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철희의 문화재 답사> 이매창묘-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이매창묘(李梅窓墓)
종 목: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명 칭:이매창묘 (李梅窓墓)
분 류: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1기
지정(등록)일:1983.08.24
소 재 지: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567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사유
관리자(관리단체):이계천
부안이 낳은 조선의 여류시인 ‘이매창’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閨秀)시인으로 허난설헌을 꼽는다면, 기생(妓生)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저서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근래에 송도의 진랑(眞娘: 황진이)과 부안의 계생(桂生: 매창)은 그 사조(詞藻)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평가했다.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현리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났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생 명부에 등록되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모친의 신분을 따르도록 한 규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볼 때 매창의 어머니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癸酉年)이어서 계생(癸生, 桂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그의 자는 천향(天香)이며, 호는 스스로 매창(梅窓)이라 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교산 허균(蛟山 許筠), 묵재 이귀(黙齋 李貴), 유천 한준겸(柳川 韓浚謙), 덕현 심광세(德顯 沈光世), 석주 권필(石洲 權鞸) 같은 문인과 문신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매창이 사귄 명사들
유희경
이들 중에 유희경은 매창의 정인으로 매창이 평생토록 가슴에 담고 산 사람이다. 신석정 시인은 유희경과 매창, 그리고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했다. 황진이, 서화담, 박연폭포를 일컫는 송도삼절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유희경(劉希慶, 1545~1936)은 도저히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천민출신이다. 그런 그가 대시인이자 조선 예학의 최고봉에 올라 그 당시 사대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청사에 그 이름을 길이 남겼다.
유희경은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하루도 떠나지 않고 시묘(侍墓)를 했다. 그리고 편모를 극진히 공양했다. 이러한 그의 효성이 당시 대학자였던 남언경(南彦經)의 눈에 띄어 그에게서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喪禮)에 정통했다. 왕궁은 물론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상(喪)의 집례(執禮)를 청하였을 정도다. 그는 또 사암 박순(思庵 朴淳)에게서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한시(漢詩)를 잘 지어 당대의 사대부들과 교유했다.
또한 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위항시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와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달려갔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위장소서원(衛將所書員)으로 왕비를 호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인하여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 계책을 제시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었다.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출론이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이 폐출의 소(疏)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거절하며 따르지 않았다. 인조가 즉위하자 그의 절의를 칭송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렸으며, 80세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계되었다. 저서로는 『촌은집(村隱集)』 3권과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매창과 유희경의 만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위항시인’으로서 유희경과 백대붕의 명성은 부안에도 알려진 듯하고, 아울러 한적한 시골 부안의 기생 매창의 명성도 한양에 잘 알려 진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나고 다음과 같은 시를 그의 『촌은집』에 남겼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曾聞南國癸娘名
글재주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詩韻歌詞動洛城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今日相看眞面目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却疑神女下三淸
<허경진 역>
매창과 유희경의 만남은 짧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떠났다. 짧은 만남이었기에 서로는 더 애틋해 했던듯하다. 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을 여러 편의 시와 노래를 지어 부르며 달랬음이 그가 지은 여러 편의 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의 한 편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전한다.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이 시조에 대하여 『가곡원류(歌曲源流)』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계랑은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시를 잘 지었으며, 『매창집』이 있다. 촌은 유희경의 애인이었는데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 소식이 없었으므로 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절개를 지켰다.“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娘家在浪州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我家住京口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相思不相見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腸斷梧桐雨
<허경진 역>
1610년 여름, 매창의 죽음을 전해들은 유희경은 아래의 시를 지어 슬픔을 달랬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의 아가씨/明眸皓齒翠眉娘
홀연히 구름 따라 간 곳이 묘연쿠나/忽然浮雲入鄕茫
꽃다운 혼 죽어 저승으로 돌아가/終是芳魂歸浿邑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誰將玉骨葬家鄕
마지막 저승길에 슬픔이 새로운데/更無旅櫬新交呂
쓰다 남은 장렴에 옛향기 그윽하다/只有粧瞼舊日香
정미년(丁未年)에 다행히도 서로 만나 즐겼건만/丁未年間行相遇
이제는 애달픈 눈물 옷만을 적셔주네/不勘哀淚混衣裳
<정비석 역>
위의 시문을 통해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가 첫 만남 15년 후인 정미년(丁未年, 1607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가슴 안에 간직한 사랑은 오직 유희경 뿐이었다. 유희경 또한 평생토록 매창을 사모하고 그리워했음을 위의 시문(詩文)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서로는 나이를 초월하여 시문으로 사귀고 정을 나누며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허균
허균(許筠 1569~1617)과 매창의 첫 만남은 1601년(선조34) 7월23일 이루어진다. 가부(駕部 사복시(司僕寺)) 낭관(郞官)으로 있던 허균은 그 해 6월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었다. 7월 8일 동작포(銅雀浦)를 건너 남행길에 오른 그는 23일 부안에 도착해 매창을 만난다. 그날의 기억을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8권 조관기행(漕官紀行)에 남겼다.
