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

 

새벽길 도로에 나자빠진 너구리 한 마리를 얼핏 보았다. 처음부터 그것이 너구리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너구리는커녕 살아서 뛰어다니던 동물이 더 이상은 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조차도 인식을 못했다. 처음 발견한 순간에는 뭐랄까, 라이트에 얼핏 비친 그것은 그냥 하나의 물체일 뿐이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연상케 하는, 봉지 안에 뭔가 담겨진 것처럼 빵빵해 보이는 그 물체를 발견한 순간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나는 아마 펄떡 뛰는 자동차의 충격에 한동안 의식을 잃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핸들을 약간만 꺾으면서 그냥 지나쳐 갈 정도의 침착성은 내게 있었던가 보았다.

 

▲ 도로에 나자빠진 너구리

 

지나치는 순간 어떤 감이 왔다. 그리고 알았다. 동물이라는 것을, 동물 중에서도 다리와 목이 짧고 체격은 단단한 너구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아마 일 초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일 초, 그야말로 한순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자동차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너구리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었다. 되돌아가서 무엇이든 어떻게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지만, 무시하고 그냥 달렸다.

그날의 우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 나자빠진 너구리의 시체를 내가 내 손으로 치우기만 했더라도 우울은 어쩌면 나를 점령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무슨 영광스런 일이라도 한다고, 골프장 출근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골프장에 도착해서 손에 목장갑을 끼고, 카트를 타고 어둠 속을 천천히 전진하고 있을 때만 해도 우울은 아직 나를 점령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만 뭔가 그, 고기를 먹고 이쑤시개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그것 같은 살짝 어수선한 기분으로 좌우를 살피고나 있었을 뿐이었다.

목적한 그린에 도착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구멍을 찾는다고 어둠 속을 왔다갔다 하기를 얼마나 했던가. 마침내 그것은 내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우울한 몽상’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절로 생각났다. 그런 기분으로 그냥 그렇게 그런 계통의 음악이나 하루 종일 듣고 싶다는 기분이었지만, 못나게도 나는 결단을 못 내리고 골프장 그린에 뚫린 구멍이나 열심히 메우는 용역으로서의 임무만 붙잡고 있었다.

 

▲ 밖으로 나온 땅강아지

 

그날따라 구멍은 많기도 했다. 전날 아침에 비가 약간 내린 탓에 떨어지는 공마다 구멍을 뻥뻥 뚫어버렸다. 구멍의 크기는 또 얼마나 큰가. 빗속에서는 자동차의 제동거리가 길어지듯이, 골프공도 비가 내린 직후거나 빗속에서는 공이 한 자리에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떨어지면서 미끄러지는 탓에 구멍은 공보다 훨씬 커져버린다. 그래서 잔디수선사의 일은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 스무 배로 증가한다. 공이 예쁘게 툭, 떨어진 뒤에 굴러간 자리는 십여 초 남짓한 동안에 뚝딱 해치울 수 있지만, 공이 떨어지는 순간 미끄러지면서 멈춘 구멍은 하나를 수리하는 데만 적어도 삼십여 초 이상 일 분 가까운 노력을 요구한다.

그런 날은 지렁이도 많이 나온다. 땅강아지도 있다. 풍뎅이 애벌레 또한 뭐가 그리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인지 땅을 밀고 밖으로 나와서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닌다. 그렇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다만 헤매고 다닐 뿐이다. 뭔가 나름의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린 속의 어떤 환경이 그들을 못 견디게 해서 밖으로의 탈출을 감행하게 했다는 얘기이다.

평소에도 새벽이면 지렁이와 땅강아지 등의 생물이 밖으로 나와서 불불불 기어 다니기는 하지만, 비가 내린 뒤의 새벽에는 그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날마다 뿌려주는 골프장 특유의 각종 농약 성분이 새벽 시간대의 풍족한 수분과 섞였을 때 어떤 독성을 뿜어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와서 헤매는 지렁이와 땅강아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뭔가가 그렇게도 기막혀 보일 수가 없다.

딱히 목적한 바가 있어서 정든 둥지를 뛰쳐나온 게 아니고 보니 갈 곳이 있을 까닭 또한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 게다가 골프장의 그린은 지렁이와 땅강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넓고도 넓어서 아마 끝이 안 보일 것이다. 카펫처럼 깔깔하게 매끄러운 넓고도 넓은 그린 위에 지렁이와 땅강아지 등 각종 생물들은 그렇게 헤매고, 또 헤매다가 마침내 태양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 천천히 시체가 되어간다.

 

▲ 어느 하루 골프장의 피뢰침

 

피부의 수분이 증발되면서 더 이상은 헤매기조차 못하게 되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발작을 한다. 꿈틀, 꿈틀, 꿈틀거림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을 그렇게 꿈틀거리는 방식으로 아직도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면서 죽어간다. 그나마 운이 좋은 녀석은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까치의 밥이 되기도 하지만, 운이 없는 녀석은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꿈틀, 꿈틀을 계속해야만 한다.

골프장에는 새가 많다. 새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까치들이다. 까치는 밭에 심어놓은 땅콩 한 알도 정확히 콕 찍어낼 정도로 먹이를 탐지해내는 감각이 뛰어나다. 그런데 골프장에서는 그런 간단한 수고조차도 필요가 없다. 아무 할 일도 없이 밖으로 나와서 헤매는 지렁이와 땅강아지와 풍뎅이 애벌레들만으로도 까치는 매일 아침이 행복하다.

“에이 씨-이.”

어느 순간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온다. 간단하고 명쾌하게 한 마디 툭 나온 것이 아니었다. ‘씨’에서 ‘이’까지의 시간이 적어도 이삼 초는 걸렸다 싶을 정도로 길게 씨-이, 하는 소리가 마치 정선아리랑 류의 노랫가락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 자신이 그 소리를 의식하고도 있었다.

