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시골에도 이제는 거의 모든 마을마다 교회 하나씩을 품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인구가 삼십여 명 이상으로 제법 사람 소리가 들리는 마을이다 싶으면 으레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인구가 백여 명에 육박하는 마을은 두 개 이상의 교회가 들어서서 사랑과 복음의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교회가 이렇게도 많이 고독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 있으니, 그러므로 세상은 이제 사랑으로 충만한 시대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한가 하는 문제는, 글쎄 이 부분은 내가 아직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 아직도 피는 애기똥풀꽃

 

다른 동네 사정이야 어떤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비교적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우리 동네 사정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동네 목사님은 싸움을 좋아하신다. 물론 목사님 본인의 입장에서는 싸움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낮아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그래서 잠시 호통을 쳐준 것일 뿐인데 사람들이 못 나게 토라진 채로 말도 안 한다고 말할 것이다. 목사님 입장이야 어떻든 마을 사람들은 싸웠다는 표현을 쓴다. 마을 사람 중에 목사님과 크고 작은 분쟁을 한 번이라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릇 싸움이란 물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현상인 까닭에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기는 어렵다 해도, 익명을 보장한다면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많다. 이를테면 동네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동네 교회로 바꾼 사람들이라든가, 목사님과 그 사모님의 정성 가득한 전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결국 기독교 신앙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아마 목사님의 저주가 두려워서 감히 선뜻 앞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해도 커튼을 쳐놓고 음성변조를 해준다는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증언을 해줄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마을은 일종의 집성촌이었다. 양반 중에서도 양반이라고 소문난 가문의 어떤 사람이 터를 잡은 뒤로 인근의 토지를 거의 장악한 살림을 살았다. 지금은 물론 아니다. 그 가문이 지금도 마을에서 융성한 상태라면 교회는 아마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해마다 오월이면 성대한 제사가 치러지는 사당이 지금도 남아 있고, 사당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당의 제관 격인 사람들이 모두 도시에만 몰려 있는 까닭에 교회는 아무런 다툼의 과정도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소주를 만들어서 팔아먹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의 소주가 맛이 좋아서인지 어째서인지 인기가 제법 높았다. 시쳇말로 돈을 왕창 벌게 된 이 소주 회사가 위스키 등 각종 주류와 음료 사업을 신규로 벌이는가 하면 광고회사를 따로 차리는 등으로 덩치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기업인들의 욕망이 욕망 차원을 넘어 탐욕스럽다는 얘기를 할 때면 으레 거론되는 문어발식 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소주를 비롯한 각종 주류와 음료를 더 많이 그리고 더 높은 이윤을 남기며 판매하겠다는 발상으로 백화점 사업을 새로 시작했는가 하면, 건설업이 블루오션이라 해서 건설회사를 인수하고, 관광회사를 인수하는가 하면 금융업에도 진출하고, 화장품, 제약, 심지어는 전선을 만드는 공장까지 인수 합병한 회사, 이렇게 정신없이 막무가내 식으로 확장만 해나가는 회사가 안 망한다면 그것도 이상할 터, 과연 그룹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너졌다.

 

▲ 우리 동네 사람들

 

그룹이 해체될 당시 재무담당 임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우리 마을 출신이었다. 오너의 직계는 아니고, 사위였다. 사위나마나 이 사람 이름으로 된 전국의 모든 부동산이 압류되었고,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중에는 본인이 잘 기억도 못 하는 부동산도 있었다. 그 사람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자동으로 상속된 임야와 그리고 오백여 평 규모의 대지가 그것이었다. 

오백 평 규모의 대지에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일제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건축학자들이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조형미를 갖췄다고 하는 이 정자를 둘러싸고 담장을 쳤는데 담장이 또한 어지간한 성벽 수준이었다. 성벽 위에 기와를 올렸는데 기와가 모두 항아리를 만들 때 쓰는 유약을 바른 오지기와였다. 일제 치하에서 이런 규모의 정자를 지었다면 그 가문의 위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거니와, 위세나마나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정자는 통째로 헐값에 넘어갈 운명에 처해졌다.

