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말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나는 지켜보고 싶다. 아직 색이 없다는 게 한 편으론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화내고 분노하며 혹은 오히려 열을 내며 옹호 내지 비판의 대열에 서는데 대부분의 갈등에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아직 현대사에 대한 명확한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제 모두가 맞다고 믿었던 것이 오늘 잘못된 것이 되고, 오늘 잘못이라 믿었던 것이 내일 당연한 이치가 되는 우리 사회이지 않는가. 

 

 

그래도 먼 과거 얘기를 들을 땐 좀 더 색이 있게 판단을 도전해보곤 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고지식했지만 전통을 수호하고자 했던 그의 뚝심은 인정할 만 해”라든지 혹은 “흥선대원군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문물에 있어 어쩌면 일본에게 그렇게 뒤처지지는 않았을 거야”라든지 등의 토론이 오고갈 수 있는 내 초중고 학교의 교실이 좋았다. 


역사 연표 암기는 싫어했지만 다행히 내가 만났던 국사 선생님은 손에 꼽은 순위권 안에 들 정도로 좋은 선생님이었다. 이따금씩 예컨대 만우절 같은 날엔 그 선생님은 일종의 이벤트로 교실 뒤 사물함에 앉았고 우리는 칠판을 등진 채 당신이 들려주는 야사에 귀를 기울였다. 늘 역사 시간에 졸려하던 아이들도 조금은 귀를 기울이고 재미있다는 기색을 보였다. 교과서에는 적히지 못한 그 얘기들은 연도표에 뻥뻥 뚫린 공백을 메꾸며 정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판단하도록 해주었다. 


역사 과목에 취약했던 내가 개괄적인 한국사를 알게 된 건 고3을 지나서 재수를 겪으며 이왕 다시 시작한 공부, 한번 도전해보자고 그토록 어려워하던 한국사 교과서를 처음 펼쳐본 이후였다. 학교가 사라진 재수생이었기에 준공교육이었던 EBS 한국사 인터넷 강의에 모든 것을 의지했다. 간간히 EBS에서 기획한 역사물 동영상을 보며 그들이 던지는 비판과 질문에 대한민국의 미래와 지향점에 순수한 의욕을 불태우곤 했다.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갑자기 한국사 과목이 입시에서 필수과목이 되었다. 공부량이 많아진 학생들은 안타까웠지만 잘된 일이다 싶었다. 나 역시 역사를 공부한 전후 시야의 폭이 무척 달라졌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예비 성인에게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를 가르치고 있다. 수학, 영어 담당이긴 하지만 부쩍 친해진 탓인지 그 외의 영역에 대해서도 대화를 많이 나누곤 한다. 아직 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방학 동안 한 학년 동안의 공부 분량을 잘 따라와 완수한 이 똘똘한 아이에게, 대학교 내외에서 이슈화되거나 공부한 것들을 살짝 들려줄 때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끄덕이곤 한다. 때론 순수한 의욕을 갖고 또 곧잘 투정을 부리는 요 또래 아이들은 선생님이라 부르는 어른들의 말, 생각을 곧잘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한명 한명 대할 때마다 무척 조심스러워야 했다. 말 한마디, 말투 하나, 표정이며 감정까지도 일주일에 몇 번 아주 짧게 만날 뿐임에도 그 아이들은 나를 닮아갔다. 공교육과 사교육을 막론하고 교육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휩쓸리지 않고 바로 서야 함은 이 때문이다. 교육 받는 아이들의 사고는, 어느 틀에 담기느냐에 따라 너무 쉽게 그 틀에 맞춰진다. 

유리로 된 커피잔에 작은 얼음이 가득 차 있다.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먹먹해 가늘고 긴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저었다. 작은 얼음들이 서로 그리고 유리와 부딪히며 청량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하나 둘 얼음이 녹으며 사라지자 더 이상 예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 모금 들이킨 커피는 쓴 맛이 났다.

광화문 광장 앞 인자한 미소를 띠고 서울을 품듯 앉아있는 세종대왕은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위인 중의 위인. 그러나 그에게도 역사적인 흠이 있다면 행여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이 역사적 악인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무려 두 차례에 걸쳐 태종실록을 열람하고자 한 것. 지금 세태와 비슷한 실루엣이 겹치지 않을 수가 없다(몇 백 년 후 광화문에 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질 지는 의문이지만). 

당시 역사서는 재위 중인 군주가 손을 댈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다. 세종도 이의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사적 관계에 연루된 그의 인간적인 작은 오판이 아니었을까. 세종의 재위 13년 춘추관이 편찬해 올린 태종실록을 열람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이자 고금의 전례를 들어 거센 비판으로 그 뜻을 거절당한 세종은 재위 20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신하들과 마찰을 겪는다. 그러나 세종은 그 현명한 지위에 맞게 마침내 그 뜻을 접었다.

당시 역사는 그 사실과 기록에 있어 정치적인 권위로부터 위태롭지 않게 정권으로부터 그 영향력을 철저히 배제했다. 열람하는 것조차 세종은 도리로써 그 뜻을 굽혔는데 하물며 정권의 손으로써 역사가 쓰이고, 국민 특히 청소년을 육성하려는 일은 도저히 안 될 일이다 (필히 추진해야겠거든 광화문에 그 동상부터 뽑아라!). 

일부 청소년들은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라며 거리로 나섰다. 대학 교수들은 역사 교과서의 집필을 거부하며 연이어 반발하고 있다. 모두가 역사적 퇴보로 당연히 알고 있는 진실을 가장 현명해야 할 일부만 모른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지지한다. 그들이 말하는 ‘정상’은, 올바른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정말 모르는 걸까?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 역사가 일궈낸 우리헌법이 수호하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정권의 입맛에 맞게 획일화될 역사가 맞는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무화의 창달에 노력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마땅히 지켜져야 할 것을 빼앗는 오류를 기록하지 않으면 좋겠다. 역사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사실’이 아니다, 역사는 ‘해석’이다. 반성을 찾을 수 없는 ‘좋은’ 역사는 진정 역사로서의 역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과거로써 끊임없이 현재를 비판해야 하고 미래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국정화 된 역사는 능히 역사로서의 기능을 행할 수 없다.

나는 지켜보고 싶다. 국가가 이렇다 저렇다 정해놓은 폐쇄적인 신화가 아니라,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친구들과 선생님과 토론할 수 있던, 아픔을 지켜보며 우리는 어떤 어른으로 어떤 국민으로 이 국가를 키워나가야 할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다사다난했던 우리들의 역사를.  대학생기자 <연세대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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