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우리가 영화 ‘암살’에 충성하는 이유는?

 

골프장 잔디수선 일이 쉬는 날 영화 ‘암살’을 보러 갔다. 가긴 갔지만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서 다른 영화를 보았다. 다른 영화로는 그것 말고도 유명한 ‘연평해전’이 있었지만, 시놉시스만 보고도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의도를 확연히 알겠다는 느낌이어서 보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화 연평해전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는 그만 정나미가 떨어졌다고나 할까, 관객의 눈물샘을 최대한 자극해서 ‘좌파는 나빠요’ 류의 싸구려 결론을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하게 읽혀지는, 이 땅의 영화예술과 관객의 수준을 저 아래로까지 끌어내리는 그런 선전물에 황금 같은 시간을 투자할 일은 아니다 싶어 싹 외면해 버렸다.

 

▲ 극장 맞은편의 모양성

 

그런 영화가 무려 천팔백 개나 되는 스크린에 걸렸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전체 스크린이 이천삼백여 개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천팔백 개라니. 예비 관객이 그렇게 많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기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처음부터 움직이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그렇다면 이건 대체 무슨 공작의 결과인 것인가?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우리 사회가 어느새 이렇게까지 전체주의화돼 버렸구나 하는 자각은 끔찍한 두통으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어쨌든 다시 일주일 뒤의 또 쉬는 날에, 이번에는 조금 일찍 서둘러서 집을 나갔다. 역시 영화 암살을 보자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번에도 좌석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다 팔려버렸다. 그런데 얄궂게도 완전 매진되지는 않고 딱 한 석이 남아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었다.

사람은 둘인데 의자는 하나뿐이구나. 어쩐다? 그렇지, 남자가 여자를 무릎에 앉히거나 혹은 옆에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영화를 보면 되겠다 싶었지만, 매표를 담당하는 앳된 직원은 이게 웬 구석기 시대 인간들인가 하는 표정으로 웃음이나 픽 흘리고 말았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007류의 오락영화표 두 장을 사서 들고 도서관에 가서 단편소설 한 편을 읽고, 배가 고파 식당으로 달려가서 비빔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난 뒤에 극장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씩 여러 차례 웃다가 나왔다. 확실히 그것은 오락영화였고, 무더운 여름철에는 그런대로 봐줄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에 우리는 또 극장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영화 ‘암살’ 한 편만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소문난 ‘베테랑’이 벌써 개봉되어 들어와 있었다. 손석희씨가 뉴스룸 2부에서 초대한 류승완 감독의 이야기가 우리를 이미 전염시켜 놓고 있었다고나 할까. 고창에 ‘베테랑’이 들어오면 반드시 가서 보자, 하는 목표를 우리는 영화가 서울에서 개봉되기 훨씬 전에 세워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날 영화 ‘암살’과 ‘베테랑’ 둘 중에 최소한 한 편은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안고 집을 나선 셈이었다.

 

▲ 동리국악당

 

그런데 이게 어인 횡재인가. ‘베테랑’ 상영 세 시간 전에 도착한 우리 앞에 좌석이 무려 다섯 석이나 남아 있었다. ‘베테랑’이 끝나면 바로 그 자리 그 스크린에서 십 분 뒤에 상영하는 ‘암살’은 아직 열두 석이나 남아 있었다. 우리는 자못 의기가 양양해서 ‘베테랑’ 두 장, ‘암살’ 두 장, 그렇게 영화표를 네 장이나 사서 들고 시장 구경을 나섰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장통에 있는 밥집 고향식당으로 향했다.

날씨가 서늘한 시기에는 오직 국밥 한 가지만 하고, 날씨가 후텁지근한 시기에는 오직 비빔밥 한 종류만 한다는 고향식당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밥집이었다. 그리 깨끗하지도 않고 지저분하지도 않은 세 평 남짓한 크기의 실내 환경에, 음식 맛 또한 특별히 뛰어나지도 못하지도 않은, 손님이 들어오면 오서 오시라는 인사 대신 “우리 집은 비빔밥 한 가지밖에 읎는디”하고 말줄임표를 사용하는 주인아주머니는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일단 한 번 우연히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잊지 못해서 또 한 번 가보고 싶어지는 그런 식당이라고나 해두자.

