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돌이 바위에 붙으면 아들”
“작은 돌이 바위에 붙으면 아들”
  • 김승현 기자
  • 승인 2015.11.08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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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서울 그때를 아십니까?

 

세월에 따라 강산도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굳이 세월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빨리 변하고 있는 게 서울의 모습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빌딩들…. 아주 정신을 못차릴 정도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사방에선 고공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는 모습들 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속도가 빨라졌을까요? 그건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에요. 조선 왕조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서울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에요.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울을 매주 소개해볼까 해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오늘의 기반이 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더욱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죠. 옛 서울의 모습도 감상하고 변화하는 생활상도 느껴보세요.


 

1. 부암동의 부침바위
 

일제는 미신 타파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고유신앙이나 농촌의 공동체 문화와 결합된 재래 신앙을 억압 해체시켰다. 명목은 미신 타파였지만, 실제로는 전통신앙을 통해 민족의식을 갖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작은 돌이 이 바위의 오목한 곳에 붙으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2. 맹인 독경

당시에는 동네마다 무당집이나 점쟁이집이 한 두 집 있었다. 점쟁이는 장님이 많았는데, 남자 장님 점쟁이는 `판수`, 여자 장님 점쟁이는 `여복`이라 했다. 점쟁이는 주역을 이용해 점을 치기도 해 `주역선생`이라고도 불렀다.




 

3. 무당의 모습

귀신을 쫓을 때는 `옥추경`을 읽었다. 무당도 많았는데 여자 무당은 `만신`, 남자 무당은 `박수`라 했다. 이들은 점을 치고 굿을 해 생계를 꾸렸다. 굿은 `푸닥거리`라고도 했는데, 굿을 하는 날은 동네 남녀노소가 모두 구경해 마을잔치 같았다. 무당이 신이 나서 맨발로 작두 위에 올라서거나, 커다란 물동이 위에 올라가 한 바퀴 돌면 굿은 최고조에 달했다.

 


 

4. 신사참배 행렬
 

1925년 일제는 10년 공사 끝에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조선의 호국신전이라 할 무학대사를 모신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기고, 대신 일본의 건국 시조신이라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와 메이지천황의 두 신을 받들고자 신사를 건립한 것이다.




 

5. 조선신궁
 

지금의 남산식물원, 서울과학교육원, 안중근의사기념관, 백범동상이 세워진 일대가 모두 조선신궁의 경내였다. 총독부 건물의 4배에 이르는 대규모 신사였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조선인까지 조선신궁 강제 참배에 동원, 조선인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려고 했다.




 

6. 동인지 <폐허>와 <백조> 창간호 표지
 

3·1만세운동 이후 새로운 문학활동이 일어나 <창조><폐허><백조> 등의 동인지가 발간됐다. 이 때 문학 활동은 식민지의 현실로 말미암아 민족적 울분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자연주의·낭만주의 경향으로 흘렀다. 그 외에 취미 잡지인 <별건곤>이 1926년에 개벽사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6-1. 잡지 <별건곤> 창간호의 표지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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