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보다 더 심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 멀리 바닷가가 보였다. 질마제 고갯길. 이 고개를 그동안 몇 번이나 오르내렸던가. 준오네가 살았던 마을로부터 면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나가려면 항상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어렸을 때는 5일에 한번씩 열리는 장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 고개를 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한가지였다. 대개 장터에 가면 어머니가 준오에게 빼놓지 않고 사주는 게 있었는데 바로 자장면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먹었으나 차츰 그 맛에 익숙해져가면서 그 존재를 알게 됐다. 동네 아이들은 꿈에서나 맛보았을까하는 그 시커먼 음식의 향연. 그 색깔 때문에 나란히 놓여져 있는 우동과 자장면 중 뭘 먹을래, 하는 어머니의 선택요구에 우동을 선뜻 가리켰던 준오는 하지만 어머니가 "아냐 맨날 집에서 국수를 먹으니 밖에 나와서는 자장면도 한번 먹어봐라" 하는 반강제적인 권유에 의해 입을 대는 것으로 인연을 맺었었다. 어쨌든 한 그릇을 간신히 해치운 다음 입안 가득 느껴지는 느끼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으면서도, 그 다음 장날 또 시장에 나와서는 그 시커먼 음식을 고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준오는 매일을 장날을 기다리는 낙으로 살다시피 했다. 가끔 누이가 시장에 간다고 따라나서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준오는 울음보를 터뜨려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

약 40여분 전 면소재지에 내려 집에 들어가는 차편을 찾았던 준오는, 심하게 내린 눈 때문에 버스가 끊겼다는 소릴 듣고(이곳에선 자주 있는 일이었다) 택시를 부를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어 눈보라가 심하게 쳐대는 10여 리 길을 걸어보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시야를 자꾸 방해하는 눈바람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자꾸 눈가를 비벼야 했던 준오는 질마제 고개 정상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거기서 집이 있는 마을까지는 약 5리. 바로 앞에 펼쳐진 들판 끝 무렵에 성냡갑 모양의 장난감 같은 몇 개의 집들이 질서 없이 모여있다.

폐부 깊숙이 시원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질마제 고개를 넘을 때면 준오는 항상 잠시간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숨결을 즐기곤 했다. 물론 준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면소재지에 나갔다 들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준오처럼 질마제 고개 위에 그렇게 머물렀다. 등에 밴 땀도 식히고 자신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곳,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곳을 그렇게 관음함으로써 잠시나마 여유를 찾기도 하는 것이었다. 저게 바로 우리들의 삶이구나.

준오는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내려가는 고갯길은 상당히 미끄러웠다. 몇 년이나 신고 다녔는지 모를 가죽 단화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저 준오가 휘청거리는 데만 철저히 기여하고 있을 뿐. 몇 차례나 넘어질 뻔한 위기를 간신히 간신히 넘기며 자꾸 더디어지는 걸음을 이어가던 준오가 고개의 경사진 길을 거의 다 내려와서 한숨을 돌릴 무렵엔 등에 촉촉함을 느껴야 했을 정도였다. 식은땀이 밴 것이다. 문득 한기를 느끼고 진저리를 친 준오는 황망히 마을로 향했다. 벌써 어스름한 밤의 여신이 갈래진 혓바닥을 드리우고 있다. 그 혓바닥 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제 저녁을 하고 있나보다.

노모는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어젯밤 저녁상 자리 끝에 "근디 뭔 일이다냐…"고 물은 게 다였다. 준오는 그저 그랬다. "아뇨, 그냥 볼일이 있어서…좀 쉬고 싶기도 하고". 말끝에 며칠 휴가를 얻었다는 얘기를 덧붙인 게 다였고 그 이후로는 노모도 노부도 그저 준오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을 뿐 채근을 삼갔다. 아들의 얼굴에 그려져 있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탓이리라.

