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오리 도둑

 

십삼 일 동안 오리 세 마리를 다 잃었다. 2년 이상 3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녀석들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낯설어서 호기심과 경계심이 어지럽게 발동되는 다소 힘든 날들이었지만, 한 달이 채 안 돼서부터 오리들과 나는 서로를 읽고 있었다. 나는 새끼 오리가 어떤 소리를 내면 배가 고프다는 신호인지 알게 되었고, 오리들은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평소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나를 마중해주었다. 그런 오리들이 죄다 사라졌다. 내가 잡아먹은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오리가 낳아주는 알을 고맙게 받아먹어 왔을 뿐이다.

요즘은 닭이나 오리 같은 동물들은 태어나서 일 년을 살아남기가 어렵다. 계란을 목적으로 사육당하는 닭의 수명이 제법 길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이삼 년이 한계 연령이다. 오리 로스나 오리주물럭은 육 개월 이내에 잡아야 육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계백숙 또한 일 년을 넘어서는 안 되며, 삼계탕용 병아리는 아예 한 달도 살아보지 못하고 털이 뽑혀서 펄펄 끓는 물에 뼈까지 아삭아삭 씹히게 익어져야 할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

 

▲ 오리가 아직 아이였을 때

 

그에 비하면 나를 만난 오리들은 겁나게 장수했다고 말해볼 수 있겠다. 무려 3년 가까운 세월을 씩씩하게 꽥꽥, 오리 소리를 내며 살아 있었으니, 이 얼마나 굉장한 장수인가 말이다. 일 년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서 오리를 3년 가까이나 살게 해준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오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확실히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혹시 신(神) 같은 것은 아닐까?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오리를 잃어버리고 나서 며칠이나 지난 뒤의 어느 우울한 아침이었던가, 저녁이었던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오리의 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차마 신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최소한 절대적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는, 그런 한갓진 생각이나 하면서 오리를 잃어버린 자의 슬픔과 분노와 쓰라림 같은 것을 달래고자 했지만, 들끓어대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번에는 더욱 난감한 피식피식, 하는 투의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시골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철 따라 다른 꽃이 피고 다른 새소리가 들리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들판에 누워 어쩌고 저쩌고 한다는 관념이 차마 한갓진 망상까지는 아니라 해도,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먹어치우고 큰 것이 작은 것을 식량으로 삼는, 약육강식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세상을 그나마 씩씩하게 살고자 한다면 특별한 훈련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생각 정도는 늘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그런 각오니 생각 따위들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막상 일을 당하고 나면 그저 눈앞이 캄캄해서 아득하기만 한데 말이다.

 

▲ 오리 삼총사

 

어떤 날은 하루에 한 개를, 다른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를, 요컨대 매일 한두 개씩의 알을 낳아주던 오리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꽤나 복잡한 상상과 추론이 필요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꽥꽥 소리를 내던 오리가 머리만 남고 몸통은 사라졌으니 이게 간단한 문제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리를 보호할 겸 가둬놓을 목적으로 설치한 철사 울타리는 멀쩡하다. 도대체 이걸 무슨 논리로 해석해낼 것인가.

뭐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일단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내 딴에는 철망으로 단단히 보호를 한다고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냥꾼은 철망 밑으로 일종의 땅굴을 파고 들어와서 오리를 물고 가 버렸다.

그런데 오리가 끌려가면서 아마 극한의 반항을 했던 모양이다. 반항 중에 머리가 철망의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철망의 구멍은 오리의 머리보다 작았다. 오리는 목이 긴 동물이라 철망의 구멍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복잡하게 엉켰을 것이고, 사냥꾼은 아마 짜증이 났을 것이다. 철망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 오리의 큰 머리를 어떻게 끄집어낼 것인가. 몸통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제압을 했는데 이놈의 머리가 문제다. 머리는 사실 먹을 것도 별로 없다. 그리하여 사냥꾼은 결단을 내린다. 오리를 통째로 끌어내기보다는, 거추장스런 머리는 잘라내 버리고 몸통만 끌고 가기로.

