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의 여행스케치> 수원 화성

 

1997년 12월,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은 과학과 역사가 어우러진 걸작품으로 꼽힌다. 화성을 일컬어 ‘성곽의 꽃’이요, ‘건축의 백미’라 부르는 것은 이 성곽이 지닌 가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잘 단장된 성곽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유네스코는 수원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근대 초기의 군사건축으로 동서양의 과학을 통합해 발전시킨 건축물’이라고 극찬하였다.

 

▲ 7개의 수문이 설치된 화홍문(북수문)

정조대왕이 세운 계획도시

수원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은 팔달산(해발 143미터). 새롭게 복원된 수원성(화성)은 이 팔달산을 중심으로 5.7킬로미터에 걸쳐 있다. 하여 어디서나 접근이 쉽다. 수원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성곽길을 따라가다 보면 숱한 문화재가 나타나는데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는데 더없이 훌륭한 교육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사도제자. 이 사도제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해 사도제자(장헌세자)의 무덤(현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정조는 매년 1월, 혹은 2월마다 현륭원을 신하들과 함께 참배했다고 한다)이곳에다 새로운 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화성행궁(궁궐)을 새로 지었다. 오로지 군사적 목적으로만 쌓은 여느 성과는 달리 화성은 정치· 경제적 측면과 함께 효심을 더 중시했던 보기 드문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3년간에 걸쳐 축성된 화성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유형원의 치밀한 계획으로 이뤄졌다. 당시 30세였던 정약용은 왕실서고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서적을 섭렵, 성 축조에 활용했다고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정약용은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드는 거중기를 비롯해 유형거, 녹로 등의 기계를 이용해 노동력을 절감하고 공사 기간도 단축하였다. 그 내용은 공사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640여 장에 달하는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의궤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각종 공사 관련 문서, 지급 노임, 소요 자재의 이름과 수량이 기술되어 있다.

 

▲ 화성 성곽길 걷기

과학문명이 일궈낸 빛나는 문화유산

오밀조밀 이어진 성곽길은 철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시설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순례의 참뜻이 머리에 속속 들어온다. 시설물 하나하나에 깃든 정조의 효심과 애민사상, 개혁사상이 느껴지고 조선후기의 빛나는 과학문명과 실학정신을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다.

화성은 자연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쌓아 주변과 잘 조화를 이룬다. 성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와 장안문, 봉화대, 동장대, 그리고 광교산과 숙지산, 저 멀리로는 관악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독성산까지 바라보인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비록 일부가 파손되긴 했지만 그 후 꾸준한 노력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부 소실된 성곽도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대부분 축성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됐다.

 

▲ 군사들을 지휘하던 동장대, 화성 동쪽에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지금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특히 그 당시 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축성되었기 때문에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춰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하다. 다만 사치스러워 보일까 두려워한다. 미려한 아름다움은 적에게 위엄을 보여준다.”

1797년, 정조는 완공된 수원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 견고함이 엿보이는 팔달문

창룡문에서 시작하는 성곽 답사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3시간 정도 걸린다. 화성에는 4개의 성문(팔달문, 화서문, 장안문, 창룡문)을 비롯해 포루와 돈대, 노대, 수문, 암문, 적대, 치성, 공심돈, 봉돈, 장대 등 다양한 구조물들을 적절히 배치해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했다. 즉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추구한 성이다. 화성 답사의 출발점은 장안문이나 팔달문, 창룡문 등 성곽 어디서나 가능한데 이번 순례는 접근이 쉽고 넓은 주차장이 갖춰진 창룡문에서 시작한다. 창룡문은 화성의 동쪽 문으로 규모와 형식이 화성의 서쪽 문인 화서문과 거의 비슷하다. 구조는 안과 밖이 이중인 무지개문(일명 옹성)으로 구축돼 있다. 옹성은 성문에 접근한 적군을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문 앞에 한 겹 더 성문을 쌓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 화성의 동쪽 문인 창룡문
▲ 화성의 서쪽 문인 화서문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고풍스런 시설물

창룡문을 지나면 이내 포루(동일포루, 동포루 등)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봉돈(봉화대)이 눈길을 붙잡는다. 포루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쏘도록 되어 있으며 성 안을 이동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군사대기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6개의 포루가 있으며 그 역할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봉돈(봉화대)은 봉화를 올리는 통신시설이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빼내고 성벽보다 더 높게 다섯 개의 커다란 화두(굴뚝)를 두었다. 화성 봉돈은 현존하는 봉화 시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밤에는 불빛으로 급한 일을 연락했다고 하며 5개의 화두 중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과 접전 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려 비상사태를 전했다고 한다.

