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씨팔년아, 니 개같은 새끼들 데리고 당장 나가라고!!"

방문은 열려 있었다. 경훈은 화장실로 가려던 발길을 고함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무엇인가 부숴지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단말마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문 옆 벽에 몸을 숨기고 쪽눈을 한 채 경훈은 방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악…'

하마터면 입에서 비명소리가 나올 뻔했다. 방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여자도 나뒹굴고 있었다. 남자는 입에 거품을 문 채 한 손으로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리질을 해대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이얀 여자의 속살. 여자는 반은 벌거벗은 채였다. 입술에선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이, 발이 몸에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나오는 것일 뿐이었다.

경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

벌써 몇 번째인가.

처음 만난 남자는 상냥했다. 경훈과 남순의 우려는 기우였다. 그들이 이른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낀 서울역에서 내려 졸린 눈을 비벼 뜨고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 남자가 있었다.

"너희들이 남순이와 경훈이지?"

택시를 태웠다. 경훈과 남순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울의 빌딩과 차량들, 그리고 때 이르게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구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남자는 아주 상냥하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이곳저곳을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 10여분 여가 갓 지났을까. 택시는 가까이에 산이 보이고 그 중턱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는 동네의 한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몸이 오싹해지며 진저리가 쳐졌다. 벌써 4월이건만 아직 동장군의 입김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코 부드럽지 만은 않게 얼굴에 와 닿는 바람결에서 그래도 봄의 녹녹함은 배어나고 있었다. 공장인지 무엇인지 모를 가옥 한 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랐다. 건물 옥상 위엔 첨성대와 같은 굴뚝이 하늘을 향해 서있고 연기는 거기서 나는 것이었다. 경훈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가 그건 목욕탕, 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래에 붉은 페인트로 쓰여진 팻말이 보였다.

남자가 목욕탕 다음 골목을 왼쪽으로 꺾어들더니 약 10여 미터쯤 가서 멈춰 섰다. 검은색 철문은 바로 인근해 있는 옆집과 마찬가지로 칠이 반쯤은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경훈과 남순의 눈에 그 대문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바로 옆에는 간신히 한사람의 몸이 들어가기나 할 만큼의 작은 쪽문들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자는 닫힌 문을 여는데 초인종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기껏 준오네 집 TV 드라마에서나 몇 번 본 것 같은 희귀한 새소리가 나는 초인종. 안에서 부리나케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덜커덩, 문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봄 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 앞치마를 두른 옷에선 이미 이전에 느꼈던 화사함은 없었다. 분명 신경을 써서 화장을 한 것 같은 얼굴도 아직 부기가 채 가라앉질 않아서인지 봄 손님의 얼굴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아이고 우리 새끼들 왔구나…그래 고생 많았지?"

목소리는 똑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경훈은 생각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구수한 찌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남순은 다소간은 뾰로퉁한 상태였다. 봄손님이 왔을 때보단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지만 아직도 어딘지 모르게 꼬여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기차 안에서도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 경훈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터였다.

생각보다 거한 상이 차려져 나왔다. 그동안 경훈과 남순은 어머니가 미리 사놨음직한 옷들을 챙겨주는 대로 입었고, 부엌과 닿아있는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를 했다.

"배 많이 고팠지?"

"예, 그랬어라우."

경훈의 대답이었다. 별로 말이 많지 않았던 경훈이었지만 남순의 태도를 보아 자신이라도 꼭 대답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남자는 싱글벙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번갈아 가며 경훈과 남순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 우리 경훈이 배가 많이 고팠다니까 빨리 밥먹자."

어머니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서울에서의 첫 날이었다. 밥상이 물러가고 아침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어머니는 외출했다. 어딜 가는지도, 왜 나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단지 저녁 무렵에 들어온다고만 얘기했다. 그리고 남순에게 음식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배고플 때 차려먹으라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간 지 30여 분 후 남자도 나갔다. 그는 피곤할 테니 방에 들어가 한 숨 자두라며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눈꺼풀이 무거웠다. 미리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다. 원래 자투리 짐 같은 걸 넣어두는 방으로 쓰던 곳인데 경훈이 올라오기 며칠 전 청소를 해놨다는 얘길 아침밥을 먹을 때 이미 들었던 터였다.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다소 좁긴 했지만 벙어리 삼촌과 함께 자던 시골의 그 방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남순의 방도 따로 있었다. 경훈의 방보다 훨씬 컸고 여자이기 때문에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남자의 설명이었다.

