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뿌린 씨앗, 헛되지 않을 것”
“교황이 뿌린 씨앗, 헛되지 않을 것”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한상봉 기자
  • 승인 2015.11.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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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언론> 김인국 신부에게 길을 묻다

 

요즘은 한국사회를 ‘헬조선’이라고 한다. 청년층이 우리나라를 자조하며 일컫는 말이다. 지옥(Hell)과 조선(朝鮮)을 합성한 신조어로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란 뜻이다. 이 청년들은 무급 인턴, 비정규직, 취업난 등을 경험하면서, 사회에선 청년들을 88만원세대부터 시작해 민달팽이 세대, 삼포세대라고도 불린다. 이런 시대에 희망의 출구가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면서 청주교구 성모성심성당의 김인국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김인국 신부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교회가 홀로 전망 좋은 이층방에 안주하는 건 아닌지 염려했다.

 

 

-‘동정 없는 세상’이란 영화도 있지만 세상이 정말 인정머리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제 성경 본문이 부부들의 문제였어요. “너에게 꼭 알맞은 협력자를 주리라”는 거죠. 협력자란 거들짝, 신적 조력자, 하느님의 도우심을 드러내는 자일 텐데, 교회도 세상의 거들짝이겠죠.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자살 사망자가 7만 명이 넘었다네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은 숫자죠. 그렇다면 우리는 최근 5년 동안 어마어마한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 셈입니다. 이런 전쟁터에서 큰 사랑이 아니더라도 부부사랑만이라도 얼마나 절실하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국사회를 요즘 ‘헬조선’이라고 하는데, 이 마당에 나약한 사람을 지켜주는 일이 얼마나 절박한지 모릅니다.

주일 저녁에 성당 앞마당에서 젊은이들이 싸움을 벌였는데, 그걸 창문으로 내려다보는데 참 무섭더라고요. 이런 경미한 폭력사태에도 살이 떨리고 무서운데, 기업사회에서 저질러지는 폭력 역시 얼마나 무서운지요. 쌍용차 노동자들 스무 명 이상이 해고로 절망해 연달아 죽어나가기도 했잖아요. 정말 무서운 세상이죠. 최근에 노동시장 개악을 앞두고,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려고 한다면 뭐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교구에서도 마음은 없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요.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거죠. 결국 빈첸시오 활동이라도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긴급한 구호에도 응답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증진을 위한 노력이라고 했는데, 방법을 못 찾는 거죠. 교황께서 인간증진을 위해 교회가 더 밖으로 나가야 하고, 나가서 다치고 말썽을 부릴 수밖에 없다고 해도 교회에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지금 교회는 우리사회의 노동시장이 개악되는 것인지 개혁되는 것인지 분별하고 어느 쪽이든 편들어야 한다는 시험대에 올라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노사정 대타협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거대한 전환, 대혁명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돼요. 그렇지만 이미 너무 지쳐서 분노할 기력마저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답답한 상황입니다.

 

-교회가 이럴 때 희망의 근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 말했지만, 이층에서 창문 열고 폭력사태를 내려다보는 교회가 지금 교회의 모습이죠. 2층은 안전하거든요. 교회가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와야 되는 거죠. 내려와서 때리는 사람을 말리고 얻어맞는 사람을 좀 보호해줘야 하잖아요. 그래야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죠. 그런데 추기경조차도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요. 안 해봐서 그런 거죠. 그래서 늘 동네북이 되어버린 추기경은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이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복자품에 올리자는 이야기밖에 못 해요. 정말 다급한 것은 그게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은 패잔병이 되어서 전세를 역전시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각자도생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거죠. 이럴 때 교회가 조금만 움직여도 사람들은 ‘어, 저 것 봐라!’하면서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요.

옥천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성당 담벼락이 엄청 큰데, 거기에 초대형 세월호 현수막을 걸었어요. 우리는 더 울어야 합니다. 세월호 인양하라. 진실을 규명하라. 이런 문구를 새겨 벽화처럼 걸었던 거죠. 사람들은 교회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아요. 남들이 하지 못할 때 작은 일만 해도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어요. 교회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있고, 여러분 곁에 있다는 정도만 알려줘도 상처받은 사람들은 위로를 받아요. 군청에서 행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아무리 겁박해도 무시하면 그만이죠. 제가 성모성심성당으로 가면서, 옥천성당 새 신부님에게도 군청에서 압력을 넣었다는데, 그 신부님이 “전임 신부님이 붙인 걸 내가 왜 떼요. 내가 누구한테 원한 살 일 있어요”하면서 버티니 어쩌지 못했다고 해요. 교회의 약자 편들기는 이렇게 힘이 있어요.

