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0만 민중총궐기 위한 1만 국민투표소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한다. ‘역사 쿠데타’다. ‘쿠데타’란 표현은 너무 과하지 않냐고? 집권여당의 대표가 스스럼없이 이것은 ‘전쟁’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간 검인정 체재 내에서 살아왔던 모든 국민들을 국가가 나서서 ‘적군’으로 삼는 희한한 ‘전쟁’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과거에 대한 평가만을 1열로 줄 세우고, ‘국정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 독점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판단 기준의 선점이기도 하다. 과거의 친일 행위, 독재와 노동자민중 탄압, 민주주의 탄압이 미화될 때 현재 진행되고 있고, 미래에 행사 될 모든 형태의 독재와 독점이 정당화된다. 역사를 장악하는 일이 사실은 어제에 대한 장악만이 아니라, 오늘과 미래에 대한 장악이라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다.

 

▲ 구미역 앞 국민투표소

 

이런 역사쿠데타와 더불어 또 하나의 대국민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 ‘노동법 쿠데타’다. 이 쿠데타는 10.26이나 5.18처럼 군대가 동원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군부쿠데타보다 더 많은 학살을 예고한다.

이 ‘노동법 쿠데타’는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말로 포장되었다. ‘노동개혁’이라는 말로 미화되었다. 청년들을 위한 일이라고 기만되었다.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장년노동자들의 임금을 강제적으로 삭감해야 한다는 ‘임금피크제’ 실시 여부만 부각되었다. 사회보장 제도가 전무한 세상에서 자녀 세대의 안전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 온 대한민국의 가련한 부모 세대, 장년 세대들이 갑자기 자녀 세대의 일자리를 뺏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이토록 놀라운 세기의 사기가 또 있을까.

‘노사정 대타협’의 합의 내용은 일반해고 요건 완화,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를 통과시켜주는 것이었다. 다른 쟁점 사항에 대해서도 ‘협의’를 통해 입법화 한다고 개악 입법의 길을 열어주었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는 입법도 아닌 정부 가이드라인으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라니?

‘일반해고’란 그간 없던 말이다. 그간 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가 있을 경우와 중대한 징계 사유가 있을 경우에 가능한 ‘정리해고’와 ‘징계해고’가 다였다. 그것도 사측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리해고’는 정말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가 있는지가 증명되어야 했다. 경영 정상화 노력 등 해고를 피하려는 사측의 충분한 노력이 있었는지가 확인되어야 했다. 그리고도 노사의 합의가 있어야만 가능하게 ‘형식적으로는’ 묶여 있었다. ‘징계해고’의 경우에도 노사 동수의 징계위원회를 거쳐야 했다.

기업 측은 이런 번거로운 해고 과정을 피해가기 위해 ‘희망퇴직’이라는 꼼수를 동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엔 통상 2~3년 치에 달하는 임금 지급이라는 비용 부담이 따랐다. 기업들은 정리해고 명분을 찾기 위해 쌍용자동차 경우처럼 회계부정 등을 통해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한진중공업에서처럼 몇년 치 수주 물량을 다른 법인으로 빼돌려 서류상 ‘적자’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콜트-콜텍처럼 해외로 공장을 빼돌리고, 국내 공장은 1년이라도 ‘적자’가 되도록 해야 했다. 유성기업처럼 수많은 사업장에서 교섭을 해태해 파업을 유도하고, 직장폐쇄에 이은 고소고발로 ‘징계해고자’를 만들어야 했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는 기업에게 이 모든 번거로운 과정과 책임, 비용 부담에 자유로운 길을 열어주려고 한다. 이제 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나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처럼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가 없더라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굳이 돈을 들여 몇 년에 걸쳐 허위 위기 상황을 만들어야 할 까닭도 없다. 이제 해고는 기업 경영을 잘못해 온 사측의 책임이 아니다. 더는 추가 비용이 들어야 할 배 아픈 일도 아니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의 핵심으로 든 ‘저성과자 해고’ 조항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 평가의 칼자루는 회사가 쥐고 있다. 업무 재배치, 지시 사항 불이행, 근무평가 등 ‘저성과자’로 만들기 위한 방법은 널려 있다. 해고의 책임은 고스란히 노동자 개인들에게로 떨어진다.