경훈은 드러눕자 마자 잠에 취해 떨어졌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한 이삼일이 지났을까, 첫 사건이 벌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방에 있는 TV를 보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서도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경훈의 귀가 쫑긋하고 소리의 원천지를 찾고 있을 때 바로 다음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경훈은 화들짝 놀랐다. 그건 분명 봄손님, 아니 어머니의 그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경훈은 문을 열었다. 거실 건너편으로 위치해 있는 남순의 방문도 이미 열려있었다.

경훈의 눈이 막 고개를 방문 밖으로 빼낸 남순의 그것과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표정. 그건 경훈도 마찬가지였다. 경훈은 얼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순이 뒤를 따르려다가 다시 방 문 앞에 멈칫 하고 섰다. 경훈의 시야에 이내 방안의 광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순간 경훈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반쯤은 벗겨진 여자의 몸 위로 내리쳐지는 주먹질과 발길 세례. 여자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묵묵히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다. 경훈의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안으로 옮겨지려는 찰라 남순의 손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남순을 힐끗 쳐다보는 경훈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남순이 눈짓을 했다. 숨을 헐떡 거리며 잠시 남순을 노려보던 경훈은 결국 발길을 돌렸다. 남순이 따라 들어왔다.

"뭔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면은 안된다이."

비명소리는 밤늦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됐다. 중간중간 내용을 알 수 없는 몇 마디 대화가 오가는가 싶으면 다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고 또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경훈은 잠이 들고 말았다.

신기한 것은 다음날 어머니의 모습과 태도였다. 그녀는 밤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머리로 감춘 듯한 얼굴 한쪽의 대일밴드가 유일한 상흔이었다. 그녀는 항상 그렇듯 아침 밥상머리에서 남자에게 다정했고 남순과 경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직장으로 향했다.

남순과 경훈이 '상습'이란 단어를 떠올린 건 바로 그날 밤이었다. 여느 날처럼 저녁 밥상을 물린 뒤 한시간여가 지났을까, 다시 하루전의 현장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했던 경훈은 비명소리가 어젯밤보다 더 격렬해지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경훈은 우선 남자의 손부터 잡았다. 갑작스런 돌발 사태에 놀란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에선 언제 마셨는지 술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넌 나가…."

"왜 이러는 거에요!!"

"아쭈 이런 씨팔 새끼 봐라. 기껏 굶어 죽는다고 데려다 밥먹이고 재워줬더니 이게 하는 싸가지 좀 봐"

주먹이 날아왔다. 경훈의 볼때기에 불이 일었다. 의식을 잃을 듯 머리가 핑돌았다. 여자가 매달렸다. "차라리 나를 때려요."

남자가 쌔근쌔근 거친 숨을 내쉬며 모녀를 노려보았다. 경훈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순이 문밖에서 이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경훈은 터덕터덕 걸어 현관문을 나섰다. 대문 앞까지 나온 그는 깊은숨을 한 번 쉬고는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색의 죽은 하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서울의 하늘. 찬바람이 경훈의 눈 속을 파고 들었다. 시골의 하늘이 생각났다. 온통 촘촘하게 박힌 별들만이 찬란하던 그 하늘. 서울에 하늘은 없었다. 아니 있다해도 그건 철저히 죽어버린, 그래서 이미 하늘이라고 부를 수조차도 없는 그런 하늘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빠르게 골목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리퍼 소리가 경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을 벗어날 즈음 남순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왜 따라왔어…씨발"

"어저께 내가 한 말 잊어부렀냐"

"……"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안허드냐…안?"

"씨발 그러고들 있는데 어떻게 가만 있으란 말이여"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남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참아야 한당게…그래봤자 우리만 손해여"

"차라리 우리 다시 시골로 가벌자…그게 낫지 않겄어? 이제보니까 맨날 저러고 사는 모양인디 어떻게 같이 살어?"

"……"

경훈의 성격을 아는 남순이었다. 그녀 역시 어렸지만 그래도 경훈에 비하면 꽤 조숙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학교 문제도 알아보고 있다고 하잖여…참아야 되는 거여. 우리는…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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