 

-그래도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교회에서 별 생각 없이 교황의 요청이라고 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말을 채택하는 걸 보고 생각이 많아져요. 그럴 마음이 없는데 왜 그런 표현을 쓰냐는 거죠. 우리 교회는 현실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다고 말만 하는 부유한 교회잖아요. 아니면 가난한 자들을 ‘간혹’ 위하고 싶은 그러나 부유하고자 하는 교회잖아요. 교황께서 왜 교회더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라고 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해요. 그 사람들이 못나고 불쌍하고 딱해서 도와주라고 하는 걸까요? 아니죠. 그 사람들은 ‘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다 하면서 늘 찬밥만 먹는 사람들, 그러면서 여간해서는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이 하늘나라에서도 큰 대접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을 위하라는 말의 본뜻은 ‘우리가 그분들에게 지은 빚이 많으니 갚아라.’ 하는 뜻이죠.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교회가 되라는 말은 곧 크게 되라는 것입니다. 덕 보는 교회 말고 은혜를 갚는 교회가 되라는 것이죠. 물을 먹으면 물이 되어주고 옷을 입으면 옷이 되어주고 밥을 먹으면 밥이 되어주라는 거죠. 손을 벌려서 밥과 옷을 구걸하는 아주 쩨쩨한 교회가 되지 말라고 타이르는 말입니다. 그래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게 즐거운 과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김인국 신부가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가 되면서 이철수 화백이 이 판화를 선물했다.

 

 

-‘즐거운 가난’을 자발적으로 살라는 말로 들리네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닮으려고 하는 본성이 있어요. 그래서 각자도생이라는 아주 질긴 생존에 대한 욕구도 있지만, 우리가 평소 잊고 지내는 하느님을 닮고 싶은 선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 마음에 기대어 ‘복음의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최근에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쓴 <예수 마음 코칭>이란 책을 읽었는데,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어요. 이 말이 참 애매한 표현이었는데, 로핑크는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뒤로 미루는 것은 사람이라고 말하죠.

하느님 입장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서 “이 말이 ‘오늘’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저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는 비현실(非現實)이 되는 거죠. 어느 교우 할머니가 빨리 하느님께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하느님 나라 오케이, 그럼 지금…오늘 저녁” 하면, 그분은 “그러나 지금은 아니…내일”이라고 하죠. 그런 겁니다. 예수님이 “오늘 저녁입니다” 하면 “아니 그건 너무 빠르지, 내일” 하잖아요.

루카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데뷔강론을 하셨을 때 보인 청중들의 반응이 세 가지가 있어요. 처음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권위 있는 말씀이라며 놀라고 좋아해요. 그런데 두 번째 반응은 저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의심하죠. 마지막엔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서 죽이려 하죠. 이건 아마 예수님의 공생애 전 과정을 압축한 것 같아요. 로핑크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반기다가 쫓아내었는지 묻고는, ‘그건 오늘의 문제’라고 답하죠. 만일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가 ‘오늘’이 아니라 나중에 이뤄질 거라고 말씀하셨다면 사람들도 그다지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라이트 나우(Right Now), 그게 문제죠.

 

-오늘 당장 복음대로 살라는 요청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 많았던 거네요.

