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촉촉, 까랑까랑, 해맑은 남자 김상진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야 한다.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거나 의식적으로 안 만나고 피하면 병이 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병이 설령 죽음에 이를 정도의 것은 아니라 해도,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의 사이사이를 가로막고 왜 안 만나니, 왜 만나, 하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이니 중병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는 첫눈이 내리기 전에 만나자고 했다. 아니 찾아오라고 했다. 자기가 나를 찾아와도 될 것을, 굳이 나더러 자기를 찾아오라고 한 것은 내가 자기보다 육칠 년쯤 후배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첫눈은 재빠르게도 내려 버렸다. 첫눈이 내려 버렸으니 나는 이제 그를 찾아가지 않아도 될까? 하는 바보 멍텅구리 같은 생각을 잠깐 했었다.

 

▲ 마당에서의 김상진 씨

 

나는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부도 아니고 어부도 아니다. 건설노동자도 아니고 소설가를 자임하기는 더더욱 민망하고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잡놈이라고나 할까? 아 그래, 나는 잡놈이다. 서울 등의 도시에 살 때 줄곧 잡놈이었고, 시골에 내려온 뒤에도 잡놈으로 살아 왔다. 도시에서는 삼십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서른 가지도 넘는 직업을 가졌다가 말았다가 했고, 시골에 내려온 뒤에는 날품팔이 농사와 갯벌 그리고 건설현장을 드나드는 한편 소설을 쓴답시고 바람도 심한 허공에 집 짓는 일을 계속 하고 있으니 잡놈 중에서도 아주 대책이 무망한 잡놈인 셈이다.

그런 잡놈의 눈으로 볼 때 순수한 농부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자본주의에 완전히 쩔어버린 농부야 물론 어려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이 찾아가서 만나고 농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지만,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석이라고 생각하며 들여다보는 사춘기 소녀 같은 영혼을 아직도 갖고 있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농부는 오늘날 찾아보기도 어렵지만 찾아냈다 해도 맨발로 찾아가서 직접 만나기는 정말로 어렵다.

그녀가 만일 내 곁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금년에도 그를 찾아가서 만나볼 용기를 못 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오늘 칠곡 가요? 갑시다, 아니면 내일 갈까?”하는 식으로 나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자기가 칠곡의 김상진씨를 언제 봤다고 저러나 싶으면서도 한편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내가 그토록 찾아간다, 찾아간다, 하면서도 못 찾아가는 김상진씨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내 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나를 은근히 힘들게 하는 그놈의 것을 해결해 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하루 그냥 무조건 전화를 해서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서고 보니 그 거리가 참으로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목을 조금만 길게 빼고 보면 김상진씨가 살고 있는 칠곡 마을이 보였다. 논두렁을 몇 개 지나고, 작은 개천에 걸린 다리 하나를 지나서, 다시 논두렁 몇 개를 지나면 바로 그곳이 칠곡이란 명패를 달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렇게도 가까운 곳을, 나는 십 년 가까이나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이제야 겨우 그것도 혼자서가 아닌 무슨 보호자처럼 그녀를 옆에 세우고서야 길을 나섰구나, 생각하니 내가 이게 참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소설 속 주인공인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내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리가 무슨 백 리도 아니고 십 리도 아니고 오 리나 겨우 될까 어쩔까밖에 안 되니 같은 동네라 해도 뭐 그리 큰 과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바닥이나 잔칫집 마당에서 우연히 얼굴을 마주치는 것 외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이런 사태를 대체 무슨 언어로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한단 말인가.

마침내 그를 찾아가서 만나고 있는 시간에도 나는 줄곧 그런 의문에 빠져 있었다. 그는 발렌타인21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양주병 하나를 친척이 가져온 것이라며 끄집어내더니 맥주잔에 가득 따라놓고 마시세, 마시세, 하고 있었다. 천진난만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의 그런 해맑음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울컥울컥 건드리는 바람에 나는 밖으로 나와서 담배연기를 있는 힘껏 몇 번이나 거푸거푸 빨아들여만 했다.