정리해고 당한 것은 그나마 가족들에게 얘기라도 할 수 있었다. ‘징계해고’의 부당성에 맞서서 법정투쟁이라도 할 수 있었다. ‘경제 불황’(?)을 한탄하고, 무능한 회사 욕을 한바탕 퍼붓기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책임은 ‘저성과자’인 당신의 무능 탓이다. 회사는 굳이 많은 돈을 들여 노무관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저성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 끼리 벌리는 비인간적인 경쟁을 ‘투전판’ 구경하듯 보고만 있으면 된다. 누가 더 많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지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

 

▲ 교과서 국정화 반대와 함께 국민투표를 받고 있는 제주도 국민투표소

 

‘저성과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우선은 그간 민주노조 활동에 앞장서 온 당신이 될 것이다. 노조를 만들려는 당신이 첫 순위일 것이다. 평소 사측에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 요구를 해 온 당신이 될 것이다. 상사 앞에서도 입바른 소리를 숨기지 않던 당신이 될 것이다. 사용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던 당신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오지 않던 당신이 될 것이다. ‘저성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조출, 야근, 철야를 대가 없이도 알아서 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기업의 여러 필요와 이윤 보존을 위해 언제든 누군가는 ‘저성과자’가 되어야 한다.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도 무서운 일이다. 임금, 근무 형태, 조건 등을 정할 수 있는 자유를 사측에게 주는 일이다. 그간 취업규칙의 내용은 상위법인 근로기준법의 기준 이하로 정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취업규칙은 동수가 참여하는 노사위원회를 통해서만 변경이 가능했다. 이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 정부와 재벌들이 기를 쓰고 요구하는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의 핵심엔 기존의 ‘호봉제’를 ‘성과임금제’로 바꾸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성과임금제’가 도입되면 더 이상 내용적으로 ‘정규직’이란 없게 된다. 매년 개별로 임금협상(?)을 받아야 한다. 내가 100을 받으면 어떤 동료는 70을 받아야 한다. 동료가 아니라 모두가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하나가 되어 매년 ‘임금 및 근로조건과 관련한 단체협상과 교섭’을 통해 근로조건 향상을 꾀하던 일이 옛날 일이 된다. 개별 노사관계를 넘어 산별교섭을 얘기해 왔던 노동조합 운동도 형해화가 된다. 노동자들은 이제 다시 힘없는 개별이 되어 칼자루를 쥔 경영진 앞에서 해마다 일방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단체결성권), 단체교섭 요구(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파업권)이라는 헌법 내의 노동3권은 거적때기로 허울로만 남게 된다.

우리 노조는 아직 수가 많고 힘이 세니 괜찮지 않겠냐고? 물론 소수의 정규직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일 거라고, 당신의 노조일 거라고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살아남는다 해도, 당신이 존엄한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이미 당신은 모든 인간적 고귀함을 반납하고 다만 운이 좋게, 비겁하게 살아남은 어떤 ‘괴물’이기가 십상일 것이다. 노조마저 없는 185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에게는 이렇게 ‘괴물’이 될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1850만 명의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평생 비정규직, 평생 무권리 상태의 현대판 노예의 삶뿐이다.
 

평생 비정규직 시대의 개막

나아가 박근혜 정부와 재벌사용자 집단들은 비정규직 사용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겠다고 한다. 2년마다 잘리지 않고 4년 동안은 비정규직으로나마 고용을 보장해 주겠다니 그나마 다행 아니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비정규직 2년이 넘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기업의 책임과 실낱같던 희망조차 거세해 버리는 폭력과 공포에 대해서는 무감하다. 한국사회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년수가 5.1년이다.

온갖 알바노동을 하며 대학 졸업하고 ‘인턴’이라는 해괴한 ‘스펙’까지 거치며 치열한 취업 경쟁을 뚫고 간신히 일자리 하나 갖고 나면 서른 안팎이다. 4년 동안 합법적으로 ‘청년’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데 정규직을 뽑을 착한 경영주들이 얼마나 있을까. 한번만 연장하면 숙련노동자들을 ‘평생 비정규직’으로 쓸 수 있는데 ‘정규직’을 뽑을 고마우신 기업주들이 얼마나 있을까.