 

▲ 밖으로 나온 풍뎅이 애벌레

 

그놈의 너구리 때문이었다. 일하는 내내 너구리의 나자빠진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까닭에 내 마음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고창에 처음 왔을 때의 어느 하루가 문득 생각났다. 찻집을 하는 후배가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기 어렵다고, 집 보는 일이라도 며칠 해달라는 얘기를 해서 찻집을 나가던 그 즈음의 어느 하루 오전 아홉 시쯤이었다.

주차장으로 흰색의 깨끗한 자동차 한 대가 들어서더니 젊은 처자 두 명이 내렸다. 경험으로 볼 때 젊은 처자 두 명이 찻집에 마주앉아 수다를 떨 만한 시간은 아직 아니었다. 도시의 찻집이라면 물론 가을날의 오전 아홉 시 무렵에 그런 그림도 더러 있을 수 있겠지만, 시골의 가을날 오전 아홉 시란 뭐랄까, 한가함이란 이름의 문이 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게다가 이 처자들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행동거지를 보이고 있었다.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 반가워서 금방 얼싸안기라도 할 것처럼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는 스물한 두 살쯤의 그녀들은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보니 놀랍게도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창백하다고 할까, 아니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얼굴 어딘가를 콕 찔러도 눈 하나 끔벅이지 않을 것 같은, 못할 것 같은 극도의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저기, 화장실 좀.”

그로부터 삼십여 분 뒤에 나는 사태의 전말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고 동창이었고, 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두 사람 다 대학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 즈음 한창 유행을 타기 시작한 바리에스타가 두 사람의 꿈이었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대학을 보내고 싶어 한다.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부모님을 설득했고, 그리하여 부모님으로부터 대학 등록금에 준하는 돈을 타내서 커피 전문점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 아주 간편하게 식사중인 까치

 

그런데 스물한 살 처자 둘이서 온갖 손님들을 상대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당연히 고려했어야 할 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채 일만 벌여놓은 두 사람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무엇보다 골목 깡패로 짐작되는 손님들로부터 당해야 하는 성희롱과 언어폭력의 무게를 그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루 일을 끝내고 나면 밤새 얼굴을 마주하고 한숨이나 폭폭 내쉬기를 며칠이나 했던가, 마침내 어느 하루 새벽에 그들은 떠나자, 그냥 떠나버리자, 하고 길을 나섰던가 보았다.

그 일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일어났다. 라이트에 뭔가 희끗 비쳤다 싶은 순간 앞 범퍼에서 쿵 소리가 났고,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공포에 사로잡힌 운전자는 가속기를 밟았다.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실수로 가속기를 밟은 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가속기를 밟았다. 왜? 무서웠으니까.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뒤로 얼마인지 알 수도 없는 시간 동안을 그냥 달리기만 했다는 것이다. 오직 앞만 보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어느 순간 범퍼에 부딪혔던 그 무엇인가가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의 새로운 공포가 일어났고, 그래서 얼른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서 국도건 지방도로건 그냥 무조건 닥치는 대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순간 극심한 요의를 느꼈다. 한 사람이 문득 헛소리처럼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고, 그 소리를 들은 다른 한 사람도 역시 화장실이 급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때는 이미 해가 떠올라서 좌우사방이 훤하게 뻥뻥 뚫려 있었기 때문에, 여기인가 저기인가, 하는 심사로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찻집을 발견하고는 아, 저것이다 싶어서 들어오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게 뭐였을까요? 아마 커다란 멧돼지였을 거예요. 그죠?”

“아니야, 고라니였을 거야.”

“무슨 소리야. 운전을 내가 했는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 자기 자신의 느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나는 한심하게도 간단한 통계나 인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자동차에 치여 죽는 야생동물이 일 년에 육백여 만 마리라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개체수는 아마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그런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해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이야기가 놀랍고, 신기하고, 그래서 자신들의 죄(?)가 면죄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 골프장에서 보는 일몰

 

“어머, 그래요? 정말로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내 입을 쳐다보는 그녀들을 보면서 나는 흡사 나 자신이 그 무슨 신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간단한 말 한 마디가 공포에 빠진 사람들의 공포를 제거하고 느닷없는 희망을 심어줄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새삼스런 생각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새로운 걱정이, 근심이 그들의 눈빛을 점차 흐리게 하고 있었다.

그들을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이제 야생동물을 치였다는 그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차에 치여서 죽은 그 야생동물이 뒤에 오는 다른 차량들에 의해서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거듭해서 죽을 수 있다는 새로운 자각이 그들을 못 견디게 하고 있었다. 야생동물을 치인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해도, 차에 치여서 죽은 그 녀석을 어떤 방식으로든 치우지 않고 방치한 것은 그녀들 자신의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보니, 문득 길이 보인다는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를 우울에 빠트려놓은 그것의 정체를 명확하게 인식했다고나 할까. 그래, 그런 어떤 것이 있었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야생동물의 사체를 보고서도 외면했다는 것, 길게 잡아서 일 분만 투자하면 사체를 어떻게든 치울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안 했다는 것, 오래 전 그날의 그녀들은 자동차가 잇달아 쌩쌩 달려오는 고속도로 위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는 새벽 시간대의 지방도로 위에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는 자의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못 살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아직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놀랍게도 새벽에 봤던 그 너구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그 누구의 자동차도 너무나 깨끗한 형태의 너구리 사체를 타고 넘지는 못하고 속도를 줄이면서 피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로채가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느껴져서, 죽은 너구리를 두 번, 세 번, 거듭 죽이지 않고 피해가는 운전자들이 나는 그렇게도 고맙고, 그렇게도 대단해 보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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