 

▲ 마을 시정에 쌓아놓은 콩다발

 

그래, 그에게는 그런 것이 있었다. 해맑음, 천진난만, 이 두 가지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이 칠십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서 해맑음과 천진난만을 발견하는 것은 무례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은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이라 이를 만했다. 왜냐하면 그가 군농민회장을 하고 있을 때 고창농민회는 전국에서도 강성으로 유명했으니까.

물은 바위를 뚫는다. 노자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내 가슴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이 나라의 농업정책을 얘기하는 그의 눈에서 이슬이 반짝였다. 이 나라의 농업정책을 반가워하는 일부 대농들의 행태를 얘기할 때 그의 입안에서는 뿌드득 소리가 났다. 발렌타인21은 삼십 분도 채 안 돼서 바닥을 드러냈다.

그날 그렇게 마신 술은 이틀 동안이나 내 속을 태웠다. 타는 가슴으로 그녀와 함께 영화 ‘맥베스’를 보기로 했다. 작은 영화관 동리시네마는 참 좋은 곳이었다. 서울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고창에서도 그날 그 시간에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영화 '맥베스'는 시종일관 장중한 음악으로 내 안의 무엇인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람 세상에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일단 저지르고 나면 사람은 바야흐로 미치광이가 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될 더 큰 일을 해치우며 큰소리를 치기는 하지만 내심은 고통스러운 자기모순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 그것이 사람이 가진 이른바 양심이라는 것이 아닐까.

“오 맥근혜여, 맥근혜여.”

영화가 끝나는 순간 그녀가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 또한 이 나라의 대통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의 통함이 이 정도구나, 생각하니 감개도 조금은 무량했다. 일어서야 할 시간이 됐지만 우리는 선뜻 일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우리의 대통령에게서 우리는 아마 맥베스 류의 그 어떤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그날 밤 잠결에 어떤 소리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거대한 무슨 날개의 움직임 소리 같기도 했다. 거대한 새의 거대한 날개가 하늘을 가른다면 바람 소리처럼 들릴까? 바람이 파도를 타듯이 흔들리면서 분다면 새의 날갯짓 같은 소리로 들릴까? 잠결인지 꿈결인지 알 수 없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푸른빛 하나가 어두운 방안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스나이퍼들이 주로 이용하는 저격용 총에서 나오는 표적줄 같기도 하고, 광선총 같기도 했다. 이게 뭐냐? 낯선 빛이 아닌데도 나는 순간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흔들어댔다. 아, 그렇구나. 컴퓨터였구나. 푸른 광선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희한하게도 김상진씨의 촉촉한 눈빛이 떠올라 왔다. 뒤를 이어 그 남자 특유의 까랑까랑 쟁쟁한 목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 사람이 없어 잊혀진 골대

 

“오매, 자네가 오늘 뭔 바람이 불었당가?”

“첫눈 내리기 전에 오라고 하셨는데, 첫눈은 이미 가 버렸고, 하여튼 뭐, 혼자는 무서워서 못 오겠고, 해서 이 사람과 동반 기습을 해 버렸습니다.”

“아이고 그려, 그려. 근디 이 양반이 제수씨? 와따 겁나게 젊고 미인이시네 그랴. 좌우당간 반갑소 잉?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이리 앉아요, 앉아.”

그는 촉촉한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또 보며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촉촉함과 까랑까랑함이 궁합도 좋게 잘도 동거하는 형국이었다. 그렇다고 두 눈이 항상 촉촉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두 개의 레이더를 장착하고 다닌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이 레이더는 때로 배고픈 호랑이의 눈빛을 연상케도 하고, 쥐를 노려보는 독사의 눈빛을 닮았다 싶기도 하지만, 날씨도 화창하고 기분도 낙낙할 때는 숲에서 태어나 꽃밭에서만 자란 소녀의 서정적인 호기심을 떠올리게도 한다. 옆구리 어딘가를 살살 간질이면 우리가 상상으로도 볼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림들을 시의 형식으로 술술 풀어내줄 것만 같기도 하고, 추임새만 제대로 넣어주면 인생사의 쓴맛 단맛 신맛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뭔가 마술 같은 서사를 한꺼번에 펼쳐보일 것만 같기도 하다.