35세 이상 전문직의 경우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고도 한다. ‘전문직=안정한 삶․정규직’의 꿈도 이젠 가능치 않다. 또 55세 이상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쓸 수 있도록 하자고 한다. 평균 연령 80세 시대에 55세 전후면 어떤 노후 보장도 없는 시대에 ‘또 다른 청년 세대’이거나, ‘또 다른 노동시장 진입세대’에 다름 아니다. 이들을 합법적으로 평생 비정규직으로 쓸 수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청년이 하나도 없이 ‘노령 청년노동자들’만으로 운영되는 공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간 파견비정규직 노동자 사용이 금지되어 있던 일부 업종에도 파견노동자 사용을 가능케 하자고 한다. 주조, 금형, 용접, 열처리, 표면처리, 도장 등 일명 ‘뿌리 산업’에 한해서란다. 자동차 산업, 조선산업 등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근간에 비정규직 도입을 합법화 하자는 뜻이다. 현대자동차 도장 공장에만 비정규직 사용이 합법화 될까. 몇 개 직종이 전체 직종으로 넓혀지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 숭실대 국민투표소

 

1997년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제가 합의될 때, 청소나 식당 노동자들 같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 수백만 명의 이웃들이 합법적으로 정리해고 당해야 했다. 1000만 비정규직 시대가 되는 데는 채 15년도 걸리지 않았다.

모든 공공기관, 공기업들에서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없음에도 이미 임금피크제 도입이 ‘자발적으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청년 세대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비도덕적 집단으로 낙인찍히게 되니 도장을 찍게 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오래 일해 온 한 선배를 며칠 전 만났는데, 사측(?)이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을 불러 임금피크제 명목으로 정년 전 3년 동안 20% 임금 삭감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더란다.

MBC에서는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가이드라인이 나오기도 전에 기자, 아나운서, PD 등 전문 직종으로 분류하던 취업규칙을 임원, 부장, 과장 등 일반 직급 체계로 변경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고 한다. 공무원으로 분류되는 학교 현장도 마찬가지다. 교사들에게도 교원평가제라는 형식으로 성과급제를 ‘일부’ 도입하겠다는 발표가 이미 났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는 청년 일부에게 ‘일자리’를 주자는 사탕발림 선전을 앞세워 이 모든 노동시장 개악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우리 시대 모든 ‘청년’들이 진입해야 할 ‘노동시장’의 본 모습은 이런 ‘평생 비정규직 시대’, ‘일반해고 자유의 시대’, 자본천국, 노동지옥의 시대다. 젊은 청년들에게만 보장된 어떤 작은 오아시스도, 유토피아도 없는 ‘헬조선’이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겁이 나서 못하는 3포 세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 거기에 모든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7포 세대는 더 이상 ‘생체 나이가 어린 청년’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2000만에 달하는 모든 ‘젊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청년학생들에게도, 중견노동자들에게도, 전문직 노동자들에게도, 뿌리산업노동자들에게도, 장년노동자들에게도, 노령노동자들에게도 차별 없이 적용되는 지옥도의 완성이다.

돌려 말하면, 더 큰 불행은 이런 거대한 쓰나미에도 대한민국 세월호가, 그 불안한 선실에 타고 있는 우리 모두가 2014년 진도 앞 바다에서처럼 금세 침몰당하고, 동시에 익사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민간 쿠데타, 자본 쿠데타는 서서히 소리 소문 없이 잔잔하게 진행될 것이다. 최대한 극적인 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 내부의 차이를 이용해 이 사람들에게서는 이것을, 저 사람들에게서는 저것을 먼저 뺏을 것이다.