그래서 오리의 머리가 철망에 걸린 채로 마치 무슨 설치미술 작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끔찍한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입은 머리가 잘리는 순간의 고통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크게 열려 있었고, 벌려진 입 사이로 작은 혀가 자주색으로 변색된 채 말라붙어 있었으며, 눈꺼풀 또한 열려 있어서 동공이 마치 작은 구슬 두 개를 박아놓은 것처럼 아직도 반짝이 빛을 내며 아침 햇살에 반응하고 있었다.

 

▲ 이런 철망이 무슨 소용이냐고!!

 

목이 끊어지는 순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던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아침 일찍 오리 모이를 주러 나갔다가 그런 꼬락서니를 발견한 나는 일언이 폐지하고 망연자실, 어안이 벙벙, 속수무책인 심사로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단두대로 목이 잘려진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역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눈앞의 현실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귀신이 개입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싶었다.

문제는 내가 귀신에 씌워서 헛것을 보는 것인지, 세상이 온통 귀신에 들려서 엽기적인 일을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눈만 뜨면 믿을 수 없는 뉴스가 귓속을 왱왱거리는 등으로 세상이 하도 이상하게 돌아가니까 이제는 아예 도처 아무 데서나 기현상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뭐 그런 심사인 채로 한동안 눈이나 껌뻑껌뻑 하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눈앞이 팽팽 돌아가면서 내 몸은 심하게 비틀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잠이나 퍼 자버리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십 분도 채 안 돼서 도로 벌떡 일어났다. 도무지 분하고 억울하고 절통하고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을 자백하자면 오리 알이나 얻어먹자고 오리를 사다가 길러온 것은 아니었다. 잡아먹을 목적으로 길러온 것이었다.

내가 내여자라고 부르는 그녀가 내 곁으로 오던 그 해의 봄에 그런 생각을, 아니 약속을 했었다. 전에도 오리를 기르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돌아가시는 등의 정신 없는 세월을 치러내는 와중에 오리는 다 사라지고 한 마리도 안 남아 있었다. 오리 울타리만 멀뚱하게 남아 있는 현실이 민망해서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녀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 내 손으로 오리를 사다가 길러서 내 손으로 오리를 잡은 다음 내 손으로 맛있는 오리요리를 해주겠다고, 지금 돌아보면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나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렇게 약속을 했었다.

 

▲ 얄궂게도 알 셋을 남기다니...

 

약속을 제대로 근사하게 지키자면 먹이도 아무 것이나 마구 먹여서 기른 오리보다는 뭔가 좀 다른 오리를 길러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배합사료 같은 것은 아예 먹일 생각도 안 하고 들판을 돌아다니며 벼이삭을 포함한 각종 이삭이나 우렁이, 달팽이, 물고기 같은 이를테면 고급 식재료만 구해다가 먹였다. 그렇게 해서 오리가 다 자라기는 했지만, 도무지 내 재주와 용기로는 오리를 잡겠다고 나설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와, 미치겠네. 저걸 어떻게 잡지?”

“아유 참 내, 그냥 둬요. 그냥 둬. 잡기는 뭘 잡아요, 뭘 어떻게-에?”

날마다 오리를 보며 걱정이 태산인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실실 웃어대던 그녀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 싶었다. 아무 짓도 안 하는 것으로써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내는 그런 방법, 요컨대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 지키는 것보다 좋은 일이 돼버리는 아주 기막힌 상황이 바야흐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만약에 내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두 눈 질끈 감고 오리를 잡아 치웠다면, 그녀는 아마 내게서 끔찍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됐을 것이고, 그러면 오리고기는 하나도 맛이 없어서 그냥 버려야 했을 것이다.

자, 이렇게 해서 오리는 이제 우리의 애완동물이 되었다. 애완동물도 그냥 애완동물이 아니었다. 좋은 먹이를 주면 줄수록 좋은 알을 낳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뜻밖의 행동으로 우리의 지식까지 넓혀주는 아주 고마운 애완동물이었다.

