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순이 다가왔다. 얼굴이 헬쓱해져서 인지 가뜩이나 큰 눈이 더욱 커져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경훈의 손을 잡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쳐다보고 있는 교도관들의 눈이 부담스러웠는 모양이다. 경훈은 쏟아지는 눈물을 다른 한 손으로 훔치며 남순과 나란히 걸었다.

아스팔트 길 옆으로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 위에 눈이라도 쌓여있다면…. 그렇다면 시골의 소나무 숲길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텐데. 가지런히 심어져있는 소나무 숲. 어른 키 두 배 만하게 일정한 크기로 자라난 고향 바닷길의 소나무들은 겨울이 되고 눈이 내리면 곧추 솟은 가지들을 저마다 축 늘어뜨린 채 그렇게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간지럽히곤 했다. 가끔 먹이를 찾아 헤매는 꿩이나 노루의 울음소리, 그리고 중국대륙의 찬 바닷바람에 실리는 파도 소리가 아니라면 숲 속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속의 그것 마냥 고요스럽기 그지 없었다.

푸드득, 하고 행인을 놀래키는 소리는 차마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솔잎 위의 눈들이 뭉태기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제 조금 더 지나면 이곳에도 그렇게 눈들이 쌓일 것이다.

남순이 입고 있던 남색 겉옷의 자그마한 깃을 곧추세웠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꽤 쌀쌀했다.

껑중하게 큰 키에 비해 지나치게 얇은 어깨가, 날씨 때문인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솔숲이 끝날 무렵 남순이 손을 이끌었다. 바로 옆 허름한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채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 길 쪽으로 나 있는 판자로 된 문 입구에 비닐로 된 간이 천막을 씌워놓았다.

남순은 잡고 있던 경훈의 손을 놓고 축 늘어진 비닐천막을 들 춘 다음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열었다. 낡아서 덜커덩거리며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은 미닫이문이 어느 순간 끼리릭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노인네. 얼굴이 온통 깊게 패인 주름으로 뒤덮여 초등학교 미술교과서의 판화에 나왔던 어느 노파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들어와…어여."

말소리는 고향에 있는 할머니의 그것과 닮아 있다. 남순이 앞장서 들어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두운 실내를 의식했음인지 노파가 갑자기 60촉 짜리 백열등을 켠 때문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허름했던 실내는 그럭저럭 앉아 있을만한 탁자와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무릎 높이 정도의 나무로 된 평상이 자신의 널직한 배 위에 온갖 과자며 먹거리들을 늘어놓은 채 실내의 3분의 2정도를 차지하고 드러누워 있다.

남순이 좁게 난 창문 쪽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깨진 유리창 위로 군데군데 시커먼 전기 테이프를 붙여 놓아 가게 안의 정경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창 틈새로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채 경훈이 자리에 앉기도 전 노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접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내왔다.

"김치하고 막걸리도 좀 줄까?"

남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구, 이제 이런데 오지 말어야지."

가게 한 편에 나있는 또 다른 출입구 쪽으로 사라지는 노파의 끌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남순이 탁자 한쪽에 놓여있는 나무 젓가락을 꺼내 경훈에게 건넸다.

"천천히 먹어."

"……"

젓가락을 받아들긴 했지만 차마 음식에 손길이 가진 않았다. 물론 배가 고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침을 먹긴 했으나 그것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었고 점심은 출옥 수속을 밟느라 아예 입도 대지 못한 상태였다.

때마침 막걸리와 김치 사발을 들고 나타난 노파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안 먹고 뭐하는 것이당가. 후딱 후딱 먹어야지. 그래야 다시는 이런 곳 안오는 것이여."

"……"

남순이 눈빛으로 노파의 말을 거들었다.

경훈은 마지못해 젓가락으로 두부의 한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렇지, 그렇지, 암…그래야지. 자, 막걸리도 한잔 허고. 그래야 목안에 낀 때가 벗겨지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니께."

노파가 누렇게 탈색이 된 사발 한 가득 소리나게 막걸리를 부었다.

"이제 요로코롬 예쁘장한 애인 속 그만 썩여."

애인? 남순의 입가에 싱긋하고 미소가 번지는 게 보였다. 경훈도 소리나지 않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왔을까. 하긴 감방에서 노파에 대한 얘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이곳에서 장사를 해온 노파는 이곳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죄수들에겐 대모와 같은 존재라는. 특히 이미 몇 차례 감옥을 들락날락해 별을 몇 개씩이나 단 전과자들에게 노파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세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그래서 그들은 출소 때가 되면 어김없이 이곳을 거쳐 세상 속으로 향하곤 했다.

그 노파였다.

쌀쌀한 날씨보다 더 싸늘한 막걸리의 찬 기운이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면서 경훈은 진저리를 쳐야 했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술이었다. 남순도 언젠가 처럼 조금씩 조금씩 마시던 술의 양을 점차 늘려가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불그스레한 기운이 번져나갔다.

바람에 덜커덩거리는 낡은 창문 소리만이 고요한 가게 안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뭔가 얘기를 꺼내야 했으나 침묵도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노파는 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가게 한 귀퉁이에 달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벌써 두 통째 막걸리가 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남순의 눈에 가는 실핏줄이 점차 선명하게 불거지는게 보였다.

"할머니는…?"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단 한마디도 나눌 수 없을 것 같아 건넨 첫마디.

하지만 다음순간 경훈은 자신의 질문에 대해 곧바로 후회해야 했다. 남순의 눈에서 왈칵, 하고 눈물이 터져나온 것이다.

"……"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경훈이 뒤를 돌아보며 노파가 나오지나 않을까 염려해야 할 정도로.

경훈은 곁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건넸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흐느꼈다.

"시골에 계속 있었더라면…."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저…."

"……"

"할머니랑 그렇게 살았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

그랬다.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었다. 돈이 없으면 학교를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고 먹을 게 없으면 굶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 개 같은 새끼들 만나서…."

새끼들? 경훈의 귀가 쫑긋해졌다.

"아직도 그 집에 있는 것이여?"

"……"

이번엔 거꾸로 남순이 침묵했다.

"아직도 그 집에 사는 것이냔 말이여?"

경훈의 목청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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