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벌초, 그리고 거짓말, 그 어처구니없음에 관하여

 

 

금년에도 어김없이 벌초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도 끔찍하게나 무더웠던 여름이, 간다, 간다, 하면서도 안 가고 마치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투로 버티던 땀내음이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새벽 잠자리에서 어렴풋이나마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만 하나의 막연한 느낌이었을 뿐, 여름의 끝장을 의미하는 벌초와 연관돼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금년에는 여름이 하도 지악스러워서 가을 같은 것은 아예 없어져 버린 줄 알았다. 가을이 없어졌으니 추석도 없어졌고, 벌초 또한 없어졌다는 생각까지야 차마 해보지는 않았다 해도, 가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벌초와 추석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온갖 서정에 빠져드는 행복한 시간을 상대적으로 늦게, 그리고 적게 가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 벌초 하러 가는 길

 

벌초, 납골 문화가 정착되면서 인연을 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끊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벌초는 마치 머리손질과도 같은 청결함과 아울러 계절의 순환을 즉각적으로 일깨워준다. 도시에 살면서 고향으로 벌초를 떠나는 사람들이야 두 말이 필요 없는 여행, 그것도 가을맞이 여행이라서 가슴이 살랑 부풀어 오르는 발걸음이 되거니와, 시골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벌초는 한동안 뜸했던, 또는 잊고 있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약속해주는 연례행사이고 보니 가슴이 자연 설레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벌초는 다만 여름이 끝났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서적으로 벌초는 일 년을 보내고 새로운 일 년을 맞이하는 준비작업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 해가 끝나간다는 것은 두렵고 심난하지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어쨌든 희망에 가깝다. 그러니까 벌초는 새로 맞이해야 할 일 년이 금년보다는 깔끔하고 산뜻해지기를 바라는 일종의 길닦음 행사인 셈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벌초라고 해서 다 같은 벌초는 아니다. 벌초에도 사회학에서 말하는 빈부의 차이는 있다. 선산이 있는 집안의 벌초는 대체로 반경 오백여 미터 이내의 한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선산이 없는 집안의 벌초는 무덤이 여기에 한 기 저기에 한 기, 하는 식으로 흩어져있는 까닭에 다리품도 많이 팔아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우리 집안은 조부님이 진사시에 입격한 유학자이면서도 호시탐탐 불교와 도교를 넘보는 이른바 공무(空無)의 삶을 선택한 까닭이었는지 어째서였는지 선산은커녕 변변한 땅뙈기 하나 축재할 틈을 못 내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고, 명색이 장남인 나 또한 남들은 불혹이라는 나이에 소설 공부를 한답시고 헛소리나 지껄이기 시작한 이후 줄곧 그런 생활이니 조상의 산소를 한 자리에 이장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 벌초는 이렇게 진행되고

 

게다가 나는 장남이면서 장손이기까지 했다. 조부님은 물론이고 증조부, 고조부, 거기에 더해서 외할머니 묘소까지 관장해야 할 책무가 내게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묘소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은 장손이요 장남인 내가 아니라 셋째 아우였다. 장손이요 장남인 나는 기껏해야 보조에 보조 역할이나 겨우 해왔을 따름이었다. 진짜 보조는 막내 아우였다.

어쨌든 금년의 벌초 작업 또한 셋째와 막내의 근무 일정에 따라 날짜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셋째 아우가 예초기에 시동을 걸어서 막 휘두르는 참인데 내 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울렸다.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육 년인가, 칠 년인가, 하여튼 정서적으로는 매우 친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메일과 전화, 그리고 문자질을 통해 서로의 근황과 생각을 잠깐씩 나눠온 횟수는 그야말로 수도 없이 많지만,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신기하리만치 한 번도 없었다.

얼굴 생김은 모르지만 반가운 목소리였다.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지금 고창에 와 있단다. 그도 역시 벌초를 목적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전날 밤 늦게 도착해서 하룻밤 보냈는데 벌초를 마친 뒤에는 상하 구시포에서 낚시를 즐기며 하룻밤을 더 보내고 상경할 예정이라고, 요컨대 시간이 넉넉하니 서로간에 얼굴이라도 한 번 구경할 만한 기회이지 않느냐 하는 얘기였다.