정규직은 비정규직 조항이 자신과 거리가 먼 일이라 느끼고, 짧게는 몇 개월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들에게 연금 개악, 취업규칙 변경 완화, 임금피크제, 해고요건 완화는 먼 나라의 달콤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물론 그 모든 것이 55세까지겠지만 재수가 좋은 어떤 이들은 성공신화의 쇼윈도에 진열품으로 놓여 약간의 당근을 더 받을 수도 있고, 사회적 불만을 받는 방패 역할을 하는 대신 당분간 정규직으로 과보호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이 모든 말들이 ‘해당 없음’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당신은 아직 팔 게 있는 지식인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다. 당신은 고수익 전문 직종 종사자이기에 어떻게든 ‘능력’을 팔아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도 할 수 있다. 당신은 여러모로 ‘능력자’이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도 있다. 당신은 판단 능력이 빠르므로 탈출할 틈새를 찾아놓을 수도 있다. 당신은 자영업자이기에, 농민이기에, 어차피 꿈꿀 일 없는 빈민이기에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이 촘촘한 지옥의 삶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의 삶과 인생의 모든 국면이 식민화될 때 행복할 수 있는 자는, 조세희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바보거나, 도둑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셋 중 하나 뿐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죽음

‘노동시장 구조 개악’은 비단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인권 후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성과자’는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모든 인간을 이윤을 낳는 기계와 이윤을 낳지 못하는 폐물로 갈라놓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윤을 낳지 못하는 인간들은 투명인간이나 쓰레기 잉여인간으로 살아가도 어쩔 수 없다. 모두 무능한 개인 탓이다. 자본에게 더 많은 이윤을 갖다 바치지 못하는 저성과 인생들은 그 자체로 미성숙하거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인간 취급을 받아야 한다.

모든 인생들이 ‘고성과자’가 되도록 노력했을 때만이 간신히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어렵사리 생존할 수 있다. 이윤을 낳지 않는 모든 인간적 행위들, 공동체적 가치들이 폄하되고 도태당할 것이다. 만인이 만인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짐승’처럼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도래가 바로 코앞이다. 수험 성적을 못 내는 학생들이 일찍부터 저성과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투자 대비 어떤 효과도 없는 비용으로만 사고되는 장애인들의 인권이 지켜질 수 있을까.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포함한 보편적 복지의 논리적 기반이 설 수 있을까. 골고루 평등한 사회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퇴화당하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정의’라는 단어가, ‘윤리’라는 단어가, ‘연대’라는 발음이 발붙일 수 있는 땅이 남아 있을까.

‘노동시장 구조 개악’은 민주주의 말살의 최종 목적지다.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자들을 무권리 상태에 예속된 인간들로 만드는 것만큼 효과적이고 구조적이며 거대한 민주주의 탄압이 있을까.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노동자․시민’들이 다른 민주주의 요구에 주체로 나설 수 있을까. 현장에서 민주노조를 지키고 세울 수 없는 노동자들이 여타 부문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 있는 토대로 설 수 있을까.

 

▲ 구로디지털단지역 앞 국민투표소

 

대다수 국민들이 하루 8시간 이상을 일하는 일터에서 실종되어버린 인권과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곳에서는 무지개빛으로 설 수 있을까. 자신의 생활터에서 자본의 논리를 뼛속까지 받아들이고 동화되어버린 노동자들이 환경생태의, 소수자들의, 시민들의 권리를 함께 지키는 연대자로 나설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맞서가는 노동운동의 거세만큼 달콤하고 환상적인 민주주의 말살이 있을까. 이렇게 부드러운(?) 쿠데타가 따로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600만 표를 잃더라도 올해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노동개혁’을 통과시키고 말겠다는 충심으로 나선 까닭도 다르지 않다. 노동자들을, 노동시장을, 노동운동을 개량화 식민화하고 나면 더 많은 지지표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저들은 잘 알고 있다. 자본가들이나 중산층이 더 많아져 갑자기 표가 불어나는 것이 아니다. 권리 의식을 잃거나 빼앗긴 수많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알아서 보수화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600만 표를 잃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600만 표를 만들기 위한 꿈같은 일에 나서고 있다. 그것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부동의 보수표를 만드는 일이다. 600만 표보다 더 많은 노동의 대가가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온전히 흡수될 것을 저들은 잘 알고 있다.
 

