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국화가 피고, 나뭇잎이 물드는 계절이 오면 내 안의 바람기가 꿈틀거린다. 이 바람기는 역사가 매우 깊어서 잠재우기가 어렵다. 한 사흘 정도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노라면 시나브로 진정이 되기는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어렵다 해서 포기하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면 나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녀가 내 옆으로 오기 전까지는, 국화 향기 가득한 가을날에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근거 없는 두려움은 아니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삼십대 시절에, 무슨 특별한 생각도 준비도 없이 사무실을 나와서 버스를 타 버렸던 나는 한 달도 훌쩍 지난 뒤에서야 사무실로 돌아왔다.

 

▲ 물들기 전의 애기단풍

 

명색이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여놓은 인간이 그런 짓을 해버렸으니, 그놈의 사업이 제대로 될 까닭은 없었다. 아무튼 그랬다. 그때 한 달이 넘도록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하도 많은 곳을 돌아다닌 까닭에 마치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뒤죽박죽 뿌옇기만 할 뿐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강화도 어디에선가 웬 수염이 하얀 노인네가 나를 보면서 때가 되었다고, 공부할 때가 되었으니 따라오라고 했었던 기억 하나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 노인을 따라가긴 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말하는 공부라는 것이 내 영혼을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래서 깊은 이야기도 나눠보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그 갈래와 층위가 하도 많아서 뭐라고 선뜻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도와 그 노인이 내게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도 의 개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게다가 나는 무슨 도 같은 것이 그리워서 만산홍엽의 낯선 오솔길을 헤매고 다니던 것도 아니었다.

돌아옴에 대한 생각이 없이 훌쩍 길을 나설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가슴에 그런 소망 하나는 늘 있었지만, 무엇을 아무 계산 없이 한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던 일을 완전히 망해버린 뒤로 나는 매우 소심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망할 것도 남아 있지 않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쩌나, 어쩌나 하는 식의 불안을 털어버리지 못했다. 가슴이 이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다가 결국은 납작 달라붙어서 숨도 못 쉬는 게 아닐까 하는 새로운 불안이 찾아들 즈음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와 버렸지만, 가을날에 집을 나서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가을이면 두 눈 꾹 감고 집안에만 웅크려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두 눈 꾹 감고 소풍이나 여행 같은 것은 그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으려 애를 써 온 세월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살짝 변했다. 변해 있는 나 자신을 내가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 내가 내여자라고 부르는 그녀가 내 옆으로 온 뒤에 내 안의 무엇이 어떻게 작동을 해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을날에 소풍이니 여행이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려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 참 신기한 일이다.

 

▲ 물이 든 뒤의 애기단풍

 

그래도 먼 길까지는 아직 차마 엄두를 못 내고 가까운 곳만을 골라서 다닌다. 그녀와 함께 어디 먼 낯선 데로 단풍 나들이를 갔다가 만약에 내 안의 바람기가 작동을 해서 나 자신도 모르게 그냥 그녀를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가버린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내가 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완벽하게 믿지는 못한다. 담배를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도 끊기는 왜 끊어, 해버리는 이런 나를 어떻게 백 퍼센트 신뢰할 것인가 말이다.

아무튼 작년에는 그녀와 함께 문수사 입구 애기단풍 군락지를 다녀왔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그곳을 염두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고창 읍내에 다른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내친김에 단풍구경이나 할까, 해서 간 것일 뿐이었다. 마침 가을비가 가을답게 가슴이 시리다 싶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고, 바람에 날리다가 도로에 떨어져서 착착 달라붙은 단풍잎들은 슬쩍 한 번 보면 잘 그린 수채화 같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옆구리에 커다란 총알이라도 뚫고 지나가버린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때의 그런 아득한 느낌이 매혹적인 느낌으로 변환되기 시작하면 무엇이든 사고가 난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사람을 때린다거나 죽인다거나 하는 그런 끔찍한 사고야 아니겠지만, 나란히 걷고 있는 내 옆의 그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정도의 사고는 아마 거의 예정돼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터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한 시간 정도 사진이나 찍다가 그만 돌아갈까? 하고 그녀의 의견을 구할 만큼의 이성을 갖고 있었고, 그녀는 다행히도 그래요, 돌아가요, 하고 있었다.