▲그렇죠. 나부터 정말 복음이 기쁨을 주는지 의심스러우니까요.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삶이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도 당장에 실행하라고 하면 당혹스럽죠. 그래서 자꾸 미루는 거죠. 하느님 나라가 좋긴 좋지만 방금 전에 밭도 샀는데, 결혼한 지 며칠 안 되었는데 하면서 자꾸 미루는 거죠. 거기에 재앙의 뿌리가 있어요. 나는 내 사제 직무가 정말 기쁜가? 질문할 때도 있었어요.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하면서 어줍잖게 대표가 되었는데 할 일이 태산입니다. 주일에는 본당사제로서 강론 준비도 해야 하고요. 대부분 무거운 것들이어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사제직이 재미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고민이 늘어나죠. 누가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힘들게 하지 않고 즐거워서 하는 혁명이 진짜라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복음대로 살면 기쁜가, 의심하는 것은 기쁨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은 밀양이든 강정이든 현장미사에 참여하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많아졌는데, 이분들도 아마 현장에서 자기 직무가 주는 기쁨이 뭔지 체험하신 것 같아요.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시청에서 대규모 시국미사가 있었죠. 입장 행렬에 참여한 사제만 200여 명이 되었는데, 이 당시 사제는 성당에 있을 때보다 거리에 있을 때 그 영광이 더 크구나, 하는 경험들을 한 것 같아요. 그게 지금까지 길거리미사로 확산된 거죠. 물론 예수님이 언제 성전에 살았냐 거리에서 살았지, 라고 말해 주신 강우일 주교님 덕도 있었지만, 이제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현장에서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 희망이 생깁니다. 좋은 것을 먹어 본 사람은 굳이 나쁜 음식을 찾지 않는 것처럼, 사제생활이 길어지면서 골프채를 흔드는 것보다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재미있고 보람을 느끼게 할 때가 많아요. 아무리 복음에 비쳐 봐도 의미가 있고요.

 

▲ 예수는 늘 길 위에 있었다. 그렇게 현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새롭게 복음을 각인시킨다. 

-거리미사야 말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본당미사를 봉헌하면서 신자들의 지루함을 만회하려고 강론 때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다가 문득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하지도 못하지만, 아무리 맘껏 말해도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사제들이 현장과 본당을 순환하면서 힘을 얻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야 사제생활에 활력이 생겨요. 시국미사에 몇 분이라도 신자들을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기쁨은 배가 되지요. 신자 분들이 현장에 다녀오면 완전히 변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순교자 성월에 성지 대신에 밀양이나 강정 같은 현장을 순례하자고 권해요.

교회가 순교역사를 기리는 이유는 선조들의 신원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교회가 겪은 그 시대의 야만을 체험하고, 고난의 희생양들을 기억하고 위로하자는 거죠.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옥천성당에 있을 때는 본당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신자들을 안산 분향소를 보내곤 했어요. 자연스레 단원고까지 다녀 온 신자들은 깜짝 놀라서 눈물 흘리며 돌아와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는 게 진심이라면 신자들을 자주 현장에 모시고 가야 해요. 한 번 간 사람은 두 번 가더라고요.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겠죠. 이게 회심입니다. 가난한 이들 위한 가난한 교회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바람이 있다면 전국의 모든 성당이 순교자 성월이 되면 성지를 찾아가는 그 정신으로 봉헌금도 들고 우리시대의 고난 받는 현장에 찾아가서 우리 대신 싸워주는 사람들과 더불어 기도하고 조금이라도 십시일반으로 보태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돌아오는 그런 순례운동이 전개되었으면 해요. 레지오 마리애에서도 회합 때마다 교본연구뿐 아니라 <복음의 기쁨>이나 <찬미받으소서> 같은 교황의 말씀을 읽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어요. 레지오는 군대잖아요. 레지오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 교회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교황은 엄청난 종자를 우리에게 주었어요. 교황은 책 두 권 내신 것만으로도 할 일 다 하셨다고 생각해요. 그 분이 뿌린 씨앗은 언젠가 반드시 발아를 하리라 믿어요. 저희 본당에 어느 할머니께서 늘 사방에 씨앗을 뿌리고 다니셨는데, 어느 순간에 곳곳에 개양귀비꽃도 수북이 피어나고, 채송화며 코스모스가 피더군요. 이미 뿌려진 씨앗은 당장은 아니라 해도,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허기지고 목마른 상태에서 교황의 말씀은 밥 같기도 하고 물 같기도 합니다.

요즘은 적어도 신부들 사이에서는 사제들이 왜 정치참여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교황께서 교회 안에 안주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하시니, 거리에서 시국미사를 하던 신부님들이 주눅들 이유도 없어진 거죠.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해서 교회에서도 ‘사회정의’가 중요한 사목적 이슈가 되었죠. 마지막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배짱이 두둑한 호연지기를 키우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가 내가 죄인인데 구원받고 싶다고 매달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고,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자기 몫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해요. 평신도들도 성당 안에서는 사목자의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모두가 사목자입니다. 외로워도 힘차게 괴로워도 기쁘게, 우리가 모두 교회라는 생각으로 일해야 합니다.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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