모든 <‘을’들의 국민투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런 대재앙에 맞서야 할까. 민주노총은 총파업으로 맞서겠다고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농민 빈민 시민 단체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11월 14일 10만 민중총궐기로 떨쳐 일어서자고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1850만명에 달하는 미조직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노동법 개악의 실제 ‘피해 당사자’로 나서야 한다. 이제 막 ‘노동시장’ 진입을 앞두고 있거나 진입 자체가 막혀 있는 청년학생들이 나서야 한다. ‘노동시장’ 재진입을 앞두고 있는 노령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뼈빠지게 일해 봤자, 결과적으로 자녀세대들을 비정규 불안정노동자로 만드는 일 밖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는 농민들이, 빈민들이 나서야 한다.

50만 어용 한국노총 집행부 몇 명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 하냐고 나서야 한다. 언제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의 운명을 위임하고 대리시켰냐고 나서야 한다. 이게 소수 재벌들 배불리는 일이지 전체 국민들의 삶을 위한 국가의 정책이냐고, 언제 너희들에게 이런 편향의 권리를 주었냐고 나서야 한다. 전체 국민들의 현재와 미래에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는 국민들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고 나서야 한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내에 우리들의 미래가 한줌도 안 되는 위정자들에 의해 결정될 판인데 ‘일상’이 무어냐고, 거리로 함께 나서자고 해야 한다. 2000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안위가 이렇게 깎아지른 절벽 앞에서 백척간두인데 정쟁만 일삼는 국회도 믿을 수 없다고 ‘당사자’인 우리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렇게 나서자고 누군가는 먼저 나서야 한다.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긴급한 민주주의 전선으로 모든 <‘을’들의 국민투표>가 제안되었다.

민주노총과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등 모든 시민사회 전체가 ‘국민투표실행본부’를 꾸리고 책임 있게 결합해 공동 실천에 나서자고 결의했다. 국민투표 이상의 중차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긴급한 시대 선언이다. 노동법 개악의 이해당사자는 청년들만이 아니라 2000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 아니 이 사회 모든 이들이라는 것을 실천으로 돌파하는 일이다. 한국노총을 들러리 거수기로 세우고 국회 입법이라는 형식 절차를 통해 노동법 개악에 나서려는 박근혜 정부에 맞선 주권자들 스스로의 깃발이자, 직접민주주의 행동이다. 국가와 의회, 소수 재벌집단에 맞선 민(民)의 집단적 자치운동이다.

<‘을’들의 국민투표> 운동은 이렇게 그간 위임의 형태로 형식화되어 왔던 노동자민중시민주권의 권능을 다시 되살리고 확인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우리는 힘이 없지 않냐고 다시는 청와대 앞에서 눈물 흘리지 말자, 국회 앞에서 눈물 흘리지도 말자는 운동이다. 국가를 만든 것도 우리(?)지만, 언제든 ‘위임’이 아닌 ‘직접민주주의’의 실행으로, ‘선거’가 아닌 ‘항쟁’의 방식으로 국가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모두라는 것을 확인하는 운동이다. 하여 우리들 역시 형식에 대해 자유롭다. 언제부터 선관위는 국가만이 독점 가능했을까. 앞장서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지켜내려는 국가란 무엇일까. 기를 쓰고 세금을 걷어가 재벌 특혜만을 일삼는 국가란 대행기구는 무엇일까. 공약 이행은 고사하고 도리어 공약의 반대로 나아가는 대통령은 대체 국민들을 어떤 ‘졸’로 보는 것일까.

<‘을’들의 국민투표> 운동은 그래서 ‘노동법 개악 저지’를 넘어 어떤 절차적 정당성, 역사적 정당성, 사회적 정당성도 획득하지 못한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심판 투표가 될 것이다. ‘모의투표’ 성격으로 ‘국민투표’에 걸맞는 형식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형식적 요건조차 못 갖춘 것은 오히려 박근혜 정권이 아닌가.

