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임미숙의 즐거운 나의 시골생활 이야기 21회

 

경북 김천시 구성면 월계리. 속명 ‘골마’라는 곳에서, 전원생활에 푹 빠져 사는 나. 시골댁~~. 언덕위에 위치한 농가의 해발높이가 300m이니 마을지대가 꽤나 높은 편이다. 필자가 사는 농가에 가기 위해서는, 김천에서 25km정도를 거창 쪽으로 가다가, 충북 영동 쪽으로 조금 들어가다 보면 맑은 냇가를 만난다. 올갱이가 살고 있는,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 개울을 건너 산중턱으로 오르다 보면 빨간 지붕이 보인다. 1987년도에 대구에서 이곳 월계리로 이사 온 울 아버지. 지금처럼 귀농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젖소 목장을 하시겠다고 들어온 이곳.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는 외로운 삶을 사시다 가신 이곳. 그 당시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정말 척박했다. 김천서 버스를 1시간은 타야 이곳에 도착하고, 버스길도 비포장이던 그 시절. 그때 마련되어진 이곳 월계리 집. 2009년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며 결심했어, 지금 내려가는 거야. 그때는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던 터라 나름 고민 끝에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 결정하게 되었다. 2010년 10월, 내 나이 50 초반에 물 맑고 공기 좋고, 산세 좋은 월계리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한낮의 무더위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식욕도 의욕도 움츠러들게 하는 햇볕 쨍쨍한 나날이다. 시골은 시원하지 않느냐는 도시인들, 노~라고 답한다. 시골은 문을 열고나서면 사방천지가 모두 땡볕 그자체이고 나무 그늘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채를 연신 부쳐대는 동네 어르신들 모습이 애처롭다. 더위를 이겨내고 있는 건지, 너무 더워 넋을 놓고 있는 건지…. 혀를 있는 대로 빼문 채 헐떡이는 우리 집 차돌군도 애처롭고, 뜨거운 태양에 축~ 늘어진 잡초도 꽃나무도 모두 힘겨워 보이는 무더운 여름 한낮이다.

8월의 달력을 펴고 보니 15일 빨간 글씨가 눈에 확~들어온다. 8.15광복절이다. 올 8.15는 70주년 광복절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에게 더 감격스럽게 다가오는 광복절!!

2009년 8.15는 우리 할아버지 임경갑 님이 건국포장을 수여받던 날. 울 아버지 노환으로 정신이 약간씩 흐려지던 그런 때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홉 살 되던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하며 산전수전 다 겪으시다 곰방대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셨다. 요즘 세대들에겐 생소할 법한 곰방대는 시대극에 나오는 담배를 피우는 용도의 긴 파이프를 일컫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 곰방대 사업은 엄청나게 호황이었단다. 중국에서 쇠붙이를 들여와 만드셨다니 지금으로 치면 제법 탄탄한 사업가셨나 보다. 할아버지는 일자무식이셨지만, 독립군의 자금 담당을 맡아 사업으로 일군 부를 대부분 쏟아 부으셨다. 아들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마지막 남은 아들인 우리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건국포장을 대신 수여받으셨다. 할아버지의 업적이 적힌 문서를 보니 이곳 김천 지례면에서 교인 모임인 듯한 명칭의 단체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거기에 가담한 인원이 50명이 넘었다고 했다. 모두가 농민인데 할아버지만 상업으로 직업란에 표기가 되어있었다.

큰고모님이나 아버지한테 전해들은 할아버지의 인품. 모두 없이 살던 시절인 1930년대, 명절 때면 김천의 거지들을 모두 모이게 해서 밥을 먹게 해주고, 큰 목욕탕을 통째 빌려 목욕을 시켜주었단다. 배움은 짧은 할아버지셨지만, 인품이 대단하신 분이셨단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독립운동 당시 할아버지는 큰 부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네 집사로 일하던 이가 재산을 빼돌리고, 또 독립자금으로 퍼다 나르다 보니 재산은 서서히 줄어들게 됐다. 게다가 일본형사들한테 수시로 붙들려가서 고문을 당한 할아버지는 결국 병을 얻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아버지의 위형제분들은 그래도 조금의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어린 형제들은 가난을 면치 못했던가 보다. 재산 다 날리고, 병까지 얻고, 무슨 일만 생기면 일본형사들은 할아버지를 끌고 가고. 약주 거나해져서 한스런 이야기로 늘 하시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열심히 듣지 않고, 흘려버렸던 것이 너무나 죄송했다. 할아버지가 원산교도소에서 2년씩 형을 살았기에 근거가 없어서 독립운동가로 확인할 수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만으로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좀 하셨나보다 했던 거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살만해졌던지, 2009년 그해에 나라에서 그 업적을 찾아서 우리를 찾아왔다. 할아버지의 업적이 문서로 찍혀있는 것을 들고서. 우리 형제들은 너무나 감격스러웠고 한편 할아버지께는 죄송한 맘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젤로 효자이신듯, 당신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 건국포장증을 가슴에 안을 수가 있었으니~~

