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었다. 첫 눈을 애달파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눈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저 하늘만을 쳐다 볼 뿐.

"빵구가 난 것이야."

"세상에 이런 조화가 어디 있댜?"

그나마 날씨라도 포근한 게 다행이었다. 하긴 그마저 눈 세례에 동조했다면 사람들은 아마 전부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윤을 반짝반짝하게 내놓은 다음 얼어 붙어버린 길 위에 굴러 자빠져, 하늘을 쳐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던 30대의 회사원도 점심시간이 되면 남산의 공원 한 귀퉁이, 눈이 유난하게 쌓인 김구선생 동상 곁에서 같은 직장의 여사원과 눈싸움을 하며 히히덕 거렸다.

그런데 채 그 해가 다가기 전 남쪽에서 들려온 희귀한 소식이 경훈의 귀를 쫑긋하게 했다. 바로 제주도의 한 지방 국도 변에 지천으로 핀 코스모스였다.

눈이 많이 내리긴 제주도도 마찬가지였다. 국도를 지나던 한 행인이 우연히 코스모스 꽃 사태를 발견했고, 갖고 있던 카메라에 담아 각 언론매체에 보내자 방송과 신문들은 서로 앞다투어 이를 1면 거리로 장식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채 제철이 되기 전 일찌감치 꽃을 틔운 코스모스 얘기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한 겨울에 코스모스라니. 한송이도 모자라 지천으로 핀.

경훈이 남산에 다시 돌아온 건 약 1개월 반 전이었다. 그러니까 남순과 만난 날로부터는 약 60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남순은 그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시골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나란한 솔숲사이로 스며들던 비릿한 파도향기에 코를 들이박고 싶었다. 어버버, 하는 벙어리 삼촌의 목소리가 그리웠고 그가 지피는 군불 속에서 익어가는 시커먼 군고구마 냄새가 벌써부터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남순과 헤어진 뒤 서울에서 하룻밤을 새운 그는 다음날 바로 고향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순이 겨울용 외투를 가져다 주었음에도 찬 기운이 어깨를 잔뜩 움추리게 하는 그런 날이었다. 차창 밖으로 촌락들이 스쳐지나고 있었다.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주먹만한 연시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가지를 붙들고 늘어져 있는, 애처로운 모습도 경훈에겐 환희였다.

'그래 세상은, 그래도 이렇듯 아름다운 것인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쓴웃음을 짓는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번 쓸쓸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고향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지 않고 일부러 10여 리를 걸어 들어가는 길 곳곳에 그 옛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산등성이 외딴 곳에 때때로 비어있는 집들도 눈에 띄였지만 그래도 아직 저녁밥을 짓느라 뻐끔 담배의 그것 마냥 연기를 내는 집들도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는 할머니는 삶에 찌든 주름투성이의 손으로 경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어이구 설 가드만 설애기 다되야 부렀네"를 연발했고, 벙어리 삼촌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예의 그 웃음을 얼굴 가득 함지박 만하게 지어 가지고는 빈 허공에 '어버버, 어버버' 탄성을 질러댔다.

저녁밥을 먹었고 군고구마의 향긋한 냄새도 맡았다. 그리고 솔숲 사이 가득 전해져 오는 파도 내음에 코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낙원.

며칠동안 그렇게 그곳에 머물며 그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고향의 풍미에 한껏 취했다.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쌓인 눈들은 내린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두 서너 개의 발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 방학이라 그런지 적막하리 만치 깨끗하고 조용했다. 탈색된 목조건물의 교실 앞 화단엔 석회로 만들어진 이름 모를 여인이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몇 년 전과 똑같이 책으로만 시선을 모은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경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돌이켜 볼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건, 그래서 인간은 행복의 동물이라고 누군가가 그랬다는데.

하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추억은 때로 행복보다 몇 십 배 아니, 몇 백 배 더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며칠 뒤 돌아온 서울 하늘 아래서 경훈은 다시 한번 그 고통의 무게에 대해서 실감해야 했다.

