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우리도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 송경동 시인
  • 승인 2015.11.15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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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0년의 싸움, 40일 훌쩍 넘긴 단식’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 / 송경동 시인

 

1991년 겨울이었다고 한다. 퇴근 후 인천 갈산역 앞 맥줏집에서 한잔하고 혼자 살던 동료의 자취방에서 잠을 청했다. 단잠에 취한 새벽녘, 눈을 떠보니 한 무리의 사내들이 허름한 자취방 문을 뜯고 들어왔다. 까닭도 알 수 없었다. 난투극을 벌였지만 역부족, 사내들은 신발과 혁대를 뺏고 눈을 가린 채 승용차에 태워 그를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어디쯤일까 가늠해 보려 했지만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가리개를 벗고 보니 지하 골방, 고문실이었다. 영화에서나 봄 직한 곳. 작은 재판정처럼 한쪽에 단이 있고, 약간 높은 그곳에 한 사내가 판관처럼 앉아 있었다. 말로만 듣던 안기부(현 국정원)의 안가였다.

▲ 콜트콜텍 1000인 선언 웹자보

합법적인 구속영장 같은 것을 요구한다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5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몽둥이로 구타를 일삼는 건 기본, 치욕스럽게 알몸으로 벗겨두곤 성기를 때리기도 했다. 당장 현재의 고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제 곧 실제가 되어 다가올 지도 모를 공포스러운 협박들이었다.

"너 여기서 살아서 나갈 거 같아? 너 같은 거 쥐도 새도 모르게 냉동탑차에 실어 저 바다에 빠뜨려 버리면 끝이야. 군부대 뒷산에 묻어버려도 되고…. 네 딸 이름이 민주라며? 1984년 4월 15일생. 4월 15일이 김일성 생일인데 거기 맞춰서 낳은 거 아니야?. 네 마누라도 데려올 수 있어."

그렇게 그의 존재는 무참하게 짓밟혔다.

"너 자본론 읽어봤어?"

"못 읽어 봤는데요."

"석탑에서 나온 노동법 읽어봤어?"

"못 읽어 봤는데요."

"그런데 너 같은 공돌이 새끼가 뭘 안다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이나 하지 노동운동 한다고 지랄이야. 위원장도 흔들리는데 네가 쇠고집이라면서. 너 같은 공돌이에게 쟤들이 '형님, 형님'하는 게 네가 좋아서 그러는지 알아? 이 바보야, 넌 속고 있어."

그들은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활동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술과 만두를 사주며 어르는 조도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불 게 없었다. 노동조합 교육선전부장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캐고자 하는 조직 활동에 가담한 적도 없고, 얻어들은 이야기도 없었다.

차라리 무엇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빨리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고 그 방을 나오고만 싶었다. 없는 사실이라도 끝내 도장을 찍고 인정하라 했다면 버틸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제임스 리'라고 당시 노동운동 내에서 악질적이기로 유명했던 노조파괴 전문가가 자신의 회사 노무 담당으로 왔을 때, 그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각목을 들고 설치던 일이 후회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마침 그 공장에 자신들이 찾고 있던 활동가가 들어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을 때 당연히 그일 거라고 찍었다.

그만큼인 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는 5일 만에 풀려나는 대신,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어야 했다. 그들은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어느 날 부평역 앞 집회장, 길 건너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내를 마주치기도 했다.

풀려나온 그는 자신이 다녀 온 곳을 말할 수 없었다. 동료들이 볼 때 '이해가 안 되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두 번 다시는 그곳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항상 미행당한다는 생각, 도청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편하게 만날 수도 없었고,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늘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말은 못하고 '또라이짓'을 몇 년 해야 했다.

"이제야 얘기를 하네. 쉬쉬하며 친한 사람 몇 사람에게 밖에 얘길 못했었어."

약 25년이 흘러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 어쩌면 그는 지난 25년 동안 자신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안기부 요원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함께 살아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고 한다. 어떤 활동이든, 사람 관계든 더 깊숙이 갖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게 그때의 공포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5일 동안 강제 구금당했던 게 아니라 25년 동안 고문당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노동조합 활동을 포기하고 정말 열심히 일이나 하며 살지 그랬냐고 하니, 양심상 그럴 수는 없었다고 한다. '양심?', 그것은 정말 뭘까.
 

또 다른 고문의 세월

▲ 김무성 처벌 촉구 법률가단체 기자회견

앞서 언급한 것은 인천 콜트 악기 노조 지회장 방종운씨의 이야기다.

