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집인터뷰> ‘정대협’ 윤미향 대표에게 듣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얘기-1회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대표

“나는 그때 아직 열두 살이었습니다. 뭐가 뭔지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는데 그는 나를 바닥에 눕혀 짓누른 채 칼로 내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나는 피를 흘렸는데 그는 바지를 벗어 버리고 나를 강간했습니다.” <20년간의 수요일 中 김영숙 할머니의 증언>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진주만 공격까지. 일본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수많은 청년들이 징용·징병됐고, 여성에게까지 동원 정책이 적용됐다. 군수품을 생산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또 하나의 잔인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위안소’ 설립이다. 20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녀들이 일본군의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 끌려갔다.

“캐러멜하고, 그거 뭐야 밀크, 뭐 먹을 것 주고, 돈도 많이 준다고 해서 갔지. 땅도 다 뺏기고 뭐 있어? 일본 사람들이 다 공출하지. 그때 먹을 거 없잖아.” <20년간의 수요일 中 김화선 할머니의 증언>

캐러멜을 준다는 말에 따라나선 소녀, 비단 공장에 취직하러 떠난 소녀, 영문도 모른 채 몸무게를 재고 트럭에 몸을 실은 소녀까지, 다양한 이유로 소녀들은 전장으로 떠났다. 이후 그들의 인생은 참혹했다. 성폭력에 성적 학대, 폭행까지,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홉 시나 열시가 되면 장교들이 와. 장교들이 사람을 개 취급해. 술을 처먹고 와 갖고 그 긴 칼을 질질 긋고 다닌다. 지 하잔 대로 안 하면.” <20년간의 수요일 中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

“군인들이 끌고 가서 아래가 조그마하니까 그게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맘대로 못 하니까 성숙하지 못했다고 해서 여자 거기를 칼로 자르는 거야. 싫다고 하니까 너희 같은 것들이 뭣이냐고, 부속품으로 온 것인데 너희들이 뭣이냐고 일본 말로 하면서 때려.” <20년간의 수요일 中 김봉이 할머니의 증언>

상습적인 성폭행을 통해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은 총살을 시켜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낙태를 시켜 다시 위안소로 돌려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기 밴 사람은 몽땅 그렇게 고른다고 하네. 아기 밴 사람, 만삭된 사람, 쪽 뽑아서 한 트럭 싣고 가서는 총살시키고….” <20년간의 수요일 中 석복순 할머니의 증언>

1945년 8월 15일, 지옥 같은 시간은 끝이 보이는 듯했다. 일본군이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군의 여자'라는 오명을 쓰고 중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고향으로 가는 것도 걷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는 피난길에 만난 한국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위안소와 다를 것 없는 시간이 계속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뒤 주인은 보따리를 싸서 달아나 버렸지. (중략) 그런 와중에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옷도 다 빼앗고 막 때렸어. 나도 그들에게 얻어맞았지.” <20년간의 수요일 中 홍강림 할머니의 증언>

어렵게 고국 땅을 다시 밟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성들도 많았다.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내가 나이가 하도 어려서 군인을 상대하면 자주 기절을 했거든. 그러면 군인들이 마약 주사를 주는 거야. (중략) 나는 '위안부' 갔다 왔다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그래도 고향 사람들은 내가 마약 중독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모두 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을 눈치 챘던 거지. 결국은 나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20년간의 수요일 中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

해방 후에도 고통을 겪어야 했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 이제는 할머니가 됐지만 그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일본이 위안부 피해 여성의 동원을 부정하며 사죄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매주 수요일(수요집회) 피해자 할머니들은 거리로 나와 전쟁 당시의 참혹함을 알리며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많은 시민 단체와 청소년들이 힘을 더하고 있다. 광복 70주년, 이 단체들의 중심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윤미향 대표를 만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3회에 걸쳐 개제된다.

 

 

- 언제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됐는가?

▲ 정대협과 할머니들의 활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정대협이 만들어진 건 1990년, 할머니들의 활동이 시작된 건 92년경이다. 처음 정대협이 만들어질 때는 피해자들을 아무도 알지 못 했다.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신고를 하셨고, 그 이후에 여러 피해자들이 피해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월 8일에 수요집회가 시작됐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참석하지 않으셨다. 정대협을 중심으로 한 여성단체들만 수요집회를 진행했고, 그 이후에야 할머니들도 참여를 하기 시작했다.

