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34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34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5.10.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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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손님

경훈은 그가 꼭 14살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왔다. 전혀 기억에 없는 아버지 얼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겐 치매에 걸려 오락가락 하는 할머니와 벙어리 삼촌과 유일하게 모든 게 온전한 누이가 전부였다. 그게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그에게 일이 일어난 건 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겨울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라는 사람에게서 온 선물. 치매에 걸린 할머니조차 그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하려하지 않았던…. 그리고 어느 날인가 경훈은 그보다 세 살 위인, 하지만 그의 모든 걸 이끌어주다시피 한 누이, 남순에게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어머니의 선물이라고. 노란 봉투에 두툼하게 싸여있던 그것들은 겨울점퍼와 책가방, 그리고 귀마개, 털장갑 같은 것들이었다. 경훈은 마냥 좋았다. 나한테도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구나, 하는 생각은 뒷전이었다. 손이 따뜻했고 마음도 그랬다. 한기를 가시게 하는 그 점퍼와 장갑을 끼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으시댈 수 있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누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누이도 경훈과 같은 점퍼에(색깔은 달랐지만) 손장갑, 그리고 책가방을 받았지만 얼굴엔 따뜻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선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채로 시간이 흘렀다. 쌓였던 눈들이 녹고 있었다. 그나마 하얀 눈 덕분에 흉폐한 몰골을 가리고 그럭저럭 한겨울을 지냈던 집의 지붕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뚝뚝 떨어져 내린 물에 젖은 새점퍼를 따스하게 내리쬐어오는 햇살에 말리고 있을 때 싸립문 밖이 갑자기 환해졌다. 예쁜 봄꽃이 수놓아진 때이른 원피스에 하얀색의 뾰족구두를 신은 아리따운 봄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경훈의 눈에 그 손님은 경이였다.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화사함. 얼굴은 복사꽃 향으로 물들어 있고 몸 전체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경훈의 눈이 한껏 커져 있을 때 마침 부엌에 있던 누이가 무심코 얼굴을 내밀었다. 경훈이 힐끗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얼어붙은 눈. 싸립문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봄손님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다시 본 누이의 얼굴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남순아…"

대답 대신 꽝하고 부엌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봄손님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까의 화사함을 되찾았다. 봄손님은 경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반은 썩어 문드러진 나무로 된 마루 위에 빨간색 손가방을 내려놓더니 경훈의 손을 잡았다. 경훈은 영문을 모른 채 그저 봄손님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손길. 아까보다 훨씬 더 진한 향기가 경훈의 코를 찔러왔다.

"니가 경훈이 맞지?"

입을 여는 봄손님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경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컸구나. 정말…"

봄손님의 한손이 경훈의 머리를, 볼을 쓰다듬었다. 코끝이 간질간질해져 왔다. 향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거기엔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 가득 배어나왔다.

들판에선 아지랑이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겨울 좁은 닭장 안에 갇혀 세상 구경을 못하고 있던 닭들도 해방이 되었다는 듯 훼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누이는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내가…내가…너의 에미란다."

에미? 낯설은 단어. 경훈에겐 그랬다. 그처럼 따스한 얼굴로, 그처럼 따스한 목소리로, 그처럼 따스한 손길로, '에미'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여지껏 없었다.

하지만 맘에 와닿지는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아지랑이 마냥 경훈의 눈가를, 귓가를 그저 뱅뱅 맴돌 뿐.

삐그덕, 안방문이 열렸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한 겨울을 보내고 아직도 그 속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할머니였다.

"누가 왔냐?"

말 소리가 분명한 걸로 보아 지금은 제정신인 모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깜박깜박하는 의식. 경훈을 비롯 모든 식구들은 이제 거기에 완전히 익숙해있었다.

대답 대신 경훈이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보았고 다시 '바로 이 사람'이라고 얘기라도 하듯 봄손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의 눈이 잔뜩 찌푸려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환한 빛 때문이리라.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위에 반사된 눈빛은 방안에만 들어앉아 있던 노인네의 눈에는 사실 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햇빛 때문인지, 정확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가에 어렸다.

"이것이 누구여? 시상에…."

"……"

"지 팔자 고친다고 어린 새끼들 버리고 도망간 그 잡년 아녀?"

"……"

"시상에…"

"……"

"워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당가이…"

봄손님의 정체가 확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자식들 버리고 도망간 그 잡년.'

봄손님은 여전히 고개만 수그리고 있을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훈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화사하고 예쁜 사람에게 '잡년'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것도 자신의 '에미'가 아닌가. 기억에도 없고 사무치는 그리움 따위는 더더욱 거리가 먼 '에미'라는 단어였지만 갑자기 머리를, 가슴을 옥죄이는 이 원인 모를 감정은 무엇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귓가를 뱅뱅 돌던 그 두 음절이 이제는 가슴속에서, 머릿속에서 원을 그리며 온통 정신을 헤집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 나간 할망구의 그 쌍욕이 문제리라.

꽈당, 하고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각, 하는 소리를 내며 '에미'는 이미 반쯤은 낡아 헤어져 행여나 화사한 치맛자락에 부스러기라도 묻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경훈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청마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씨발….'

좀전 할머니의 쌍욕을 다시 떠올린 경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미가 다가와 경훈의 손을 잡았다.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인지 따뜻함이 손바닥 가득 전해져왔다. 생소했지만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기분이 나른해져왔다.

"잘도 커주었구나."

"……"

"이 에미 욕 많이 했지?"

완전한 서울 말씨였다. 경훈의 기분은 한껏 더 떠올랐다.

언제였던가. 방학 무렵이었을 것이다. 동네에선 유지로 소문난 박놀부네 집 손자들이 마을에 찾아왔다. 물론 서울 아이들이었다. 햇볕이라곤 구경도 하지 않은 듯 희멀건 얼굴에선 광채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경훈의 얼굴에 비친 더한 경이로움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서울 말씨였다. 설사 다소 거친 목소리를 지닌 남자 아이들 조차도 그것은 천상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다. 깨끗함, 정갈함, 뭔가 부티가 잘잘 흐르는….

경훈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그런 그의 시선을 의식, 어쩌다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올 량이면 그의 얼굴은 금새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리곤 뒤돌아 줄행랑을 치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촌…놈'이라고 자학했다. 그리고 '난 평생 저렇코롬 될 수는 없당게' 라고 되뇌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씨를 이 화사한(그 아이들에 비해 전혀 뒤질게 없는) '에미'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았다. 꽃향기 사이로 실주름이 보였다. 따뜻한 햇볕이 이름모를 꽃의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에 투영돼 실루엣을 만들고 있었다. 처마 밑으로 물방울 듣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에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뒤 경훈과 남순도 서울행 비둘기호 완행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비극은 싹트기 시작했다.

강간….

살인….

그리고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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