철망으로 설치한 오리 울타리 바로 옆에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 뽕나무가 어찌나 큰 지 열매를 다 따내기로 하자면 아마 팔구십 킬로그램은 족히 될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천성이 게을러서 그것을 다 따내기는커녕 십분의 일도 따본 적이 없다. 나무가 어지간해야 따지, 올라가서 따도 손이 안 닿는데 어찌 딸 것인가. 그래서 거의 내버려두는데, 까치를 기본으로 어치며 참새 등등 온갖 새들이 몰려와서 잔치를 벌인다. 새들은 오디를 따서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밑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바람이 거세게 불 때는 오디가 스스로 떨어지기도 한다. 겁이 많은 오리들은 투두둑 떨어지는 오디에 놀라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달아나는 등의 소란을 떨어대곤 했지만, 차츰 그것이 썩 좋은 먹을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오리의 간식이 되어준 거대한 뽕나무

 

무엇이 게기가 되어 그런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이지는 사람인 내가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해도, 어쨌든 오리들은 이제 투두둑 떨어지는 오디가 무서워서 달아나는 등의 소란을 떨기는커녕 고개를 뒤로 젖히고 뽕나무를 쳐다보며 꽥꽥 소리를 내는 식으로 오디가 떨어지기를 소망 내지는 앙망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오리의 그런 변화 혹은 진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쁨은 당연히 컸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공부로 확장되어 갔다.

저 멀리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채집활동을 효과적으로 하게 되었는가를 유추해보는 재미도 물론 좋고 새로웠지만,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새로운 발견의 과정이라느니 어쩌고 떠들어대며 짐짓 무엇인가를 크게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개똥철학의 시간에 푹 빠져드는 재미는 무엇보다 컸다. 오리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찌 그런 신기한 공부의 시간을 가질 수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 오리를, 우리의 애완동물을, 그런 고마운 선생님을 어느 못된 사냥꾼이 그냥 잡아간 것도 아니고 머리를 댈룽 떨어뜨려 놓고 끌어간 것이었다. 이 무슨 빌어도 못 먹을 ‘염병’이란 말이냐. 그렇다고 그녀에게 그런 얘기를 곧이곧대로 해줄 수도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그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듣게 된다면 며칠이나 속상해 할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숨기고 나 혼자서만 억울해 하고 있자니 이게 이중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혼자 남몰래 속이나 상해하고 있을 수는 또 없는 일이었다. 사냥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괴물은 이제 오리를 훔쳐가는 맛을 알아버렸고, 아직 두 마리가 더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으니, 잡아간 오리를 다 먹고 나면 다시 방문하리라는 것쯤은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오리와 개

 

이게 바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 것이로구나. 그런 냉소적인 생각이나 되풀이 해가며 오리 울타리를 수리하자고 나섰다. 그렇게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놀랍게도 그날은 알이 세 개나 있었다. 보통은 한 마리만 알을 낳고, 드물게 두 마리가 알을 낳기도 했지만, 세 마리가 한꺼번에 일제히 알을 낳았던 적은 글쎄, 내 기억으로는 없었다. 혹시, 혹시 사냥꾼에게 끌려가면서 그냥 있는 힘껏 알을 낳았다기보다는 알이 그냥 빠져나왔던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고 보니 눈에서 눈물이 한줌이나 울컥 쏟아진다.

“아유 이런 빌어먹을.”

어쨌든 울타리를 수리한다고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전후좌우는 물론 위와 아래까지, 어린아이의 주먹 하나도 들어갈 만한 구멍이 없이 모조리 찾아서 울타리를 수리한다고 했지만 닷새 채 안 돼서 오리 한 마리가 또 없어졌다. 이번에는 머리통을 남긴 게 아니라 통으로 그냥 끌고 가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마귀의 장난이란 말인가. 면밀히 살피고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철망과 철망이 겹치는 부분을 사냥꾼은 정말이지 귀신같이도 찾아내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오리를 물고 가버렸다. 그리고 나흘 뒤에는 또 역시 그런 방식으로 남은 한 마리마저 훔쳐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애완동물 오리는 최종적으로 모두 사라졌다.

그나저나 궁금하다. 대체 어떤 녀석이 오리를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나 단골손님처럼 주기적으로 훔쳐간 것일까. 삵일까? 아니면 족제비? 모르겠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았다. 사람이 자연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마음이 일단 잔혹하게 대담해져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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