금년에는 아예 단풍이 들기도 전에 문수사 입구 애기단풍 군락지를 다녀왔다. 햇살이 아주 맑은 날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까닭으로 마음껏 자라난 질경이가 마치 푸른 낙엽이라도 우수수 쏟아져 내린 것처럼 길을 온통 덮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이채로운 풍경이었다. 한여름에도 추워서 들어가기 어려운 계곡에는 그 모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잘잘 흘렀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도토리와 알밤이 도처에 구르고 있었고, 다람쥐들은 특유의 놀랍도록 귀여운 오물오물 툭, 하는 몸짓으로 도토리와 알밤을 두 손(?)으로 주워들고 베어 먹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들은 내가 아직 어렸던 시절에 이미 보았던 것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익숙한 풍경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풍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소나무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전깃줄과 전봇대 정도라고 한다면 내가 너무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일까? 그래,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오솔길이었지만 지금은 자동차가 비켜 다닐 정도로 넓어졌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길이 넓어졌다는 실감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도 문수사 입구에 애기단풍은 당연히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애기단풍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단풍은 단풍인데 잎이 참 작다, 못 났다, 하는 정도였다. 그 못나 보이는 단풍이 미래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해보지도 못했다. 그 당시 우리의 관심은 단풍이 아니었다. 금방 하늘이라도 찔러버릴 듯이 엄청나게 커다란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주황빛으로 익어가는 계절과 단풍이 물드는 계절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같았다.

그 시절에 문수사의 명물은 애기단풍이 아니었다. 단풍 정도는 그냥 일상의 한 풍경일 뿐이었다. 명품은 역시 아름드리 감나무들이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약 일 킬로미터 거리의 양쪽으로 거대한 감나무가 마치 전설 속의 무슨 영물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데 해마다 가을이면 마치 꽃이라도 핀 것처럼 주황색 열매가 그야말로 주렁주렁 열려 있곤 했다.

너무 많이 열려 있어서 얼핏 흔해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개 두 개의 감들이 다 귀한 것들이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농촌은 집집마다 한두 그루 정도의 감나무를 두고 있었지만 과일은 언제나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아서 버리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문수사의 감은 곶감을 깎기에 좋은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나 따낼 수 있는 감이 아니었다. 나무가 하도 커서 어른들도 감히 나무에 오를 생각을 못했다.

감나무 아래는 온통 들쭉날쭉한 바위들이었다. 실수로 떨어지는 날에는 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했다. 가을이 깊어지면 감을 따는 전문가 아저씨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들은 새끼줄이 달린 구럭 하나를 어깨에 메고 끝이 갈라진 장대 하나를 들고 감나무를 마치 다람쥐처럼 타고 올랐다. 어디만치 올라갔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까지 올라가는 그들은 흡사 무슨 별이라도 따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

 

▲ 기계로 깎은 현대의 곶감

 

과연 그들은 단순하게 그냥 감이나 따는 것이 아니었다. 한참 뒤에 내려온 구럭 안에는 별이 가득했다. 우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커다란 바구니에 옮겨 담고 구럭이 묶여진 새끼줄을 흔든다. 그러면 전문가 아저씨는 구럭을 다시 끌어 올려서 그 안에 또 별을 가득 담아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뭇 재미난 일이었지만, 다시는 안 한다고 혼자 맹세를 해야만 할 정도로 고생스런 일이기도 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커다란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바라보며 별을 상상하는 재미를 그 무슨 재미에 견줄까마는, 그 시간이 아닌 시간에 해야 하는 일련의 노동을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사내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지금 생각하면 무리도 보통 무리가 아니었다.

