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말 달인’ 엄민용의 ‘우리말 나들이’

 

현재 표준어로 쓰이는 말 중에는 더러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가치담배’도 그중 하나입니다. “담배 한 갑을 살 돈은 없고, 담배는 피우고 싶어 까치담배를 샀다”라는 말 속의 ‘가치담배’ 말입니다.

‘한 가치, 두 가치’ 할 때의 ‘가치’는 모든 사전이 “개비의 잘못”이라고 밝혀 놓은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가치’와 결합한 낱말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가치담배’만 빼고요.

그런데요. 이 ‘가치담배’를 사람들은 대부분 ‘까치담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치담배’보다는 차라리 ‘까치담배’를 표준어로 삼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어차피 원칙에서 벗어난 말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을 표준어로 삼는 게 좋잖아요. 그래야 잘못 쓰는 사람도 줄어들 테고요.

아무튼 “가늘게 쪼갠 나무토막이나 기름한 토막의 낱개” 또는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가늘고 짤막하게 쪼갠 토막을 세는 단위”로 쓰는 말의 표준어는 ‘개비’뿐입니다. ‘가치’ ‘까치’ ‘개피’는 모두 바른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야, 담배 한 까치만 줘라” “성냥이 한 개피 남았네” 따위로 쓰면 안 됩니다.

“담배를 묶어 세는 단위”로 ‘보루’라는 말이 널리 쓰입니다. 담배 열 갑을 한 보루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보루’는 일본어에 뿌리를 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말 찌꺼기라고 할 수 있지요.

‘보루’는 영어 ‘보드(board)’에서 나온 말입니다. ‘board’는 원래 “판자”나 “마분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예전에 담배 열 갑을 마분지로 만든 딱딱한 상자에 담아서 판매하면서 ‘담배 한 보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를 일본인들이 ‘담배 한 보루(boeu)’라고 했고, 그 말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로 건너왔습니다.

그렇다는 이유로 이 ‘보루’를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말 ‘포’로 써야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일본어에 뿌리를 둔 말이라고 무조건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원래 우리말에 없던 것을 외래어가 대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포르투갈어 ‘팡’에서 온 ‘빵’처럼요.

‘보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없던 것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후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포’로 쓰면 아주 어색합니다. 더욱이 ‘포(包)’는 우리말로 하면 ‘자루’입니다. 그러면 “담배 한 포 주세요”를 “담배 한 자루 주세요”라고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까닭에 '표준국어대사전'도 ‘보루’를 순화해야 할 말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말에는 일본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우리말로 대체할 것이 마땅치 않거나 워낙 뿌리가 깊어 그냥 쓰는 것이 많습니다. ‘구두’도 그렇고, ‘가마니’도 그런 것들이지요. ‘구두’는 일본말 ‘구쓰’, ‘가마니’는 일본말 ‘가마스’가 변한 말이거든요. 결론적으로 “담배 한 보루 주세요”라고 할 때의 ‘보루’는 써도 괜찮은 말입니다.

그러나 건강을 생각해서 금연을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경향신문 엔터비즈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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