“아 그럼요, 그럼요, 봐요죠, 봐야고 말고요.”

너무도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은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만나서 소주 한 잔 나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낙낙한 심사로 하늘을 한 번 보는 순간 아뿔사, 이런 큰일났네,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 고인돌공원 견학용카트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만날 약속이 돼 있었다. 그도 역시 벌초를 하러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벌초가 끝나면 만나서 소주 한 잔을 하자고, 단둘이서도 아니고 주변 곳곳에 산재한 여러 옛 친구들에게 전화통문을 돌려서 만나기로 이미 사흘 전에 약속이 돼 있었다. 전화기를 가능한 한 멀리하고자 해서 툭하면 방이건 어디건 두고 다니는 내가 그날따라 전화기를 주머니에 착실하게 넣어온 까닭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지? 한 자리에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한쪽은 초등학교 동창들이고, 다른 한쪽은 얼굴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해 온, 그야말로 미지의 인물이었다. 내 마음에 갈등이 자못 심각했지만, 차츰 풀려 나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이야 뭐 반갑지만 이미 아는 얼굴들이고, 미지의 인물은 반가우면서도 얼굴을 모르니 순위에 있어 우선권을 갖는 게 마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는 그것이었다. 무슨 말로 초등학교 동창들을 설득할 것인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얼굴 아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취소한다고 하면 아마 잡아먹겠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선뜻 전화도 못하고 밍기적거리고 있는데 시간은 잘도 흐르고 벌초 작업 또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촉 전화가 왔다.

“야, 뭐 해. 아직도 안 끝났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신기하게도 빠져나갈 구멍 하나가 보였다. 자, 이제 어떡할래? 거짓말이 필요한 지점에 딱 도착해 버렸지 않으냐? 너희들을 만나려 했는데 꼭 만나야 할 다른 사람이 생겨 버려서 너희들은 못 만나겠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말이다. 그리하여 거짓말 하나를 개발해 냈는데 그것이 꼭 이런 것이었다.

 

▲ 구시포의 하늘

 

“아이 참 우리 벌초가 오늘 있지? 겁나게 늦어지네∼에.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일찍 시작했나벼. 다른 사람들이 아직 벌초를 안 한 탓에 죄다 길을 내야만 혀. 이백 미터 삼백 미터씩 길을 내고 들어가서 벌초를 해야 하니 이놈의 것이 산소 하나에 한 시간도 더 걸려버리는 거지 뭐여.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산소가 일곱인디 아직 세 개밖에 못했당게.”

“염병하네.”

바로 이 소리, 이 소리가 내가 기대하던 반응이었다. 이런 소리가 아니면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거나, 최악의 경우 벌초를 돕겠다고 쫓아올 개연성마저 있었다. 그것을 아는 까닭으로 나는 가능한 한 한심할 정도로 축 처진 목소리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즉석에서 고안해낸 이 전략은, 아니 잔머리는 멋지게 성공했다. 친구 녀석들은 이제 나를 포기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벌초를 완전히 끝낸 시간은 오후 세 시. 그래도 마음은 급하다. 배도 고프다. 잰걸음으로 산을 내려와서 고인돌 안내소 앞을 지나가는데 누가 부른다. 누구냐? 내게는 조카뻘 되는 사람이다. 작년에 만나고 금년에 또 만났으니 딱 일 년만이다. 커피라도 한 잔 들고 가시라고, 깍듯하게 조카 행세를 하는데 그것 참, 그냥 싹 돌아서서 와버릴 수가 있나. 각자 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날씨가 쓸데없이 너무 좋다는 둥, 고인돌 견학 나온 학생들이 많다는 둥, 한두 마디씩 하고 나니 금방 삼십여 분이 흘렀다.

이제 됐다. 차려야 할 예의는 다 차렸다. 했는데 아니다. 제수씨가 밥을 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생들 또한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한숨 돌렸다가 새우구이로 소주를 마시자는 것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형제들끼리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여본 지도 꽤나 됐다. 오랜만에 코가 비뚤어지도록 한 번 마셔보는 것도 좋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그래, 그것도 좋다. 하지만 나는, 오늘은 이쯤에서 퇴장해야 한다.