다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나마 남아있는 희망의 끈을 놓쳐버리기 싫은 마음의 오기였다. 내려간 고향에서 눌러 살까 하는 생각도 간절했지만 안될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절대 부려놓지 못할 무지막지한 무게의 짐짝처럼 얹혀진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순.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명령해야 했다. 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오로지 고통만이 남은 듯한 그곳의 한복판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하긴 이전과는 달리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다시 신문보급소를 찾았다. 소장은 몇 년 만에 돌아온 그에게 턱하니 한 구역을 담당하는 책임자 자리를 주었다. 그래봤자 신문배달을 하는 아이 두 세 명을 관리하고 나머지 시간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신문확장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신문배달을 할 때와는 꽤 차이가 나는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눈을 뜨는 시간은 새벽 3시. 보급소는 2층 짜리 허름한 건물의 윗층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우선 신문사 인쇄소로부터 날라져 온 신문덩이들을 올리는 일이었다. 100부씩 묶여져 있는 덩어리들은 그 무게만 해도 거의 30킬로는 족히 됐다. 추운 날씨였지만 근 한시간 이상을 부지런히 오르락 내리락 하며 신문을 나르다 보면 어느새 온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리고 나면 배달을 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걔들 중에는 보급소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이도 있었지만 반 이상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처지였다. 연령대도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 심지어는 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경훈은 자신이 맡은 구역에 할당된 신문을 우선 배분해 배달을 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각종 전단지 등을 삽입하는 작업을 했다. 그 일 역시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단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여러 건씩 폭주를 했는데 신문 하나하나 마다 그걸 전부 끼워 넣는다는 것은 보통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특히 처음 전단지 끼는 일을 할 때는 손이 익숙치 않아 다른 사람의 서너 배는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총무일 만 수십 년을 해온 다른 사람들은 신문을 넘기고 전단지를 끼워 넣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자동화된 로봇기계의 그것 마냥 손길을 놀려댔다.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며 부러워하기만 했던 경훈도 10여일이 지나자 슬슬 적응이 되어갔다. 선배 총무들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양을 맞춰갈 수 있는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게 있었다. 바로 신문 배달을 하는 아이들이 펑크를 내는 일이었다. 보통 한 아이가 하루에 배달하는 양은 적게는 150부에서 많게는 300부 정도까지 되었다. 물론 경훈 자신도 매일 200여부는 꼬박 배달을 해야 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가끔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자주 보급소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 몫까지 모두 경훈이 도맡아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경험이 있는 그였는지라 200여부 정도는 두 발로 뛰어다니며 해도 1시간 30분이면 큰 무리없이 해낼 수 있었지만 한꺼번에 500여부씩은 감당하기 힘든 양이었다. 처음 신문보급소를 나서며 뼈 속까지 스며들었던 추위는 시간이 지나면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500부의 무게를 생각해 특별히 보급소장이 하사해준 자전거도 한 겨울에는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 길이 미끄러운 탓이었다. 한시간 여를 돌다 보면 이미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기 일쑤였다. 입과 코에선 뜨거운 김이 나와 시야를 흐리게 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세시간여 동안의 배달이 끝나면 보급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했으며 다음엔 곧바로 다시 현장으로 나갔다. 현장이라 봤자 자신이 맡고 있는 지역을 도는 게 전부였지만 경훈에게는 꽤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일단 자신의 신문이 들어가지 않는 집을 골라 무턱대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판촉을 하는 게 주임무였는데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처음의 경험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재미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는 어느새 그 누구보다 뻔뻔스러워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문 한 부를 확장하기 위해 때로는 이삿짐센터 직원이 되기도 했고, 일일 청소부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으며, 보일러 수리공으로 변신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하긴 들리는 얘기로는 몸까지 바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경훈과 같은 보급소에서 벌써 4년째 일을 하고 있는 한 총무의 경우는 벌써 열댓 명의 유부녀 리스트를 갖고 지속적으로 육체를 '상납' 한다는 얘기도 자랑스럽게 떠들곤 했다.

하긴 결코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다. 일의 속성상 낮에 방문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또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 대하다보니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여자 편에서 유혹을 해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인데다 남들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총무라는 직업이 그걸 용이하게 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은 동네 유부녀들과 그런 염문을 흘리고 다니는 총무들 대부분이 탁월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월 보급소에서 정해주는 한 달 분의 임무를 초월해 월급은 물론이고 꽤 많은 수당을 챙기곤 했다.

그런 건 차치하고 육체적으론 그렇게 힘이 들면서도 경훈이 꽤 적응해 나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자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훈에게 할당된 한달 동안의 확장량은 40부. 하루에 1건 이상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마저 못하고 지나는 일도 많았지만 그런 경우는 다음에 두건 세건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을 도는 낮시간은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다방에 들어가 차를 한잔 마실 수도 있었고 피곤하면 목욕탕에 들러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물론 돈들일 일은 없었다. 들고 다니는 신문 한 부가 커피 값을 대신해주었고 또 목욕비로 사용되었다. 그건 경훈만이 그런게 아니고 이전부터 보급소 총무들 사이에 이어져 내려오다시피 한 관행이기도 했다. 입구에서 돈을 받는 목욕탕 김씨 아저씨도, 이제 막 마흔줄에 접어들었지만, 축 늘어진 뱃살을 자랑이라도 하듯 찰싹 달라붙은 겉옷 사이로 드러내놓고 있는 솔다방의 김마담도 굳이 내미는 신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특혜받은 직업. 물론 두 발과 입만을 이용해서 몇 백원 짜리 상품을 파는 지극히 저급한 영업 일이 실상이었지만 총무들은 대단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문보급소 총무가 아니라 신문사의 기자인 것 마냥 행세했다. 그리고 동네에서는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때론 어디서 났는지 신문기자증을 소지하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으스대기라도 하듯 그걸 경훈에게 보여주곤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차마 경훈은, 멀지 않은 날에 벌어질 끔찍한 일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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