당시 그의 나이가 서른셋. 지금은 머리가 허연 쉰여덟의 해고 노동자가 되어 근 10여 년을 거리에서 보내고 있다. 얼마 전엔 '잘 나가던 콜트·콜텍 악기 회사가 강성노조 때문에 문을 닫았다'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발언이 있었다. 이에 방씨는 허위사실 유포에 항의해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무기한 단식을 이어나가고 있다. 오늘로(11월 15일) 42일째다.

수많은 언론이 김무성 대표의 말을 받아 보도했는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과나 정정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콜트·콜텍 악기는 오늘도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와 중국 대련에 소재한 최첨단 생산공장으로부터 연간 100만 대에 육박하는 기타를 생산·수출하고'(콜트 악기 홈페이지 기업 소개란) 있다.

2012년 12월에는 한국지식경제부에서 선정하는 세계 일류 상품으로 콜트 기타가 선정되기도 했다. 주식상장도 하지 않은 1인 지배 회사인 콜트 악기의 박영호 사장은 '소문난 알부자'로 한국 부자 순위 120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해고의 근거로 사용했던 '경영상의 위기'는 전자기타를 생산하던 인천의 콜트, 통기타를 생산하던 대전의 콜텍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박영호 사장이 정리해고하려던 시점에 대전 콜텍 공장엔 노동조합조차 없었다.

인천 콜트악기에서는 당시 노조 집행부가 순순히 희망퇴직안에 도장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 부당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50여 명의 해고노동자가 10년째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박영호 사장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공장을 해외로 빼돌리고, 국내 노동자들을 부당해고하고 공장을 위장 폐업한 한국의 대표적인 먹튀 기업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집권여당의 대표가 나서서 콜트·콜텍이 강성노조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탄압이 필요하고, 그를 위한 노동법 개악이 필요하다고 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콜트·콜텍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도 안 해본 것이 없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분신을 시도한 조합원도 있었다. 국회가 건너보이는 양화대교 송전탑에 올라 고공 단식농성도 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 본사에 항의하러 들어갔다가 1시간도 안 돼 경찰특공대에 모두 끌려 나오기도 했다.

 

▲ 공연 모습

 

세계의 음악인들과 악기 판매상들에게 박영호 사장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미국·독일·일본 등 총 여섯 번의 해외원정 투쟁을 다녀오기도 했다. 만들 줄만 알지 칠 줄은 몰랐던 기타를 뒤늦게 배워 '콜밴'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돌아다니기도 한다.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해 다큐영화도 2편이 나왔고,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빈 공장을 갤러리로 꾸며 준 미술인들도 있었다. 홍대 앞 클럽 '빵'에서는 지난 7년여 동안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주고 있다. 생계가 힘들어 어떤 땐 수세미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여러 해 된장·고추장을 만들어 팔며 근근이 10여 년을 버텨 와야 했다. 눈물을 머금고 떠나가야 했던 '동료'들이 있었고, '가족'들이 있었다.

그간 진행해야 했던 민사·형사·행정소송 포함하면 법률 공방만 수십 건이었다. 내용상으로는 질 수 없는 재판들이었지만, 보수적인 법원은 자본의 편에 더 자주 섰다. 2012년 2월 23일 대법원에서는 같은 건인데도 콜텍에서는 부당해고였다는 고법 판결을 뒤집고 다시 사건을 고법으로 파기 환송시키기도 했다.

파기 환송심에서는 재판부가 지정한 회계 법인에서도 경영상의 위기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고법과 이어 열린 대법 재상고심에서는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에도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기가 막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 판례는 콜텍을 넘어 2000만 노동자들에게 앞으로 적용될 수 있기에 위험천만한 일이다.

콜트에서는 대법원의 부당해고 판결이 났음에도, 복직을 시키기는커녕 대법 판결이 나고 3개월도 안 돼 공장이 국내에 없다는 이유로 재해고를 해서 또다시 지난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의 법률 분쟁으로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고, 돈을 말리는 것 역시 이 사회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대표적인 탄압의 일환이다. 어쩔 수 없이 '법'에 의존도 해보지만, 결국 '법'은 가진 자들을 위한 튼실한 성벽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여의도 콜트콜텍 단식농성장에서 음악인들의 연대와 기금마련 바자회가 열리고 있다.
▲ 콜트콜텍 음악인 기자회견

 

"노동부에서도 해결하자고 하고, 인천 지역 선배들도 콜트라도 먼저 정리하라는 압박이 엄청났어. 대법원 판결나고 콜트 해고자들도 나이가 많다 보니 정리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 사실 힘들 때가 많았지.