준오는 아침 밥상이 차려지자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바람은 어제보다는 한풀 죽어있다. 검은색 고무 장화를 꺼내 신었다. 발가락과 뒤꿈치가 볼록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크기가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준오가 신고 온 단화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측백나무 울타리를 벗어나다가 준오는 힐끗 남순네 집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다시 집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득 궁금한 게 떠오른 탓이었다. 대청 마루 앞에 닿자마자 그는 노모를 불렀다. 노모가 부엌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준오는 이내 입을 떼었다.

"근데, 저 앞집 남순이는 어떻게 했대요?"

"뭘, 말이냐?"

자다가 웬 봉창 뜯는 소리냐는 듯 노모가 오히려 되물었다. 그도 그럴 만 했다. 아직 누구도 준오와 남순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며칠 전에 왔을 때 아기 유산해 가지고 죽었다면서…"

"어…그 남순이. 병원가다가 죽었는 모양이더라. 쯧쯧쯧. 어렸을 때부터 아부이 잃고 어무이 잃고 그렇코롬 고생허드니…."

노모의 말을 듣고 있는 준오의 가슴이 메어왔다.

"죽었는데 어떻게 했냐구요?"

"사람들 댕기는 행길에다 묻었겄지야. 듣기로는 요기 바닷가 나가는 길에다가 묻었다고 하는 것 같던디. 쯧쯧쯧. 불쌍한 것."

노모는 말끝에 왜 갑자기 그 얘기를 묻는가하고 준오에게 추궁하는 눈빛이었지만 준오는 이내 밖으로 나왔다.

솔숲 사이로 난 길. 이미 몇몇의 사람들이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드문드문 찍혀 있다. 준오의 키 두 배 만큼씩 거의 일정한 크기로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심은 지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다이아몬드 형 대열을 갖추고 줄지어 늘어선 소나무들은 저마다 하얀 눈을 모자처럼 눌러쓰고 있었다. 축 늘어진 가지는 준오가 언젠가 보았던 살풀이춤을 추던 여인네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하얀 옷을 입고 역시 그보다 하얀색의 천을 물결처럼 밤하늘에 아로새기던 여인네. 그리고 그 여인은 바로 곁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의 불꽃들만큼이나 정열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 나이의 준오의 눈에 비쳤던 그 장면이 지금도 이렇듯 선연하게 떠오르는 건 그때의 기억이 워낙 강하게 남아있는 때문이리라.

먹이를 찾는 까투리 소리가 들려왔다. 날짐승들이 푸드득 하고 날 때마다 소나무가지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 때문에 준오는 몇 번씩이나 멈춰서야 했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파도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갈매기가 망둥이라도 잡는지 힘겨운 소리를 꾸역꾸역 내뱉고 있다. 그리고 준오의 눈에, 무언가 분위기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게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얀색, 노란색 등이 도드라져 보이는 형형색색의 종이들이었는데 준오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몇 번 죽은 시체를 싣고 장지로 향하는 상여를 따라 간 적이 있는데 그 뒤에는 항상 이런 종이들이 남아 있곤 했던 것이다.

준오의 눈에 소나무 사이로 바닷가가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온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길 한가운데 채 눈이 덜 쌓인 곳이 띄였다. 바로 여기다. 봉분 조차 세우지 않은 남순이 묻힌 곳. 채 익지 않은 몸으로, 채 익지 않은 몸에 사랑을 안겨주고, 그렇게 떠나가 버린 소녀. 그녀는 영혼의 깊은 안식처에서 피어나지 못한 어린 생명만을 동무한 채 휘황한 바람을 온 몸으로 감싸안으며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준오의 손이 조심스럽게 쌓인 눈을 헤집었다.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간시럽게 날아와 쌓인 눈을 뜨겁게 녹인 다음 모래 틈으로 스며들었다. 이 눈물이 남순의 그 차가운 육신에 가 닿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환희에 들뜬 그 육신을 깨우고 그 뜨거운 입김을 다시 한번 내뱉게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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