손님이 어떤 영업집을 잊지 못해서 또 한 번 가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 없이 주인에게는 영광스런 일일 터이었다. 그런데 고향식당 아주머니는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생전 처음 본다는 투로 “우리는 비빔밥 한 가지밖에 읎는디” 하는 말줄임표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해서 다시 찾았건만,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하는 뭐 그런 짝이었다. 우리는 그 점이 다소 야속하기도 했지만, 문득 깨달았다.

“아, 이것이었구나. 고향식당의 매력이.”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란하지 않다는 거,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거기에 있다는 거, 이것만큼 매력적인 사건이 인간사에 또 무엇일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웠다. 딱히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다. 남김없이 먹어주는 것이 음식점 주인에 대한 최고의 인사라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밥 한 톨 남김없이 비빔밥을 다 먹어치운 우리는 그 뜨거운 여름날 오후 두 시 즈음에 팔짱을 끼고 시장통을 어슬렁거리며 영화와 극장에 관한 각자의 경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 작은영화관 동리 시네마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시절 고창의 시장통 주변에 극장이 둘 있었다. 하나는 중앙이요 하나는 성림이었다. 성림극장과 중앙극장은 그 당시 국민학생들의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물론 둘 다 기억속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된 뒤로 관객이 급감한 중앙극장은 일찌감치 문을 닫은 정도가 아니라 건물 자체를 없애 버렸고, 성림극장은 나이트클럽, 볼링장, 롤러스케이트장을 거쳐서 몇 년 전까지 당구장과 막걸리 집으로 이용되다가 최종적으로 헐리고 그 자리에 빌라가 들어섰다.

고창에 극장 시설이 하나도 없었던 기간은 글쎄, 몇 년이나 되려나. 적어도 이십 년은 넘는다고 내 기억은 말하고 있다. 어쩌면 삼십 년도 훨씬 넘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삼십여 년 동안 고창 사람들은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토요명화 같은, 권력자들의 비위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이야기만 보고 들어 왔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좀 더 비약을 하자면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방안에서 텔레비전에 세뇌된 기간이 삼십여 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기간 동안 고창 사람들은 극장판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정읍이나 광주, 혹은 전주로 갔다. 물론 극장판 영화를 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외지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영화를 생각한 바로 그날이거나 다음 날 예매를 하는 등으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만 며칠씩이나 되풀이하다가 시나브로 포기하거나 잊어버리곤 했다.

 

▲ 지하극장 입구

 

그렇게 살아온 고창 사람들 앞에 드디어 극장이 다가왔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는 원형이 보존된 유일한 성으로 알려진 고창의 모양성 입구 매표소 옆에 간판을 달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시기와 고창에 극장이 문을 연 시기가 묘하게 겹친다. 이 묘함의 상징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의 답을 올곧게 내자면 아마 십 년 정도는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드러난 현상만 놓고 말하자면 주민의 욕구와 사회의 변화를 자치단체장이 읽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창의 극장은 개인 사업자가 문을 연 게 아니었다. 일종의 공공기관 성격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어서 개관한 것도 아니었다. 고창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동리 신재효 선생을 기리는 동리국악당 지하 공간을 개조한 것이었다. 예전에 이 공간은 판소리나 가야금, 풍물의 기본 같은 것을 가르치는 전수 공관이었다. 전수관이 따로 신축되면서 창고로 사용되던 것을 지방자치 시대의 문화원과 관련 공무원이 주목하면서 영화관으로 거듭나게 된 셈이었다.

영화관의 공식 명칭은 <작은 영화관 동리시네마>. 규모는 작아도 1관과 2관 그렇게 두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되었다. 객석은 1관이 69석, 2관이 30석. 두 곳 모두 맨 앞의 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가 2미터를 간신히 넘어서는 정도라서 영화를 제대로 보자면 머리를 좌로 우로 바쁘게 움직여만 한다.

