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좁았다. 셋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 열어놓은 은색 샷시의 현관미닫이 문 사이로 청명한 하늘대신, 복잡한 도회지의 불빛으로 색이 바랜, 노랗고 거뭇거뭇한 그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밤에 바라보는 하늘은 역시 별게 아니었다. 그 속엔 우주라는 존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기엔 하늘은 너무 좁아 보였다. 그리고 너무 어두웠다. 그저 빌딩 숲과 가로등에서 반사되는 불빛들만을 간신히 담아내고 있을 뿐. 저런데서 사는 신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동안 경훈은 부랑아가 싸온 라면을 저녁 삼아 끓였고 그걸 안주로 해 방금 약효가 한층 떨어진 본드를 대신해 소주 몇 잔을 걸쳤을 뿐이다. 그리곤 소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마당과 방을 오락가락하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본드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술을 마신 탓인지 정신이 더욱 혼란스러웠지만 별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기가 온 몸을 전율케 하는 남산의 벤치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부랑아가 건네는 주둥이가 깨진 머그컵을 받아들었고 부랑아가 따라주는 대로 그저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켰을 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그리고 방 한쪽 구석과 마당에 나란히 놓여있는 꽤 많은 수의 소주병들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소녀는 부랑아에게도 함부로 말을 했다. 부랑아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무슨 관계인지가 궁금했지만 경훈은 굳이 묻는 걸 포기했다. 오빠나 동생 사이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애인관계?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소녀는 라면을 먹는 중에도, 부랑아가 따라주는 소주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중에도,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계속해서 까딱거리는 게 전부였다. 라면을 끓이는 일도, 상을 차리는 일도 그릇을 내오다가 깨뜨리는 일도 모두 부랑아의 몫이었다. 신기한 점은, 부랑아는 그런데도 소녀에게 단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경훈의 잔이 비었는지 다시 부랑아가 소주병을 들었다. 그리고 경훈에게 잔을 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미 정신은 아득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경훈은 따라주는 소주를 받았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무슨 말인가를 기대했지만 부랑아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주잔을 들었고, 입에 갖다댔고, 마셨다. 그리고 이제 라면가락 조차 남지 않은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시는 게 전부였다. 경훈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소주 반병은 족히 들어가는 머그 컵을 도대체 몇 번째 들었다놓았는지를 기억해보려 한 게 노력의 전부였다.

소녀는 안방과 현관문 사이에 길다랗게 붙어있는 공간을 활용한 부엌 한켠에 임시 칸막이로 붙어있는 화장실 겸 샤워실을 두 세번 들락거렸다. 그리고 경훈과 부랑아에게는 조금도 신경을 쏟지 않았다. 그저 경훈 만이 힐끔힐끔 소녀를 훔쳐보았을 뿐. 화장실의 물 내리는 소리가 묘하게 경훈의 신경을 건드렸다. 술기운 탓인지 깊은 곳으로부터 불기둥 같은 것이 치밀더니 이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 부랑아는 경훈의 그런 변화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나오는 소녀가 경훈을 힐끗 보았다. 발그레해진 얼굴을 발견했는지, 헬쭉하고 입술이 올라갔다. 입술엔 이름 모를 비스킷 조각이 물려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있었다. 반쯤 누운 채로 소주잔을 기울이던 부랑아는 소주 한 병을 새로 따더니 아예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방안은 후덥지근했다. 낮동안 지붕과 마당에 축적된 복사열이 밤이 되어서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밖도 그리 시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람이 불어 한결 나았다. 경훈은 갑자기 머쓱해져서 부랑아의 뒤를 좇았다.