촉촉함과 까랑까랑함을 동시에 자유자재하게 구사하는 그는 그렇게도 인정머리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날카로움과 순수한 서정은 얼핏 완전 반대의 개념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함께 있어야만 제대로 기능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나 할까. 눈물이 없는 이성은 얼핏 대의만을 생각하는 영웅처럼 보이지만 순식간에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속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 이른바 노동운동의 대부라는 사람들 상당수가 그런 길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다. 농민운동의 최전선에서 열렬한 투사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 중에도 역시 그런 사람은 많다.

“요즘 농민회 실정은 어떤가요? 지난 번 서울 집회는 어떻게?”

나로서는 괴로운 질문이었지만 일단 질러 보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농촌 상황이라든가 농민회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안 하고 그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술잔이 비면 술이나 따라주며 제수씨가 너무 젊다는 등의 가벼운 얘기만 꺼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김상진씨의 입장에서는 나의 그런 질문 자체가 일종의 기습인 셈이었다. 기습을 당한 그는 일단 고개부터 회회 내둘렀다. 고개를 흔드는 그의 눈이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다.

“우리 대통령이 편 가르기에는 아주 도사시더만. 내 편 네 편 그렇게 갈라놓고 내 편은 먹고살게 해주되 내 편 아닌 것들은 처절하게 짓밟아주마, 이런 것이란 말이제. 명색이 그래도 대통령인디, 대통령이 그러면 안 되는 것이제. 그러엄.”

 

▲ 새마을운동이 지나간 자리

 

젖은 눈을 차마 손등으로 닦지는 못하고 끔뻑끔뻑, 그렇게 눈을 깜박이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난 뒤에 그는 비분강개 투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백남기 농민이 서울 집회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그날 그 현장에 김상진씨도 원래는 참가할 계획이었단다. 그런데 너무도 뜻밖의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형제처럼 지내 왔던, 친구처럼 믿고 의지하며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연락해서 의논을 구하기도 했던, 오랜 동지들이 서울은 무슨 서울이냐, 데모는 무슨 데모냐 하는 그런 너무도 상식 밖의 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김상진씨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서울행 계획은 자동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논농사가 열닷 마지기밖에 안 되거든. 쌀농사를 포기하고 직불금을 받기로 하자면 포도시 전기료하고 보일러 기름값이나 될랑가? 한 마디로 말해서 굶어죽는다 이런 말이제. 반면에 논농사가 이백 마지기, 삼백 마지기씩 되는 사람은 말이시. 직불금이 수천만 원에 이른단 말이여. 사람 사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 훨씬 나은 수입이 돼버리는 거여.”

바로 그런 사람들, 직불금 수입만 수천만 원에 이르는 사람들이 농민운동을 비웃고 조롱하며 살아있는 동안 등 따시고 배 부르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등의 충고를 하는 바람에 그만 목구멍에서 피가 넘어올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그들도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대농 위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한 뒤로 그 정책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농지를 사들일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열렸다. 그리고 소농들은 차근차근 속속 몰락해 간다. 편 가르기에 능숙한, 편 가르기로 잇달아 재미를 보면서 아예 자신들의 정체성을 편 가르기로 정립해 버린 정권의 편 가르기 정책이 이제는 친구와 친척들의 사이까지 갈라놓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자본이란 본래 많은 쪽이 적은 쪽을 흡수하기 마련이었다. 적은 쪽은 한 번만 실패해도 망하지만 많은 쪽은 한두 번 정도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 뿐 실패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또한 정부가 실패하도록 방치하지도 않는다. 정부가 방치하는 대상은 많은 쪽이 아니라 적은 쪽 내지는 없는 놈들이다. 그러므로 없는 놈은 있는 놈에게 빌붙는 노예가 되거나 떠돌이가 되어야만 한다.

연치 칠십이 내일모레인 김상진씨가 촉촉한 눈빛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비분강개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노예라니, 사람을 노예의 길로 인도하는 정책을 정책이랍시고 내놓다니 이놈들아.

밖으로 나오니 해가 벌써 지고 있었다. 마을 광장 한쪽의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앞으로 고즈넉이 서 있는 낡은 농구 골대 하나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잘 살게 한다고 했지만, 시멘트와 슬레이트를 농민에게 강매해서 농민들은 빚쟁이로 만들고 도시에 재벌을 탄생시킨 것 이상의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새삼스런 의문 하나가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붙고 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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