일금 사천칠백 만원에 임야와 정자를 포함한 대지가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싸구려로 넘어갈 줄 알았으면 내가 살 것을, 하는 아쉬움이었다. 일금 사천칠백 만원을 써넣고 낙찰을 받은 사람은 전주에서 고건축 전문회사를 운영하는 그야말로 전문가였다. 이 전문가께서는 정자를 고스란히 해체해서 서울의 어느 부잣집 정원에 세워주고 이억 원 가까이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고건축 전문가에게 정자를 들어낸 뒤의 대지와 임야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동산에 땅을 내놓았고, 부동산 업자는 이를 인터넷에 올렸다. 그것을 목사님께서 보셨다. 목사님은 다음 날 바로 자동차를 몰아 달려 내려왔고, 땅을 보자마자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마을 회관에 들러 마을 발전기금 명목의 현금을 백만 원짜리 다발로 두 개나 내놓았다.

그는 서울의 어느 신학대학에서 학과장까지 역임한 교수님이셨고, 몇 개인가의 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이제는 은퇴해서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작은 예배당을 세워놓고 농사도 지으면서 수수하게 살고자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의심스런 부분이 있다 해도, 하여튼 돈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돈이 항상 쪼들리는 시골 마을에 돈이 많은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어쨌든 기분 좋은 일임이 분명했다.

 

▲ 인간 세상이야 어떻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도 미련 없이 그냥 내놓았다. 목사님이 작은 교회를 짓고 사택도 짓고 할 때까지 마을회관을 살림집으로 쓰시라고,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고 목사님께 권했다. 그리하여 목사님과 그 부인인 사모께서는 마을회관을 자기 집처럼 알고 사용하면서 마을 사람들과의 친교를 다져 나갔다.

목사님의 주머니에는 항상 사탕이 들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할머니들은 목사님이 주시는 사탕을 매우 좋아했다. 딱히 사탕이 궁핍해서는 아니었다. 목사님이 주시니까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느낌에 좋아했다. 게다가 목사님은 할머니가 혼자서 들판 길을 걷고 있을라치면 얼른 자동차를 몰고 달려가서 보건소든 면사무소든 태워다주는 친절을 베풀고 있기도 했다. 심지어는 할머니의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태워다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은 농사일에도 적극 참여했다. 목사님 자신도 이 다음에 농사를 짓겠노라고, 복분자 수확철이면 아무 밭에나 들어가서 일손을 돕는다고 나서고, 고추를 따는 시기에는 역시 고추 따는 일을 할 줄도 모르면서 어쨌든 돕는다고 나섰다. 그렇게 목사님과 그 사모께서는 사람들 속에 끼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고,  들어가면서 마을의 속사정을 하나씩 둘씩 알아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은 예배당과 사택 등의 기초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대형 굴삭기를 한 대도 아니고 세 대씩이나 동원해서 땅을 깎고, 파고, 석산에서 거대한 돌을 실어다가 축대를 쌓는데 그 규모가 어찌나 방대한지 흡사 무슨 공장이라도 지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새벽이면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운동선수가 기합을 넣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죽어서도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을 향해 호통을 치는 소리도 같은 고함 소리가 새벽이면 마을의 개들을 깨워놓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작은 예배당 규모는 왜 저렇게도 방대한가, 하는 설왕설래가 며칠이나 계속되던 어느 하루 그동안 목사님과 특별히 더 친해진 한 사람이 목사님께 넌지시 물어보았다. 

질문을 받은 목사님의 설명은 명쾌하고도 단호했다. 과거에 정자가 서 있던 자리를 제외하고는 땅이 경사가 심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으로 내리고, 중간에 축대를 쌓아서 비가 내릴 때의 토사유출을 방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집도 짓고 예배당도 짓고 농사도 지을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의 그 말을 이해했고, 그리고 믿었다.

