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옻닭 익어가는 한여름 활터 풍경

 

활터가 텅 비었다. 사람이 없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을 구경이나마 해본 게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없는데 과녁만 홀로 외로이 사람을 기다리는 형국이다. 사람은 죄다들 여름휴가라도 떠나 버렸는가? 아니다. 직업이 농부인 사람들이 장기간 여름휴가를 떠난다는 얘기는 글쎄, 풍문으로도 아직 못 들어봤다.

도시의 활터는 삼복염천 무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시를 내는 즐거움을 누린다고도 하지만, 절반 이상의 사우가 고추 농사를 짓고 있는 고창의 초파정은 사정이 영 다르다. 고추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도 비 한 방울 없는 삼복염천 뙤약볕이 보름 이상 계속되다 보니 논에 물을 끌어대기 바빠서 활을 잡을 틈이 없다.

 

▲ 뭔 화살을 그렇게 재미있게 내냐~

 

고창의 고추는 해풍고추라고 알려져서 인기가 제법 좋다. 고추가 바닷바람에 마르면 뭐가 어떻게 좋은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영광굴비가 바닷바람에 말려져서 맛이 좋고, 명태가 또한 바닷바람에 말려져서 명태 구실을 제대로 한다고 알려져 있듯이, 고추도 역시 바닷바람을 쐬면 뭔가 좋을 거라는 믿음은 어쨌든 확고하다. 그래서인지 고창의 고추는 재고 문제로 걱정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고추 농사에 희망을 걸고 있는 농가 또한 많았다.

금년에는 봄부터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강원도와 경상북도 그리고 충청도 쪽 고추농사가 모종도 제대로 못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탄 이후 고추가격이 폭등할 것이라는 소문이 쫙 돌았다. 고추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는 소문은, 그것은 고창의 고추 농가에 있어 하나의 희망이요 재앙이었다.

희망과 재앙이 반반씩 섞여서 농밀하게 꿈틀거리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외형상 형태는 그렇다 해도 농민들은 어렴풋이나마 이미 알고 있었다. 농민의 희망이 이루어진 예는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농민들은 고추 가격 폭등이라는 달달한 주제를 맵차게 걷어차 버리지는 못하면서도 그 자체에 무슨 희망 같은 것을 걸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봐야 그것 뭐, 장사꾼들이나 살판 나겠제 뭐.”

어느 분야에서나 그렇겠지만, 특히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 경험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다. 경험이 선생이요 장관이요 대통령이고 모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벌 고추가 마르기도 전부터 중국에서 고추가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 진지한 너무나 진지한 표정들

 

예전에는 중국에서 고추를 들여온다 해도 마른 고추였다. 마른 고추는 전문적인 식견이 없어도 중국산인지 한국산인지 육안으로 대충 감이 잡혔다. 그런데 이제는 마른 고추가 아닌 물고추를 들여온단다. 밭에서 따자마자 마르기 전에 한국으로 들여와서 한국의 물고추와 섞어놓고 한국의 햇볕과 공기와 바람을 쐬어 말린 다음 한국산 고추라는 이름표를 붙여서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고추 농사가 다른 작물에 비해 수입이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인건비 따먹기 농사일뿐이었다. 콩이나 참깨 같은 작물은 일단 심어놓으면 수확까지 사람의 손길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지만, 고추는 모종을 키우는 이른 봄부터 사람이 내내 달라붙어 있어야만 한다.

물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고추의 특성상 비가 안 오면 물을 줘야 하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배수로를 내느라 긴장을 해야 하며, 마침내 열매가 열려서 익기 시작하면 삼복염천에 일일이 골라서 하나씩 따내야 하고, 말려야 하고, 말림이 끝나면 또 잘못 된 것을 골라내야 하니 단 하루도 마음껏 쉴 틈이 없는 농사가 고추 농사였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이런 비유를 하기도 한다.

“아따 그놈의 것이 사람 손길을 겁나게도 좋아헌당게. 하루라도 안 만져주면 그만 토라져서 색깔이 변해버려. 어쩔 것이여. 새가 빠지도록 만지고 또 만지고, 그럼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렇게 끝도 없이 속삭여주는 수밖에.”

