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창의 숨은 인물 표명섭

 

자기가 살아온 내력을 책으로 쓴다면 열권도 넘을 것이란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인생사 자체가 파란만장이고 보면 그런 이야기는 매우 자연스럽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이런 말이 사람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시큰둥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경우에는 아 정말 그렇겠구나, 하고 온 몸으로 마치 따뜻한 물처럼 적셔들어 오기도 한다.

 

▲ 초심자를 지도하는 표명섭 씨

 

엄혹했던 시절 팔십 년대 초에 개정을 한 고창의 활터 초파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해줄 만하다. 수확이 끝난 뒤의 논바닥에서 시작한 활터는 백사장으로 옮겨갔다가 과녁을 포함한 장비 일체를 바닷물에 잃어버리기도 했고, 고물장수에게 도둑을 맞기도 했으며, 바닷가 소나무 숲에 과녁을 세운 뒤로는 임대료를 못 내서 토지주인의 욕지거리 속에 쫓겨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고, 농사꾼 주제에 일은 안 하고 활이나 쏘러 다닌다는 주위의 비웃는 소리에 그만 어금니를 깨물며 눈물을 뿌린 횟수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농사꾼은 잠자는 시간만 빼고 온통 그저 땅이나 파야 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활 쏘는 낙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아마 자살을 했어도 열 번은 했을 것잉만.”

하긴 누군가는 그랬었다. 농부의 최대 희망은 자살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런데 활의 맛을 안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 것 따위를 희망으로 삼지는 않는다. 눈물이 아니고는 회고할 수 없는 초파정의 삼십 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어려운 시기에 총무 직함으로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서 처리해낸 햇수만도 십 년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초파정 역사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표명섭씨는 활과 인연을 맺은 동기부터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초심자에게 활의 기본을 가르치는 사범이기도 한 그가 연로한 부친과 단둘이서 일주일째 땅콩을 캔다는 얘기가 들렸다. 호기심이 확 당겼다. 그래서 위문공연 어쩌고 하는 농담을 구실로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땅콩은 보면 볼수록 특이한 식물이다. 꽃에서 수술이 아닌 더듬이가 나오는데 이 더듬이가 흙을 만나면 즉각 뿌리를 내린다. 그렇다고 그 뿌리가 정말로 뿌리인 것은 아니다. 뿌리처럼 흙속을 파고 들어가기는 하지만 흙속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 뿌리는 뿌리로서의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저 혼자 스스로 둥글게 살을 찌운다. 도톰하게 둥글어진 이 뿌리 같은 살덩어리가 점차 커지면서 이른바 땅콩이 완성되는 것이다.

 

▲ 땅콩을 털고 있는 표명섭 씨

 

표명섭씨가 일주일째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땅콩밭은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처음부터 땅콩밭인 것은 아니었다. 십수 년 전에는 사과밭이었고, 사과밭이기 전에는 복숭아밭이었다. 표명섭씨의 본격적인 파란만장은 바로 이 복숭아밭에서부터 시작된다.

농사가 저주받은 직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후 사람은 태어나서 철이 들면 거의 예외가 없이 서울로, 도시로 빠져나갔다. 표명섭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예외가 발생했다. 서울 생활 오 년차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아니 그것은 부름이라기보다 구조요청 성격이었다. 내용은 복숭아였다.

봄이면 복숭아 꽃잎이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그림 같은 삶을 아버지는 아마 어느 날 문득 그려보았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하는 일인데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복숭아꽃이 만발한 밭에서 호미질을 하며 땀을 흘리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하는 발상이 아버지의 오감을 정말로 자극했던 것인지 여부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밭에 몽땅 복숭아나무를 심어버렸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 가격이 무슨 껌값이 아니고 보면, 요새 흔히 하는 말로 그냥 질러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많은 것을 으찌케 네 어미하고 둘이서 해낼 수 있겠냐.”

이야기는 간단했다. 무릉도원의 기초를 닦아놓았으니 이제 함께 그것을 즐기자는 말씀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자식을 서울로 보내고자 노심초사하던 시절에 그의 부친은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아들을, 그것도 큰아들을 과수원이란 미끼를 던져서 불러 내린 셈이었다. 아들은 며칠 동안 고민의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결국 아버지가 던진 미끼를 물기로 한다.

그렇게 시작된 표명섭씨의 무릉도원은, 그것은 외로움과의 직접적인 대면의 시간들이었다.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시간은 길고도 멀었다. 하늘의 별들에게 굳이 길을 묻지 않더라도 길은 이미 환히 보이고 있었지만, 문제는 너무도 환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오늘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은 또 오늘과 같을 게 뻔한 날들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속에서 그의 가슴은 깊어져 갔다.

과일 농사건 쌀 농사건 농사는 어쨌든 고독을 뭉텅이로 끌어안고 다녀야 하는 직업이었다. 게다가 투자 대비 수익은 형편이 없어도 너무 없었고, 그마저도 들쭉날쭉이어서 도무지 계획이란 것을 세워볼 수가 없었다. 도시에서는 경쟁심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해도 최소한 사람 냄새는 있었다. 수입 또한 가계부를 쓸 수 있을 정도로는 예측이 가능했다.

 

▲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표명섭 씨의 부친

 

농촌의 살림살이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논이건 밭이건 일단 들판으로 나갔다 하면 그때부터 흐르는 땀방울이나 친구를 해줄 뿐 입안에서 단내가 풍겨도 말 한 마디 나눠볼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고생해서 거둬들인 수확이란 것은 날품팔이 일당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비일비재이고 보니 이게 그만 숨이 컥컥 막히고, 또 막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펑, 터져서 하늘의 별이라도 되어버릴 것만 같은 것이었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도시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 가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면서도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다는 것만큼 이상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쨌든 그는 이제 고민이 깊은 사람이 되어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 위험한 질문의 순간들 속에서 발견한 것이 활이었다.