 

▲ 팔달산 정상에 지은 화성장대, 군사들을 지휘하던 장소다.
▲ 정조의 친필로 알려진 화성장대 현판

 

봉돈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길이 나오는데 왁자지껄한 시장통(지동시장)을 빠져나오면 우람한 모습의 팔달문(보물 제402호)이 반긴다. 화성의 남쪽, 장안문의 반대쪽에 있는 문으로 반듯하게 다듬은 커다란 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린 웅장한 축대 위에 날아갈 듯한 이층 지붕의 누각을 올려서 만들었다. 나지막한 단층 지붕들이 잇닿은 곳, 높은 석축 위에 세운 이층의 누각은 웅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팔달문을 둘러보고 계속 이어진 야트막한 성곽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면 수원 화성의 하이라이트인 서장대(화성장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장대는 동쪽의 동장대(연무대)와 함께 그 당시 군사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인 화산릉에 참배차 왔다가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했다고 전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누각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벽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뒤쪽에는 기와를 써서 조형미를 살렸다.

 

▲ 화성 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 장소로 쓰였던 서북각루

 

서장대에서 서북각루를 지나면 이내 화서문(보물 제403호)에 이른다. 화성의 서쪽 문으로 석축으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으며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달리 문의 전면에는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터진 모양으로 설치돼 있다. 문루 안에는 중앙에 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은 아담하고 우아한 멋을 풍기고 있다.

화서문을 둘러보면 화성 순례의 절반을 본 셈이다. 여기서 서북공심돈-북포루-북서적대를 지나면 위풍당당한 장수의 모습을 한 장안문이 보인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쪽 문으로 사실상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숭례문보다 크고 규모와 형태는 팔달문과 흡사하다. 장안문은 돌로 높이 쌓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한가운데 나 있는 옹성에는 구멍이 다섯 개 뚫린 일종의 물탱크를 설치하여 적이 성문에 불을 놓는 것을 대비했다.

화성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수원천)이 성안을 관통하고 있다. 개천의 북쪽 수문인 화홍문은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방화수류정)와 어우러져 멋스러운 경관을 보여준다. 화홍문(북수문)은 7개의 홍예문(무지개형 아치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누각을 올린 형태이다. 수문 위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두었으며 화홍문 좌우의 팔각기둥에는 해태상이 앉아 있다. 화홍문에서 올려다보는 한쪽 벽면은 벽돌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꾸며 색다른 느낌을 준다.

 

▲ 용연이 내려다보이는 방화수류정

화성을 돋보이게 하는 방화수류정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척제 이서구 선생이 상량문을 쓰고, 현판 글씨는 명필 송하 조윤형 선생이 썼다고 전한다. 정자 안쪽 내부 역시 잘 설계되어 북쪽에는 국왕과 군신들의 자리를 배치하고, 남쪽으로는 일반 사람들이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게 했다. 방화수류정에 올라서면 멀리 팔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용연(龍淵)이라는 아름다운 연못이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화성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 군사들이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피던 망루(동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을 지나면 군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던 팔작지붕 형태의 동장대(연무대)가 나타나고 이어서 화성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로 꼽히는 공심돈(空心墩)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무대는 210여 년 전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하였던 곳으로 이곳에서는 전통 의상을 입고 국궁(활쏘기)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돈(墩)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공격할 때 이용하는 망루나 초소 같은 곳이다. 성벽 위에 벽돌을 높이 쌓고 그 위에 누각을 세운 모습으로 안엔 나선형 계단이 설치돼 있다. 멀리서 보면 꼭 벌집통 같은 요새이다. 외벽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뚫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고, 건물 내부 한쪽에는 온돌방을 만들어 군사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푼 봉수당(화성행궁)
▲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 공연

화성행궁에서 열리는 다채로운 체험행사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성 안에 있는 행궁(사적 제478호)으로, 이곳은 임금이 지방을 순시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거처이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화성이 축성될 당시에 함께 지은 건물로,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머무르면서 앞날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이곳에는 총 33동 577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거의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복원을 마친 행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봉수당, 정조가 노후를 꿈꾸며 지은 노래당을 비롯해 장락당, 낙남헌, 복내당, 득중정, 유여택, 외정리소 등이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 보게 해준다. 화성행궁에서는 매일 광장 상설공연, 무예 24기 공연을 비롯해 주말체험으로 왕비 의상 입어보기, 궁중 한과 만들기, 다도, 떡메치기, 도자기 만들기 등을 진행한다. <수필가/ 여행작가>

 

♦화성 관람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관람 요금은 어른 1000원, 청소년 및 군인 700원, 어린이 500원을 받는다. 화성열차를 이용하면 좀더 편리하게 둘러볼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행한다.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www.swcf.or.kr) 참조.

 

♦찾아가는 길=경부고속도로 수원나들목-동수원사거리(직진)-중동사거리(우회전)-팔달문 로터리(직진)-종로 삼거리(유턴 후 직진)-화성행궁. 수원역 앞에서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 화성행궁 등으로 가는 시내버스(11, 13, 36, 39번)가 수시로 있다. 서울 잠실역에서 좌석버스 1007번을 타고 화성행궁 앞에서 하차. 화성 관광안내소에서 화성 안내 지도를 나눠준다. 서장대, 연무대, 창룡문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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