그렇게 새빠지게 매달려서 손에 쥐는 수입이라는 것도 엄밀하게 따져보면 자기 자신의 인건비도 채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령 고추농사에 매달린 날짜를 시간대로 따져서 꼬박 석 달이라고 한다면, 고추를 시장에 내다 팔아서 손에 쥐는 현금 총액은 석 달 곱하기 하루 인건비에 근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절로 터지는 하품을 어쩔것이여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조적으로 “차라리 남의 집 품팔이를 다녔더라면 이보다는 몇 배 나았을 텐디 말이여 잉?”하기도 하지만 매번 그 순간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돌아서면 벌써 잊어버리고 다음 농사 구상에 빠져서 혼자 싱글싱글 웃어댄다. 어쩔 것인가.

농사라는 직업은 이렇게도 그 무슨 이론이나 회계 원리로는 답을 낼 수 없는 묘함이 있다. 그리고 이 묘함은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즐긴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리는 재벌가 사람들이 보자면 바보천치 멍텅구리들이라고 하겠지만, 그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농사꾼들은 때로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준다. 아니 속아버린다. 그리고 웃는다. 마치 산다는 것은 웃음의 소재를 발굴해내서 즐기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그런 ‘바보천치 멍텅구리’ 같은 농사꾼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복날이었고, 전날에 마침 비도 조금 내려주었다. 하긴 비가 없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모였다. ‘어이 우리 한 번 뭉치세’, 해서 뭉친 것은 아니었다. 우연이었다. 누군가 우연찮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활터 얘기를 했고, 소주 한 잔 얘기를 했고, 기왕이면 옻닭을 안주로 해서 마시면 어떠냐 하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또 하는 방식으로 일은 진행되었다.

 

▲ 옻닭이 끓기 전에...

 

그렇게 해서 무려 열일곱 명이 모여들었다.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아마 대부분의 사우들이 요새 유행하는 말로 꿀꿀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한 달이 넘게 비지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는 일만 해 왔으니 이제쯤 슬슬 다른 생각이 날 만도 했다.

일탈, 일상에서의 탈출만큼 사람 마음을 흔들어대는 게 또 있을까. 일탈이란 누구에게나 설렘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어렵다. 쉬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안한 설렘이니까. 마을회관에서 대충 밥 한 끼 먹는 일이라면 어려울 것도 불안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활터는 마을을 떠나야 한다. 잠깐 들러서 활시위 몇 번 당기고 오는 일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적어도 한나절은 활터에서 놀아야 한다. 내가 없으면 농사는 어떻게 되나. 하루라도 안 만져주면 토라져서 색깔이 변하는 저놈의 농사를 어떻게 하는가 말이다. 그래서 충실한 어떤 사람은 비장한 각오로 아내를 불러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오늘 하루는 자네 서방 없는 걸로 치소 잉? 그러니까 자네는 오늘 하루 과부인 셈이여.”

꾸며낸 얘기가 아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도 아니다. 어디서 들은 남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우리 활터 초파정 사우 가운데 한 사람이 옻닭을 뜯으면서 한 말이다. 자기는 자기 아내에게 아예 선언을 하고 나왔다고, 그래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도 된다는 얘기,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는 히히대고 웃는 게 아니라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듣는 우리는 일단 히히대고 웃었지만, 그의 비장한 표정에 감염돼서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비닐하우스 안에서의 회식

 

사우가 많아서 잘나가는 활터에는 부속건물이 따로 있어서 식당과 찻집 등 조리 기구를 완벽하게 갖춰놓고 필요하면 먹고 마셔가며 놀기도 하고 토론도 한다지만, 못난 데는 없다 해도 잘나간다고 보기는 어려운 고창의 초파정은 부속 건물로 비닐하우스 하나 달랑 세워놓았을 뿐이다. 그 안에 중고 냉장고 하나와 시장에서 쓰는 가스화덕 하나를 역시 중고로 사서 들여놓았고, 그리고 면사무소 등 관공서에서 집기를 교체할 때 나온 회의용 탁자며 의자 같은 것들을 가져다가 대충 구색을 맞췄다. 대충이긴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셈이었다. 무엇이든 없다고 생각하면 없지만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하면 없는 것은 없기 마련이었다. 설령 없는 것이 있다 해도 없다는 사실이 공론화된 바로 다음 날이거나 늦어도 이삼 일 뒤에는 없는 그것이 나타나 있곤 했다. 가령 대형 선풍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없다 하면 누군가가 집에서 안 쓰는 대형 선풍기를 가져오고, 칼도마가 없다 하면 또 누군가가 단골 식당에서 오래된 칼도마를 얻어다가 채워놓는 식이었다.