“아이 참 형님, 이제 곧 새우가 도착한다니까요.”

 

▲ 구시포항

 

막내가 막내 특유의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압박을 가해온다. 제수씨의 눈빛도 호소력이 진하다. 신안 앞바다 양식장에서 막 건져 올린 새우를 싣고 자동차가 지금 달려오고 있는 중인데 무슨 그런 어이없는 반역의 말씀이냐는 투다. 무슨 말로 설득을 하지? 이런 때는 그냥, 우격다짐이 제일이다. 아니야 난 가야 해. 안 가면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러면 아주버님, 그분들 오시라 해서 함께 하면 안 될까요?”

제수씨의 마지막 한 마디, 내 마음이 살짝 흔들리기는 했지만, 역시 아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찌 차마 우리 가족들과 함께 하자는 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대신 새우나 좀 가져갈게요.”

내가 생각해도 조금 뻔뻔했다. 그 와중에 새우를 가져갈 생각을 했다니. 어쨌든 제수씨가 플라스틱 통에 담아주는, 너무 심하게 펄쩍펄쩍 뛰어대는 탓에 기절을 시켰다고 하는 새우를 들고 형제들과 헤어졌다. 이제 자유다. 정말로 자유다. 전화를 해야지. 그렇게 해서 만나기로 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뭐지? 이 또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바로 나왔다. 구시포에서 낚시를 한다고 했으니, 전화기 따위는 자동차에 두고 방파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동차를 몰아서 구시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그런데 이게 뭐냐.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한가해 보이던 구시포 해수욕장 근처가 온통 자동차들로 꽉 차버렸다. 무슨 느닷없는 중고 자동차 시장이라도 열린 것만 같다. 그 많은 차량들이 필경 벌초를 끝내고 횟감이나 좀 건지자고 나온 것일 게다.

여기냐 저기냐,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겨우 어떻게 자리를 잡아서 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왔지만 막막하다. 서울 남대문에서 정서방 찾는다는 꼭 그런 짝이다. 얼굴은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은 알아서 정서륭씨, 하고 불러보고자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보니 아이고 이런, 바닷바람이 심해서 내 목소리 따위는 모기 소리밖에 안 될 것 같다. 게다가 구시포는, 새로 항구를 조성하는 중인 까닭에 어수선하고 넓기는 또 끝이 안 보일 정도이다.

 

▲ 구시포의 일몰

 

다시 전화기를 꺼내들고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안 받는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다니면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장난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와서 낚시를 하거나 술을 마신다.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정서륭씨 아닙니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 저기에, 엉덩이를 놓을 수만 있다면 아무 데나 멋대로들 끼여 있다. 어디를 어떻게 돌아야 한단 말인가.

한참을 돌다가 다시 또 전화를 해보고, 역시 안 받아서 문자까지 넣었지만 감감무소식에 변화는 없다. 그 사이에 해는 지고, 노을마저도 바닷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것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맴돈다. 에이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고는 무슨. 그렇다면 뭐지? 아하, 오랜만에 맛보는 바닷바람이 너무 상큼해서, 그래서 초장에 그냥 취해 버렸을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한다. 오늘 술자리는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으니 전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전혀 다른 술자리를 새로이 창조해볼까? 그리하여 막 자동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려 하는 참인데 전화기가 요동을 친다.

“아이고, 전화를 여러 번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그 사람이다. 구시포에서 만나기로 했던, 얼굴도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해 온 바로 그 사람이, 포기하고 그냥 가려고 하는 딱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바로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이고,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손에 전화기를 든 채 자동차에서 내린다.

이게 뭐냐. 정말로 이게 뭐냐. 조금 전에 본 사람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최소한 두 번은 지나가면서 보았던 그 사람, 그 남자가 나를 보며 싱글싱글한 얼굴로 다가온다. 업은 애기 삼 년 찾는다더니 꼭 그짝이다. 이런, 이런.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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