밀려왔다. 배곯고, 등 붙일 곳 없고 옷 못 갈아입어 꾀죄죄한 행색까지. ‘아, 이건 딱 거지구나!’

역무원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발길에 치이다보니 서서히 내릴 시간이 가까워왔다. 문 앞에 구겨져 있어도 보고, 땀으로 뒤범벅된 초강력 울트라 ‘딱풀’ 몸을 침대칸에 붙여보기도 한 인고와 격정의 시간이었다. 시시각각 밀려오는 서러움에 그만 여행을 접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자리를 내준 고마운 인도인 덕분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델리 출발 아그라행 기차는 지금 생각하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50도의 폭염,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팬 하나 없는 좁은 복도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속에 까치발을 하고 3시간을 달렸던 기억.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을 자극하던 쉰내와 향신료 냄새. 3시간의 ‘멘탈붕괴’ 끝에 역에 다 닿았을 때 “억만금을 줘도 이런 기차 다시는 안탄다”고 울상을 지었다. 더위도 좋고, 서서 가도 참을 수 있고, 온갖 냄새마저 견딜 수 있다고 억지를 부려도 세 시간 까치발은 차마, 그것만은 차마 지금 생각해도 못 할 ‘짓’이다.

 

▲ 첸나이 지하철 : 대도시 첸나이 안을 이동할 때 편리한 교통 수단이다. 항상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열차가 달릴 때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



37시간 버스를 타고 스리나가르로 가던 과정 역시 고역이었다(6회를 참조하시라). 두 번째 여행에서 함피를 출발, 첸나이로 향하는 여정은 그것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버스는 우리나라 우등버스만큼 편안했다. 에어컨도 빵빵했다. 일반 버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장거리 시외버스에서도 있으나마나한 구실을 했던 에어컨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뜨거운 태양 볕으로 인해 살이 벗겨지고 진물까지 나오던 중이이었는데 시원한 바람을 맘껏 쐬니 좋아도 너~~무 좋았다. 시원한 바람 한 자락에 그 순간만큼은 여행의 시름이 싹 가셨다.

단 하나의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밤에 15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리다보니 용변을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저질 위장과 함께 품질 낮은 방광을 자랑하는 필자는 수시로 화장실이 다급하곤 했다. 그러나 머무는 곳마다 화장실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있으면 다행이거늘. 정차 하는 곳에 화장실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새벽 2시경이었다.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5∼6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 화장실로 짐작되는 곳은 없었다. ‘단체로 노상방뇨를……?!’ 어느 지역을 가나, 벽에 붙어 민망하게 소변을 해결하는 남자들을 많이 봐왔던 터여서 그들의 행동이 대충 짐작이 됐다.

필자 또한 참을 수가 없었다. 가다말고 버스를 세울 수도 없는 법. 나갔던 남자들이 우르르 탑승한 뒤 인적이 드문 쪽으로 냅다 뛰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중간 중간 진흙 고랑에 발이 푹푹 빠졌다. 그리고는 적당한 곳에 등을 지고 앉아 영역표시를 했다. 만취 상태에서도 안 해본 노.상.방.뇨. 30몇 해 보관하고 있는 여러 창피한 기억 중에 유일한 길거리 방뇨다.ㅋㅋ
발에 묻은 진흙과 여타의 것들!을 물로 대충 게워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쯤 했으면 됐다. 하, 제발 좀 참아다오 방광아!’

같은 시각 ‘철갑 위장’을 소유한 조양은 ‘고품질 방광’ 덕분에 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달큰하게 잘도 잤다. ‘저, 친구, 연구 재목으로 점점 탐난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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