회식을 위한 음식도 그런 방식으로 조달되었다. 금년에 양파 농사를 망쳐서 이백여 만원의 손해를 봤다는 전직 조합장께서 알이 작은 양파 한 망에 마늘을 들고 왔고, 지난 번 지방선거에 군의원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한, 전직 조합장보다는 훨씬 많은 양파를 심은 까닭에 그 손해가 얼마인지 가늠하기도 아직은 어렵다는 우리의 사범님께서는 양파가 아닌 커다란 수박을 들고 왔다.

그밖에도 이홉들이 소주 한 상자를 들고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맥주 한 상자를 들고 온 사람도 있고, 라면 상자를 들고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풋고추에 햇감자를 들고 온 사람도 있고, 커피믹스 한 상자를 들고 오는가 하면 피로회복제를 몇 상자나 가져온 사람 등등 그동안 내내 쓸쓸하기만 하던 활터 초파정은 금세 식구도 많고 식량도 많은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 오늘의 주인공인 옻닭 또한 그렇게 조달되는가? 아니다. 주인공이란 어떤 경우에나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이어서, 우연에 기대지 않고 정식으로 돈을 내고 사 와야 한다. 그러면 그 돈은 누가 내는가. 사우들이 낸다. 십시일반은 아니다. 거의 모두가 돈을 낸다는 점에서 십시일반에 가깝기는 하지만, 십 원 한 장도 안 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십시일반은 아니다.

우리 문화에 추렴이라는 것이 있다. 추렴은 그야말로 십시일반이다. 이것을 좀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서 고안한 것으로 ‘나이롱뽕’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도 그런 ‘나이롱뽕’을 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삼사십 년 전에는 있었다. 구슬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열심히 일을 했던 사람들이, 어느 하루 마음이 허전해서 일손을 놓고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을 때, 그때 술판을 벌이기는 벌여야겠는데 어느 한 사람이 부담할 수는 없고, 해서 나이롱뽕을 치게 된다.

 

▲ 하루가 저무는 순간의 활터

 

나이롱뽕을 몇 차례 반복해서 치고 나면, 대부분 다 돈을 내게 돼 있지만, 그야말로 극적이게도 단돈 일 원 하나 안 내게 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많이 내는 사람도 있고, 적게 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리 부담은 안 되는 금액이다.

활터에는 나이롱뽕이 아니라 편사라는 제도가 면면히 내려오고 있었다. 편사란 말 그대로 편을 짜서 활을 쏘는 것으로, 편을 짜는 방식이 재미있다. 각자 한 개씩의 화살을 심판에게 주면, 심판은 다 모여진 화살을 두 손에 들고 손을 뒤로 돌려서 자기 자신은 안 보이게 한 다음 차례차례 한 개씩을 뽑아서 앞에 놓는다. 앞에는 진다는 의미에서의 질조라는 표시가 있고, 그 옆에는 이긴다는 의미에서의 이길조라는 표시가 미리 되어 있다. 그래서 심판은 화살 하나를 빼서 앞에 놓을 때마다 “질조요”, 또는 “이길조요”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 소리가 한 번 나올 때마다 화살의 주인은 감탄사 혹은 탄식을 지르는데 꼭 이런 모양이다.

“아니 내가 질조로 뽑혔단 말이여. 으매 참말로 속상혀 못 살겠네 잉?”

“아하하하, 내가 이길조인게 잉? 틀림없는 이길조여.”

이 과정에서 터지는 웃음소리는, 그것은 가히 산 하나를 옮겨놓을 만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거뜬히 옮겨놓고 순서대로 활을 내기 시작하는데, 질조라 해서 실제로 지는 것은 아니고, 이길조 또한 이길조라 해서 실제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처음 한 판은 지거나 혹은 이기지만, 다음 한 판은 다시 이기거나 지기 때문에, 판이 거듭되는 동안 진 편과 이긴 편의 구분은 거의 무의미해져 버리고, 모두가 얼마씩의 돈을 내서 닭을 사는 형국이 된다.

자, 이제 옻닭은 다 끓었다. 소주도 적당히 시원해졌다. 장소가 비닐하우스 안인 까닭에 온도가 장난이 아니게 높지만, 온도야 어떻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모두가 열심이다. 물론 마시고, 옻닭을 뜯는 일에만 열심인 것은 아니다. 이 마을 저 마을, 이런 농사 저런 농사, 각자 재량껏 살아가는 사람들이 열일곱 명이나 한자리에 모여 있다 보니 각종 새로운 정보가 봇물 터진 듯이 쏟아져 나온다. 노는 것은 노는 것만이 아닌, 정보를 교환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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