그래, 그것이 있었다. 활. 활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표명섭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쭈그리고 앉아서 농사일을 할 때의 그는 가슴이 한없이 쪼그라들고, 또 쪼그라들어서 그만 납작한 빈대라도 돼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활을 잡고 시위를 당길 때의 그는 가슴이 한없이 넓어지고, 또 넓어져서 그만 날개라도 홀연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면서 내는 맑고도 투명한 소리는 또 어떤가. 그것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음악이었다.

음악소리는 우울한 고독으로 눅눅해진 그의 가슴을 씻어내 주었다. 가슴이 넓고 맑아진 그는 이제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처에서 나뒹구는 농약병과 농사용 폐비닐들이 그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산과 들과 흙 속을 드나들며 아름다웠던 경관을 흉물화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저것을 저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막아야 한다. 치워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혼자서는 안 된다. 운동이 필요하다.

 

▲ 찾아온 제자와 함께 땅콩밭에서...

 

그는 고민했고, 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직 환경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머릿속을 드나들기도 전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필요에 의해 환경운동을 시작한, 환경운동 1세대인 셈이었다. 운동은 환경에서 머물지 않고 확장되어 갔다. 농촌은 급격히 고독화 돼 가고 있었고, 위험 사회로 치닫고 있었다. 서너 명이 힘을 모아서 해도 어려운 일을 혼자서 한다고 낑낑대다 보니 일은 일대로 안 되면서 골병이 들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기도 했다.

넓은 세상 천지에 오직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무섭게 늘어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 이상으로 증가하는 고독에 사무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절 같은 때 선물이나 한 꾸러미 들이미는 게 아니었다. 김장김치나 연탄 몇 장 들여주고 함께 늘어서서 히죽이 웃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당신은 사람, 나 또한 사람, 사람끼리 힘차게 열심히 살아보자고 속삭여주는 진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진정성을 유행처럼 사방팔방으로 퍼뜨린다는 게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고 보니 함께 움직일 사람을 설득해서 모으는 것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표명섭씨 자신이 부모님과 아내와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어렵구나, 너무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일어날 때 그는 활터로 달려갔다.

사람이 손에 활을 잡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고독을 끄집어내놓고 응시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가슴이 너무 막막한 날에 쏘는 화살은 때로 구름 속으로 깊이 숨어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물론 아주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갔지? 잘못 쏘았나? 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노라면 나 여기 있지, 하는 듯이 과녁 앞에 툭 떨어진다. 그러면 그때 어느 순간 아, 내가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새로운 힘이 생긴다.

그가 활에 미친 듯이 매달리기 시작한 건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고 나서였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토록 애지중지 귀여워했던 누이동생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조카들도 함께 잃었다. 서기 2000년 1월, 새로운 세상 밀레니엄이 열렸다고 온 나라가, 아니 온 세계가 들떠서 돌아가던 무렵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듯이, 새로운 시대라고 해본들 기껏 숫자 몇 개를 달리 해서 부르는 것일 뿐인데도 뭔가 정말로 새로운 문이라도 열리는 것처럼 온 세상이 술렁거렸다.

방송이면 방송, 신문이면 신문, 사람이 접할 수 있는 모든 매체가 흥분해서 난리를 치는데 어쩔 것인가. 사람들은 평소처럼 하던 일이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초조감에 진저리를 쳤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새로운 것이 오고 있다는 설렘으로 앞을 다퉈 집을 나서야만 했다. 딱히 가볼 만한 곳이 있었던가? 모른다. 그리도 급하게 서둘러 가야 할 곳은 있었던가? 그 또한 모른다.

 

▲ 어느 하루 활터에서...

 

어쨌든 사람들은 어딘가로 달려갔고, 달려가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표명섭씨의 어머니와 누이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조카들이 있었다. 자동차는 그 이름도 아름다운 프라이드. 그랬다. 프라이드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수많은 프라이드 중에 한 대를 그날 트럭이 덮쳤다. 음주운전이었다. 그날 그 프라이드에 탔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미쳐버린다는 게, 아 이런 것이로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나 그는 미치지는 않았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함께 미쳐버리기에는 그는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하고 싶은 일 또한 많았다. 어머니와 누이와 조카들을 잃고 삼 년 정도를 패잔병처럼 어슬렁거리는 걸음을 걷기는 했지만, 그는 사람들의 점점 열악해져 가는 살림살이에 대한 관심을 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만약에 활이 없었다면, 그 무섭도록 고요하면서도 팔팔한 생기가 느껴지는 활이 없었다면 저도 아마 이것저것 다 귀찮아서 손을 놔버렸을 거예요.”

그 시기에 그는 전국의 유명한 궁도대회는 거의 모두 참석했다. 그렇게 새로이 내적 에너지를 확보한 그는 일단 농사의 방식부터 바꾸기로 했다. 과일은 아무래도 특용작물이고, 특용작물은 역시 특용작물이어서 거의 하루 종일 매달려 있어야 한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날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가 땅콩이나 양파, 기장 같은 전통 농법으로 전환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 하나가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다방 아가씨들 희롱하는 재주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했는데 당선되었다. 다음 선거에서도 당선되고, 또 다음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인구가 적은 농촌에서는 천오백 명 정도만 삼십여 만원 정도에 매수를 하면 당선된다는 공식(?)이 풍문의 형식으로 떠돌아다니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한 거예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거에 뛰어든다. 결과는 낙선이었고, 그는 이제 아내를 볼 면목이 너무나도 크게 없어져 버렸다. 아내가 이혼이라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가슴에 숨긴 채로 그는 온 종일 땅콩을 캐고,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 위해 활터로 나간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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