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말 달인’ 엄민용의 ‘우리말 나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이나 나날을 비유적으로 얘기하면서 ‘새털같이 하고많은…’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열이면 열 모두 그렇게들 말합니다. “새털같이 많은 게 시간인데, 뭘 그리 서두르나. 쉬엄쉬엄 하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새털같이 많은…’은 바른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새에게는 털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작은 몸뚱이에, 거기에다 ‘깃’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빼고 나면 털은 별로 없습니다.

‘하고많음’을 나타내려면 새보다는 좀 더 털이 많은 짐승을 갖다대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쇠(소)’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쇠털을 뽑아서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는다”는 뜻으로, 융통성이 전혀 없고 고지식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으로 ‘쇠털을 뽑아 제 구멍에 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 박힌 하나의 털”이란 뜻으로, 매우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적은 수를 일컫는 ‘구우일모(九牛一毛)’라는 사자성어도 있지요.

이처럼 ‘하고많음’을 나타내려면 ‘새털’이 아니라 ‘쇠털’이 제격입니다. ‘새털같이 많은…’은 ‘쇠털같이 많은…’이 바른 표현이라는 얘기죠.

우스갯소리지만, 만약 소가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인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지도 모르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공연히 나쁜 얘기에 자신이 끌어들인다면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아래 예문을 보세요.

“○○○○로 써 놓아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다“ “글씨가 아주 ○○○○이구나” 따위 문장에서 ○○○○에 들어갈 바른말은 무어라고 생각하세요?

대부분은 ‘개발소발’ ‘개발쇠발’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니면 ‘게발새발’ ‘개발새발’ ‘게발소발’로 쓰실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국어사전을 뒤져도 ‘개발소발’ ‘개발쇠발’ ‘게발새발’ ‘게발소발’ 따위 낱말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 모두는 표준어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함부로 갈겨 써 놓은 것”을 일컫는 바른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괴발개발’입니다.

글자가 좀 낯설지요? ‘개’야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 따위의 그 ‘개’임을 쉽게 알 수 있겠는데, ‘괴’가 무엇을 뜻하는지 얼른 생각나지 않으실 겁니다.

여기서 ‘괴’는 바로 고양이입니다. ‘괴’는 고양이의 옛말인데요. 강원도나 경상도 지방에서는 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괴 불알 앓는 소리’(쉴 새 없이 듣기 싫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나 ‘괴 밥 먹듯 한다’(음식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고 조금만 먹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게’나 ‘새’는 땅바닥에 발자국을 남길 일이 드뭅니다. 또 ‘쇠’(소)는 띄엄띄엄 발자국을 남깁니다. 어지러운 글씨를 나타내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물이지요. 괜히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엉뚱한 데서 명예를 훼손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참, 최근에 ‘개발새발’은 표준어가 됐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잘못 써서, 많이 쓰는 말을 표준어로 삼아 준 것이죠. 그러나 여전히 ‘개발소발’ ‘개발쇠발’ ‘게발새발’ ‘게발소발’ 등은 바른말이 아닙니다. <경향신문 엔터비즈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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