 

▲ 종교가 이처럼 순백일 수는 없을까,,,

 

새벽이면 들리는 이상한 호통소리와 기합소리 또한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목사님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이해해 주기로 했다. 정자란 것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산물이고, 정자가 서 있던 곳에서 불과 오백여 미터 거리 저쪽에 유교의 상징이라 할 만한 사당이 있고 보니 목사님의 하느님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유교의 어떤 기운을 호통소리와 기합소리로 제압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설명을 마을 사람들은 과거에 집을 지을 때 했던 지신밟기와 연결해서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한쪽에서는 예배당을 짓고, 또 한 쪽에서는 사택을 짓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 조성된 이천여 평의 밭에 복분자 묘목을 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이 실제로 복분자 농사를 제대로 한 번 지어보실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일 년도 채 안 돼서 복분자는 모두 파헤쳐졌다. 예배당을 완공해놓고 보니 이런저런 뭔가가 잘못 돼서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완공된 예배당도 목사님이 애초에 공언하신 작은 예배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게 거대한 규모였지만, 새로 지어지는 예배당은 아무리 봐도 예배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때쯤 이미 작은 예배당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떡 한쪽도 큰 것이 좋다는 식으로 커다란 건물이 초라한 마을의 위상을 높여 줄 것이라는 자긍심마저 갖고 있었다.

그 건물은 과연 예배당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었다. 목사님은 처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나중에야 밝혀졌다. 그것도 목사님 자신의 입을 통해서였다.  농촌이 급격하게 고령화되면서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많은 외로운 사람들의 안락한 말년을 위해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구상을 다 밝히지는 않고 있었지만, 이를테면 요양원이 최종 목적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건물을 사용할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대부분 믿었고, 그리고 감격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새로 생긴 교회의 성도가 되어갔다. 신앙은 갑자기 불어나는 물결처럼, 유행처럼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딱 두 명뿐이었지만, 이제는 불교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부부 두 사람과 할머니 한 분, 그리고 아주 고령의 할아버지급 남자들 몇몇만 교회를 안 다니고 마을의 대다수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 종교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은 뭔가 은근한 소외감을 느껴야만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마치 당연한 의무를 요구하듯이 교회 가자고 속삭이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주보라든가 교회관련 유인물을 들고 와서 뭔가를 과시하곤 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건만 은밀하게 뭔가가 있는 것 같은, 그 뭔가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다는 투의 이를테면 전도 바람이 한동안 마을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일 년도 채 안 돼서 잠잠해져 갔다. 서울에서 귀농한 부부가 동네 교회를 그만두고 멀리 다른 동네 교회를 다니는가 싶더니 기독교신앙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목사님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돼지나 오리 같은 동물로 보고 마구 호통을 친다는 것이었다. 호통소리에 놀라서 항의를 하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더욱더 호통을 친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저런 이유로 신앙을 포기하건 말건 목사님의 사업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것도 알지 못했고, 끝난 뒤에 알게 된 바에 빠르면 예배당이 최종 목적은 분명 아니었다. 아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령화된 농촌의 수많은 노인들이 목사님의 최종 목적이었다.

시작에서 준공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심정에 그만 혀라도 깨물고 싶어지기는 하지만, 한편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 대다수의 동의를 받아 지어진 건물이었기에 관계 당국에서는 아무런 제재나 조건 없이 목사님이 신청한 복지법인 설립에 관한 모든 행정절차를 마무리 지어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을에 복지법인 간판을 단 요양원 하나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법인체는 지금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왜? 목사님이 팔려고 내놓았으니까. 작은 예배당을 짓겠다고 오신 목사님은 그 방면의 전문가였던 것이다. 외로움이 유행병처럼 창궐하는 농촌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부 종교인들에게는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비쳐질 수도 있는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