역기의 앉은뱅이 의자를 부랑아가 차지한 탓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마당에 뒹굴고 있는 신문지를 주워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몇 잔의 술을 더 마셨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그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빠아앙,하는 자동차들의 클락션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문득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몸에 무언가 부드러운 게 와닿은 느낌. 경훈은 눈을 감은 채로 여기가 어딘가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리곤 이내 어젯밤 신문을 깔고 누웠던 마당이 떠올랐다. 눈을 뜨려고 했다. 술 때문인지 눈가에 잔뜩 쌓여있는 잔해가 경훈의 행위를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그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경훈이 누워있는 곳은 마당이 아니었다. 그는 방안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소녀가 분홍색 티셔츠를 반쯤은 위로 올린 채 누워있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바로 다음이었다. 바로 자신의 손이 반쯤 올라간 소녀의 옷사이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 느꼈던 부드러움의 원인. 결코 작지만은 않은 소녀의 가슴. 경훈은 화들짝 놀라 잽싸게 손을 빼냈다. 손끝이 얼얼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부랑아.' 잠시 망각했던 그의 존재가 갑자기 떠올랐다. 방안을 둘러보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녀와 경훈, 둘 뿐이었던 것이다.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부랑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언제 여길 들어온 것이지? '

그런데 그 순간 아주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자는 줄 알았던 소녀의 손이 경훈의 손에 와 닿은 것이다. 경훈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미미 인형처럼, 하얀 소녀의 얼굴 한 가운데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소녀의 눈이 경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소녀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어렸다. 밖에서 비치는 불빛이 원인이었다. 소녀는 그런 상태로 경훈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가슴의 한가운데 돌기가 솟아있는 부분에 이르더니 자신의 손을 빼냈다. 어떻게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던 경훈. 하지만 이미 그는 몇 번의 여자 경험을 한 상태였다. 아래로부터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내 자신의 손길이 뜨겁게 움직이는 걸 느껴야 했다. 소녀의 입에서 단말마와도 같은 콧소리가 흘러 나왔다. 뜨거운 여자. 경훈은 서둘러 소녀의 윗옷과 이미 끈이 풀려진 브래지어, 그리고 짧은 핫팬츠, 마지막 가리개까지를 벗겨냈다. 동작이 거칠어질수록 반응 역시 격렬했다. 신음소리는 자동차 경적소리를 어둠 속으로 묻어버렸다. 경훈은 언뜻 언뜻 출입문 쪽을 쳐다보며 부랑아의 존재에 대해 의식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 잊어버렸다. 소녀의 몸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경훈의 몸 구석구석의 세포가 팽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준오의 아랫도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처음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해야만 했던 경훈은 이내 소녀의 몸이 떨어져 나간 걸 발견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은 주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손이 다시 경훈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훈은 엉겁결에 소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갔다. 둘 다 완벽한 알몸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부랑아가 앉아있던 역기의자. 남산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커먼 실루엣 뒤로 불빛이 번지고 있다. 타워에선 아직도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소녀의 입술이 경훈의 시야를 방해했다. 소녀의 혀가 마녀의 그것처럼 경훈의 얼굴을 탐닉하고 있었다. 다소 싸늘한 밤공기에 돌기가 돋아있던 경훈의 피부가 다시 이완되고 있었다. 갈라진 뱀의 싸늘한 그것이 경훈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새로운 동반자를 만난 그것은 오묘한 향기를 내뿜으며 구석구석을 휘감아 돌았다. 이번엔 경훈이 신음소리를 내야 했다. 희뿌연 하늘. 저기에 달이라도 있으면…. 소녀가 좁디 좁은 의자위로 몸을 제꼈고 이내 다시 경훈의 몸이 소녀의 가운데를 공격해 들어갔다. 소녀 대신 역기 의자가 소리를 질러댔다. 동작이 격렬해지면서 소리도 커져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엉덩이를 세차게 쥐어뜯는 소녀의 손길을 느끼며 경훈은 요동치는 자신의 온 몸을 소녀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완전한 일체가 되는 순간. 발가벗은 아담과 이브가 그랬을까. 신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산이 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다. 경훈의 바로 뒤쪽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역시 아까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때에야 경훈도 그 존재에 대해 인지했다. 화들짝 몸을 돌렸다. 철제계단이 끝나는 그곳, 사람이었다. 한발을 마당 안으로 들여놓은 채 돌처럼 서있는 사내. 부랑아. 경훈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순간 부랑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녀의 태도였다. 그녀는 덤덤했다. 그저 무표정하게 부랑아를 쳐다보았을 뿐이고 그 외에 어떤 다른 기색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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