한국노총이 도장 찍어주었으니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와 ‘5개 노동법에 대한 국회 개악 입법화’를 해야 한다는 이 정권만큼 요건 미비의 정권이 어디 있는가. 2000만 노동자 국민들의 안전과 미래를 한줌도 안 되는 재벌집단들에게 넘기겠다는 정권만큼 함량 미달인 정부가 어디 있는가. 1인 1표의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구현되고 있다면 어떻게 2000만 노동자들의 안전과 평화보다 재벌가 가족들 몇의 안전과 독점과 무한한 부의 축적이 우선될 수 있을까. 명백한 부정선거 시비로 어떤 절차적 정당성도 얻지 못한 정권이다.
 

<1만 개의 투표소>, 가능하다

<1만 개의 투표소>가 목표다. 국정원,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의 불법 대선공작으로 박근혜 씨가 권력을 ‘합법적’으로 찬탈한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국 투표소 수가 1만3542개소였다. 놀랍게도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 국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국가의 실체이자 주인인 노동자시민들이 직접 할 수도 있다. 몇 조 원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 스스로가 함께 결정하고 노동시민사회 민중진영이 가진 집행력을 가동하면 고작 수억 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1만 개의 투표소> 그게 가능하겠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이 세상에 꿈꾸어진 것 중에 가능하지 않은 것은 없다. 가능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게도 꿈에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민주노총이 나서서 전국 2000개소의 국민투표소를 운영하겠다고 한다. 시민사회 단체들이 4000개소의 국민투표소를 운영하자고 결의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 100개소의 투표소에서부터 10개의 투표소까지 편차가 있긴 하지만 구별로 <1만 개의 투표소> 지킴이 단체들이 서고 있다. 노점상 분들이 자신의 노점 옆에 투표소를 설치하고 있다. 철거민들이 철거촌 앞에 투표소를 설치하고 있다. 카페에 한의원에 공연장에 후원의날 행사장에 변호사 사무실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있다. 종교계가 나서고, 학생들이 교내 투표소를 설치하고 있다. 전국의 병원 앞에, 철도역 앞에, 지하철역 입구에 투표소들이 세워지고 있다. 농축협 노동자들이 나서고 있다. 대안교육의 미래가 이런 ‘평생 비정규직’ 시대라면 참을 수 없다고 제천 간디학교 선생님이 제천 지역에 5개의 투표소를 설치해 보겠다고 한다.

신림역 앞에서는 한 계약직 부부가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재워두고 유모차 투표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기보다 그 시간에 나의 미래를 위해 영화관 앞에 하나의 투표소를 세우겠다는 청년 연인들이 있기도 하다. 지난 10월 13일 이후 10여일 만에 전국 300여개 지역에 2000개소의 국민투표소가 세워졌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피켓과 함께 세워지고, 쌀시장 추가개방반대 피켓과 함께 세워진다. 한국내 사드 배치 반대 피켓 옆에 함께 세워지고, 장애등급제 폐지 피켓 옆에 함께 세워지고 있다. 설악산케이블카 반대 현장에,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에, 제주 강정 평화센터 앞에 세워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금은 조금씩 걸음마를 하고 있지만 이제 곧 춤출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1만 개의 국민투표소>, ‘이어달리기’

<1만 개의 투표소> 운영은 누구나 주체가 될 수 있다. 당신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당신이 주체다. ‘국민투표실행본부’에 택배비 포함 2만원만 내면 누구나 조립식 투표소 한 세트를 받을 수 있다. 참치캔박스보다 아주 약간 큰 박스 하나에 신기하게도 조립식 기표소와 조립식 투표함, 일련번호가 새겨진 투표용지 200장, 대국민홍보물 200매, 국민투표 공고포스터 3장, 투표인명부, 기표설명서, 안내 매뉴얼 등이 예쁘게 들어가 있다. 친구와 둘이서도 운영 가능하다.

사무실에 설치해도 되고 거리로 나서도 된다. 투표 마감인 11월 12일 자정까지 가능한 시간대, 가능한 공간에서 설치 운영하면 된다. 전태일 열사 기일인 11월 13일 개표와 발표를 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더 많은 국민들의 참여 기회 보장을 위해 1차 연장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개표 방식과 발표 방식은 추후 공지 예정이다. 1차로 끝낼지, 2차로 연장할지도 전체 사회의 중지를 모아 결정한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로 국민투표 운동의 힘도 함께 모아지길 소망한다.