그래서 불편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영화 속 인물이 툭 튀어나와서 나를 어떻게 해버릴 것만 같은 스릴을 누릴 수 있다. 어떤 때는 나를 죽이려 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아줄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온 몸이 연체동물처럼 아무런 적개심도 없이 확 풀려버리는 등 크고 화려한 도시의 극장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체험을 부가로 누릴 수 있다.

 

▲ 동리시네마 로비

 

게다가 이 극장은 골라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스크린은 두 개뿐이지만 영화는 하루 평균 다섯 편이 상영되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개봉을 했거나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계속 타고 있는 영화는 1관 2관 번갈아 가면서 하루 다섯 번 이상 상영되기도 하지만, 관객이 별로 안 드는 영화는 하루에 딱 한 차례만 돌리는 방식이다 보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자신의 입맛에 드는 작품을 한 편 정도는 선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창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좋아할까. 극장이 문을 연 이후 꾸준히 지켜봐 온 내 관점에 따르면 고창 사람들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김훈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화장’이 스크린에 떴을 때 관객은 나와 나의 그녀를 포함해서 세 명 뿐이었다.

‘바다로 간 해적’이라든가, ‘민란의 시대’ 같은 이른바 반역에 관한 영화는 좌석이 꽉 차곤 했지만, ‘차이나타운’ 같은 잔혹극은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단을 제시한다는 느낌이어서 ‘차이나타운’이 의미 있는 영화로 다가왔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정 같은 것을 중시하는 고창 사람들의 입맛에는 아무래도 안 맞았던 모양이었다. 시작할 때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던 좌석은 점점 비어가고 있었고, 영화가 끝났을 때는 서너 명밖에 안 남아 있었다.

영화 ‘암살’은 인생에 대한 그 어떤 바람직한 철학도, 비전도, 존엄성도, 자존심마저도 없는 사람들이 대체로 친일을 했고, 또한 그런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심지어는 미래까지도 장악하려고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친일 문제에 민감한 고창 사람들의 정서에 이만한 영화도 없는 셈이다.

 

▲ 객석과 스크린의 거리

 

조선이 해방될 줄 몰랐다는 염석진의 말은 고창 출신 시인 미당 서정주를 그냥 막바로 생각나게 한다. 중앙일보와 했던 미당의 마지막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피식,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은 뒤에는 웃은 죄 값이라도 치르듯이 한참이나 입술에 힘을 주고 한숨을 길게 내쉬어야 했다.

“이쁘게 봐줘.”

내 기억으로는, 이 한 마디가 미당의 입에서 나온 공식적인 마지막 발언이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할 줄을 몰랐던 까닭에 일본을 따르려 했었다고, 그러니 인간적인 연민을 갖고 아름답게 봐달라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그 한 마디를 하면서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미 웃음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당당함을 찾아볼 수 없는, 기쁨도 슬픔도 그 무엇도 아닌, 굳이 번역을 하자면 비굴로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 안면 근육의 씰룩거림일 뿐이었다.

미당의 그런 비굴한 웃음이 고창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는 깊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도 당당하지 못한 웃음으로 후배들의 가슴에 서글픈 회한을 심어주어야만 했는가 말이다.

그런 그가 마침내 운명해서 고향인 고창으로 내려왔을 때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고향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조문을 갔었다. 그날 시인 안도현과 김용택 두 사람이 멀리서 나란히 배회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한 번도 앞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래서 단 한 모금도 안 마셔버리겠다는 투로 멀리서만 배회하던 그 두 사람은 어느 순간 홀연 사라지고 없었다.

미국에서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겠다고 아버지와 함께 온 미당의 손자는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해서 물 한 모금 달라는데도 워터, 워터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기막히다는 심사일 뿐이었지만, 재산 분쟁으로 정신이 없는 롯데의 아들들이 한국말을 영 못하거나 서툴다는 사실을 발견한 요즘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보니 친일의 뿌리는 역시 그렇게 돼 있어서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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