하지만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콜트 정리하고 나면 콜텍 동지들 싸움이 더 힘들어질 거라는 걱정도 되고. 박영호 사장이 꼼수 부리느라 법인을 나눠 놔서 그렇지, 한 공장이잖아. 같이 싸워 왔는데 정리도 같이해야지. 그게 노동자들의 의리지. 또 우리가 그냥 돈 몇 푼 받고 끝내 봐요. 박영호 같은 사장들의 행태가 모두 정상적인 일이 될 거잖아. 다른 노동자들에게 그 피해가 갈 거고."

소처럼 우직하기만 한 방종운씨는 투쟁하는 동안 내내 여기저기서 온갖 구박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왕따' 같은 자리에 서야 하기도 했다. 고집은 있었지만 도대체 악함이 없는 그는 늘 함부로 여겨지고 공격당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가 뭐라 해도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양심'과 '의리'의 자리를 지켜왔다. '바보 아니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콜트·콜텍 공동행동의 틀을 깨지 않았다. 소처럼 뚜벅뚜벅 자신의 투쟁을 넘어 '연대'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꿈벅꿈벅 말도 잘 못 하는 사람이었지만, 누굴 만나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의 '진실'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가 조금씩 말라간다. 쉰여덟에 시작한 단식이라 과정에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단식 후 결과가 어떨지도 장담할 수 없다. 넌지시 '그만 중단하면 어떠냐' 하면 소년처럼 금세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괜찮아, 나 버틸 수 있어' 한다. 눈물이 난다.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투쟁이라도 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뼈아프다.

가족들에게는 조금 긴 수련회에 간다고 나왔다고 한다. 딸과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교 다닐 동안 등록금 한번 못 줘 본 아비의 심정을 아느냐고 한다. 자신이 해고된 후 줄곧 간병인으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져 온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아들도 딸도 비정규직으로 일한다고 한다. 어떤 물질적인 것도 책임져주지 못했지만 이 싸움 꼭 이겨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 아빠가 되고 싶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의 자리에 머릿수 하나라도 채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처음 만나던 7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콜트·콜텍 자료들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싸움이 이후 싸울 이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박근혜 정부, 노동법을 송두리째 개악하려는 박근혜 정부를 보며 자꾸 1991년 겨울 끌려갔던 안기부의 지하 안가 생각이 난다고 한다. 이 세상 전부를 그런 안가로 만들려고 하는 무서운 시도라고 한다. 막아야 한다고, 자신들의 새누리당사 앞 투쟁이 그런 사회적 투쟁에 하나의 송곳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 만화인들이 그려준 방종운 지회장

그런 착한 방종운을 보며 나는 자꾸 눈물이 난다.

방종운 선배가 쓰러지면 다음엔 자신이 나서겠다고, 단식하지 않아도 몇 년 새 자꾸만 말라가는 콜트 지회장 이인근을 보며 나는 자꾸 눈물이 난다.

30여 년을 기타만 만들었다는 임재춘 형을 보며, 가죽 공장에서 14년, 기타 공장에서 7년, 그리고 거리에서 9년 보냈더니 인생이 다 갔다는 김경봉 형을 보며 나는 자꾸 눈물이 난다. 그렇게 네 명이서 지켜가는 초라한 농성장이 나를 눈물 나게 한다.

어떻게 하면 김무성 대표를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민생 국회' 어쩌고 떠들기 전에, 자신의 공적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콜트·콜텍 노동자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하면 9년 동안 단 한 번의 교섭 자리에도 나오지 않는 박영호 사장을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김무성 대표의 발언은 아무런 여과 없이 오늘도 어제도 보도하고, 그 진실을 밝히고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단식과 요구에 대해서는 보도 한 줄 하지 않는 언론들이 조금은 형평성을 찾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법관들이 초등학교 산수만큼이나 쉬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옳게 내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윤리의식 정도라도 배울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자본가 1인의 천문학적인 재산권보다 천인·만인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간단한 법철학을 배우게 할 수 있을까.

15일, 공장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지 3211일째라고 한다. 단식 42일째라고 한다. 끝까지 가겠다고 한다.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싸우고 있는, 외롭게 말라가는 그들을 사람들이 함께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자주 못 와도 괜찮다고,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한 1만 개의 국민투표 사업에 최선을 다하는 게 자신을 위해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단식 45일째가 되는 11월 18일까지 1천인 연대선언을 받고 있으니 거기 내 이름만 올려달라고 한다. 무어라도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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