<1만 개의 투표소>는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줄 수도 있다. 현재 <1만 개의 투표소, 이어달리기>가 시작되고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해 2015년 늦가을에서 초겨울사이에 이만한 인생의 선물이 따로 있을까. 조현철 신부님은 세 분의 수녀님께 조립식 투표함을 선물해 주셨다. 일산 세월호 추모 행사장에 국민투표소를 설치한 오현주 씨는 아이쿱생협을 하는 친구와 바보주막을 하는 지인에게 투표함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이제 곧 노동자가 되어야 할 학생들에게 노동인권을 가르치는 계기로 삼겠다고 김서중 교수님은 제자들 다섯 분에게 다섯 세트의 투표함을 선물해주셨다. 동화작가 김해원 선생은 함께 책을 만들던 편집자께, 그리고 사진작가 노순택 님이 사진갤러리 류가헌에 국민투표함을 선물해주었다. 1만인의 지킴이가 나서서 1만 개의 투표소를 만드는 일. 어쩌면 나는 이것이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 앞에서 수없이 가슴 무너져야 했던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을 한번쯤은 확인하는 그런 역사의 기준점을 우리 스스로가 함께 세워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점심시간마다 회사 앞에 나와 샐러리맨들의 점심투표소를 진행하는 이들이 있다. 현장에 나가보면 고등학생들이 제일 먼저, 많이 투표에 참여한다. 그들 역시 고등학생이기 전에 ‘알바 노동자’들이었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비정규노동자로 두고 살고 있는 흙수저 인생들이기 십상이었다. ‘최저임금 1만 원’에 꼭꼭 볼펜 뚜껑을 누른다.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참여가 더 많다.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이들이, 아직은 꿈이 많이 남아 있는 이들의 참여가 많은 것을 본다. 이 세상의 정치는 이제 이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도 투표로만 노동법 개악을 막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회혁명은 가두에서 먼저 시작되고, 그 광장과 거리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굴절되는 과정이 ‘선거’, ‘투표’라는 절차와 형식이기도 했음을 조금은 안다. 하물며 이 투표만으로 국가라는 정당성(?)과 공권력이라는 물리력을 앞세워 ‘쿠데타’를 꿈꾸는 이 정권의 잔인함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대재앙 앞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무어라도 긴급히 해야 한다는 한 가지는 안다.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진도 앞 바다의 세월호를 우리는 구할 수 없었지만, 지금 침몰 위기에 놓인 한국사회호는 구할 수 있다. 정기국회 개악 전까지 아직 골든타임도 남아 있다. 누구를 위한 거창한 윤리적인 행동도 아니다. 나의 현재와 미래를 내가 지키는 일이다. 나와 내 가족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1만 개의 국민투표소>는 그냥 캠페인이 아니다. 작지만 소중한 가두 투쟁이고, 거리의 정치실천이다. 우리끼리가 아닌 2000만 미조직노동자들과 만나가는 연대의 소중한 발걸음이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메아리이며, 조금씩 커져가는 함성이다. 더 거대한 가두와 광장의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일상의 실천이며, 조직된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엄호하고 함께 힘을 북돋우며 어깨 걸고 나아가는 민주주의 전선이다. 우리들이 실제 ‘총파업’과 ‘민중총궐기’, 그리고 <1만 개의 국민투표소>로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노동법 개악저지를 막아낸다면 그것은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큰 승리가 될 것이며, 이후 사회운동에 여러 가능성들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모든 반민주 행보의 맨 중심에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놓고 있듯, 우리도 모든 실천의 현장에 <노동법 개악저지 국민투표소>를 함께 놓으면 어떨까. 11월 14일 10만 민중총궐기를 조직해 나가는 실천 사업으로 <1만 개의 국민투표소>를 전면화하면 어떨까. 노동법 개악 저지는 역사쿠데타 저지 전선과 함께 ‘또 하나의 전선’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내야 할 ‘우리 사회의 최전선’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전선에 서야 하는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여야 하지 않을까.

<글, 사진=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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