2009년 11월에 우리 아버지는 건국포장을 받으신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뿌듯함을 느끼시고 돌아가셨으니 그나마 다른 형제분들보다는 행복하셨으리라...

이렇게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되고 보니, 독립운동가에게 주는 혜택을 알게 되었다. 우선..건국훈장과 건국 포장과의 기준은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그전에 사망하셨으면, 건국훈장, 해방이후 사망하셨으면 건국포장..이렇게 구분을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해방을 보고 사망 하셨으니 건국포장을 받으신거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에게 주는 금전적인 혜택으로는 제일 큰 자손에게 매달 70만원의 연금이 나온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 8,9,10,11..4달의 연금으로 280만원을 받아보시고 가셨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손자대까지 대학 등록금이 면제된다. 진즉에 이런 혜택을 받았다면 우리 공부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우리형제는 지금이라도 대학 공부 더해볼까, 하며 웃는다. 그런데, 진짜로, 내년엔 대학에 가서 식품에 관한 공부를 할아버지 공덕으로 더해볼까 생각중이다.

오늘은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고 왔다. 뭉클했다. 할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보니 우직하게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도, 이중첩자도, 변절자도 모두 시대의 희생양들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나 또한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전지현이 연기한 그런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돈을 좇는 매국노가 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무턱대고 매국노라고 비난할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 어떻게 보면 그들 모두가 시대의 희생양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이 시대에 태어난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어쨌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우리 선조님들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바친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이렇듯 지면에서 드러내놓고 자랑해도 하나도 쑥스럽지 않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듣는 이들은 한결 같이 우리나라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대접받는 그런 나라가 돼야 한다고 하더라. 2010년 대전 현충원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그곳을 방문해보니 독립운동가들의 묘지가 엄청 컸다.

국군묘지는 아주 촘촘히 작게 조성돼있는데, 독립운동가들 묘지는 꽤 큰 규모로 조성돼있어서 나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현충일만 되면 조카들과 함께 찾아가서 참배를 드리고, 훌륭하신 할아버지 이야기도 들려주고, 우리도 반듯하게 살자고 당부한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도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나보다. 예전 그 시대에 사업을 하셨던 그 피를 물려받아서 지금 시골에서 된장가공 공장을 지어 된장사업을 하니까.ㅎㅎㅎ

거푸집을 짓고, 철근을 깐 뒤 레미콘 타설을 앞두고 아무래도 거슬리던 화장실 위치를 변경하는 바람에 공사가 10일 씩이나 늦춰졌다. 하지만 건물은 한번 짓고 나면 평생 가는 건데, 변경하기를 잘한듯하다. 현장감독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감수하고, 경비부담을 내가 떠안는 것으로 하고 변경했다. 살인더위가 계속 되고 있는데 공사 일정이 며칠 늦춰지니 차라리 맘이 가볍다. 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시간과 함께 물러나리라. 더위도,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질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힘든 만큼 단단해지리라 마음을 다잡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휴가랍시고 내려와서 풀만 내리 3일을 깎고 간 동생이 얼마나 고마운지…. 풀을 깎아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늘 챙기고 도와주려고 하는 동기간이 있어서 참 든든하고 감사하다.

오늘 해거름 장독대 주변의 풀을 뽑고 있으니, 장 익는 구수한 냄새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흐르는 땀방울이 보람차고, 장 익는 소리에 매료되어가는 내 자신이 기특하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정겨운 여름날의 저녁 무렵. 오늘 만난 우리 조카 “고모도 한때는 도시의 ‘차도녀’였는데…”하며 웃는다. 그 의미는 시골아줌씨 다 됐다는 말?ㅎㅎ “얘야∼이 소리 좀 들어보렴. 장 익는 소리….” 장 익는 냄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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