별 같은 감을 따는 계절 가을이 오면 우리는 으레 토요일마다 문수사로 달려가곤 했다. 자발적인 행보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외숙모와 그리고 외삼촌이 가자고 하시니까 그저 따라나서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길은 뭐냐 하면,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서 어른들이 함께 가자고 부추기지 않으면 굳이 나서서 나도 가겠다고 할 만한 길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따낸 감은 즉석에서 곶감으로 깎아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집으로 가져와서 깎았다. 토요일에 문수사로 가서 하룻밤을 새고 일요일 아침 일찍 땡감이 가득 담긴 바랑을 어깨에 메고 길을 나선다. 문수사에서 집까지는 아마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삼십 리는 족히 넘고도 남을 것이었다. 지금이야 물론 자동차도 쑥쑥 들어가지만 그 당시의 길은 길이랄 것조차도 없는 그냥 진흙탕 아니면 자갈투성이의 비탈에 찔레와 온갖 가시덤불이 무시로 얼굴을 할퀴어대는 오솔길이었다.

맨 몸도 아니고 자기 몸무게의 절반이 넘는 화물을 어깨에 메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삼십 리도 넘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지금 회상해 보면 완전히 보부상 그것이었다. 그렇게도 고생스럽게 가져온 땡감을 곶감으로 만드는 과정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곶감 한 개를 깎는 데 걸리는 시간이란 것이 훌쩍, 그렇게 그야말로 순식간에 기계로 깎아버리지만 그때는 모든 식구가 밤이건 낮이건 저마다 식칼 한 개씩을 들고 둘러앉아서 깎았다.

하지만 그것을 다 깎고 난 뒤의 성취감이랄까 보람은 그 무엇에도 견줄 바가 없었다. 수천 개의 곶감을 줄에 꿰어서 장대에 걸어놓고 늦가을의 짱짱한 햇살에 말리는데 그 자체가 보물이요 모든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의 결과를 내 눈으로 확인하며 남몰래 씽긋이 웃는, 그 웃음이 즐거워서 자다가도 씽긋이 웃고 밥을 먹다가도 저절로 씽긋이 웃고 또 웃는 재미만한 즐거움이 세상에 또 무엇 있으랴.

 

▲ 길가의 억새

 

나를 그렇게도 고생스런 즐거움의 도가니 속으로 풍덩 빠트려 놓은 사람, 그리하여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는 항상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 그 사람은 키가 작고 체격도 엄청나게 작아서 멀리서 걸을 때면 마치 도토리가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감나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집중적으로 주시하는 것은 감나무의 감도 아니고 다람쥐도 아니고 단풍이었다.

그녀는 아들 하나에 딸 둘 그렇게 세 자식을 두었지만 남편을 너무 일찍 잃어버렸다. 그나마 남겨진 토지가 있어서 손발이 부르트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면 굶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굶어서 죽기는커녕 자식들을 모두 키워 짝짓기 행사까지 마쳐주었다. 해야 할 일을 마침내 다 끝냈다고 생각한 그녀는 어느 하루 가을날의 스산한 가슴을 안고 길을 나섰다. 죽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리자는 목적이었다.

불공을 목적으로 길을 나선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한 잎의 아주 작은 단풍이었다. 빨갛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개울에 떠서 내려가는데 가슴이 그만 덜컥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느낌이었더란다. 이 느낌이 너무 강렬하고 이상해서 그녀는 며칠 뒤에 또 길을 나섰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잎이 아주 작은 애기단풍에 매료되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그녀는 세상사 시름을 잊고 시간이 간다는 사실도 잊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애기단풍에 매혹된 그녀의 눈에 비치는 또 한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식물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었다. 쌍둥이는 아니지만 쌍둥이처럼 꼭 닮은,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둘 다 엄마의 젖을 빨고 있어야 마땅한 사내아이들이었다.

사내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큰애를 낳고 얼마 안 돼 들어선 작은애를 낳던 중에 그만 눈을 감고 땅에 묻혀버렸다. 엄마 없는 그 아이들의 고물고물한 손가락을, 그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 깊은 고민도 없이, 그리 심각한 갈등도 없이 그녀는 가산을 정리해서 그 아이들의 곁으로 가고야 말았다. 그녀의 사십여 년에 걸친 공양주 보살로서의 새로운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보살님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외할머니라고 하는 너무나도 정겨운 호칭이 내게는 따로 있었으니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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