 

- 처음 모이게 된 계기는?

▲ 정대협은 1990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전에 주요 여성 단체들은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에 간다고 하면 긴급하게 모여서 기자회견을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 남성들이 한국에 성매매 관광을 올 때도 일본 여성들과 연대해 반대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갔다. 성매매 관광과 같은 것들이 역사의 뿌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일제 식민지 시기의 징용, 징병, 원폭 피해 문제들은 이미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문제는 왜 제기되지 않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에 대한 자성에서부터 출발해 산발적인 활동을 해오다보니 결국 연대로 모여서 활동하기보다는 상설협의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대협은 일종의 태스크포스다.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단체들이 긴급하게 모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으면 이미 해산됐어야 할 단체다. 우리 단체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바쁘다고 할 수 있다. 활동력이 가장 강한 여성 단체들이 회원으로 돼있기 때문이다.

 

- 처음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한 김학순 할머니는 정대협이 설득을 한 것인가?

▲ 우리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 했다. 우리 단체가 활동하는 것을 언론을 통해 보고 결정하신 것 같다. 90년 대 일본 정부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질문한 일본의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때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군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했다. 그런 사실을 피해자들이 접하게 된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사실을 접하고 분노하셨다고 한다. '증인이 이렇게 살아 있는데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찾아오셔서 기자회견을 요청하셨고, 1991년 8월 14일 8.15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이다.

 

- 할머니들은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신가?

▲ 언론 인터뷰, 강연, 집회, 지역 행사 참석, 해외 순회 등 대부분의 활동에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하고 계신다. 연세가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외교하고, 대변인 역할을 하고 계신다. 본인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직접 한다는 의지가 강하다.

 

-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건강은 어떠신지.

▲ 건강이 굉장히 좋지 않으시다. 생존해계신 48분 중 중국에 세 분, 일본에 한 분, 미국에 한 분이 계신다. 국내에는 지금 43분이 계시는 것이다. 미국에 계신 분도 노인질환을 겪고 계셔서 기억력이 거의 없어졌다. 중국에 계신 분들도 두 분이 요양 시설에 계신다. 국내에 계신 분들의 평균 연령은 거의 90세다. 건강하게 다닐 수 있는 분들, 과거의 기억을 그래도 생생하게 갖고 계신 분들은 몇 분 없는 상황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할머니들에 대해. 그런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 지난 7월에는 위안부 피해자 두 분이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 저희와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자세히 알지 못한다. 이번 소송에 대해 지원은 하지 않고 있다. 이미 미국 소송을 한번 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송은 기각됐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판례가 없으면 승소가 불가능하다. 또한 미국에서 일본을 소송하는 것 또한 걸림돌이 됐다. 일본은 미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 관할권을 이유로 기각이 됐다.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소송을 다시 한 번 낸 것이다. 어떤 변호사가 조직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인터넷에서 모금을 한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서 접했다. 할머니들이 소송을 하시는 건 자유다. 하지만 지금 소송을 시작하면 진행과 기다림만이 반복된다. 결국은 할머니들의 에너지만 소모될 뿐이다. 지금 우리가 힘을 쏟아야 되는 부분은 한국 정부를 통한 활동이다. 적극적으로 일본 정부를 압박을 하고, 국제 외교를 펼쳐 일본이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것. 정치적으로 빨리 일본의 입장을 바꾸게 하는 것이 큰 숙제라고 본다.

 

- 미국이 최근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 미국이 일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최근 일이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전쟁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감옥에서 처벌을 기다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처벌했음에도 기시 노부스케는 살았다. 그는 전쟁 후에 일본의 총리가 됐다. 이후 일본이 전쟁 범죄국이 아니라 보통 국가로 지내고 있는 것은 미국의 역할이 컸다. 최근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부터 미국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일본을 앞세워서 아시아권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의 역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최근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했다.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그런 행동이 우리들의 눈에 새삼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 한반도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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