1601년 7월23일
부안(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옥여는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18권 조관기행(漕官紀行)>
허균은 여자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런 그는 공무수행 중에도 기생을 데리고 다니고, 기생과 잔 이야기를 버젓이 자기 문집에 남겨 놓기도 하였다. 허균의 이러한 행동들은 사헌부의 단골 탄핵감이 되었다.
그런 허균이 매창과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음에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고, 또, 10여년을 가깝게 사귀었음에도 남녀의 관계를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매창의 기예와 글재주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의 꼿꼿한 절개와 심오한 인생관을 사랑하여 정신적으로 교감하며 평생의 벗으로 사귀었던 것이다.
1608년 8월 공주목사직에서 파직 당한 허균은 예전부터 은둔하려고 눈여겨 보아두었던 부안 우반동 정사암에 와서 쉬게 된다. 매창이 있고, 친구인 심광세가 현감(1607년에 부안현감으로 부임)으로 있는 고을이었기에 그런 결심은 더 쉬웠을 것이다. 이 무렵에 매창은 허균, 심광세 등과 변산의 여러 곳을 유람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회 후 이들의 사귐은 더욱 깊어져 갔고, 그때 이미 병들어 있던 매창은 허균의 영향으로 참선을 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러나, 허균의 부안에 오래 머무르려했던 계획은 그해 12월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됨에 따라 무산되고 만다. 그 다음해(1609년) 2월 초하루에 유태감(劉太監)을 접대하기 위해 원접사(遠接使) 이공 상의(李公商毅)가 종사관(從事官)으로 허균을 천거해 2월 15일 이공을 따라 한양을 나섰다.
허균은 그해(1609년 6월)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1609년 9월)에 제수되는 등 공무가 바빠 부안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매창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한다. 매창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에 허균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야 풍류객 진회해(秦淮海 송(宋)의 진관(秦觀))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기유년(1609) 9월/『성소부부고』 제21권
부안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허균의 약속은 한 해를 또 넘긴다. 그러던 중 1610년 어느 여름 날,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는 시 두 편을 지어 슬픔을 달랜다.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妙句堪擒錦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淸歌解駐雲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竊藥去人群
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燈暗芙蓉帳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남았구려/香殘翡翠裙
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明年小桃發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誰過薜濤墳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라/凄絶班姬扇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悲涼卓女琴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飄花空積恨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衰蕙只傷心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蓬島雲無迹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滄溟月已沈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他年蘇小宅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해/殘柳不成陰
『성소부부고』 제2권
허균은 매창이 죽은 그해(1610년) 10월에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취소되고, 11월 1일 별시문과 대독관이 임명되었으나 조카들을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12월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된다. 이때(1611년 4월 23일)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지금은 26권만 전해 짐)을 완성했다. 1611년 11월에 귀양에서 풀린 허균은 그때서야 부안으로 다시 내려왔다. 매창이 없는 부안은 허전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이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대부터 서인 강경파로 활동하던 이귀(李貴, 1557~1633)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후광을 업고 인조반정의 최고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신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귀는 1599~1601년에 김제군수로 재임했는데, 이때 이웃고을의 기생 매창을 총애했던 듯하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조관기행’에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옥여는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준겸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동부승지를 맡아 중국 명(明)나라 도독을 도와 마초(馬草)와 병량 보급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경상도관찰사와 병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호조판서에 특진되었으며, 그 뒤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1613년(광해5)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인조의 장인이었던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자신의 딸이 인열왕후로 책봉되자 서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다.
매창과 한준겸의 만남은 한준겸이 1602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이루어진다. 한준겸이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시를 짓자 매창이 화답시를 짓기도 하고, 한준겸과 함께 김제 모악산 근처의 용안대를 유람하고 <용안대에 올라>를 지었다.
용안대에 올라/登龍安臺
이를 일러 장안의 으뜸가는 호걸이라네/云是長安一代豪
구름 깃발 닿은 곳에 물결도 고요해라/雲旗到處靜波濤
오늘 아침 임을 모셔 신선 얘기 듣노라니/今朝陪話神仙事
제비는 동풍 맞아 지는 해에 높이 떴네/燕子東風西日高
한준겸은 매창의 이 시가 아름답다 하여 목판에 새겨 객사(客舍)에 걸었다고 한다. 객사는 부안관아에 출장 온 관원들이 묵는 숙소로, 매창은 이곳에서 관원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접대했던 것이다. 한준겸도 시 한 수를 지어 매창에게 선물한다.
변산의 맑은 기운 호걸을 품었더니/邊山淑氣孕人豪
규수 천 년에 설도가 다시 있어라/閨秀千年有薛濤
시와 새로운 노래를 들으며 고즈넉한 밤 지내나니/聽書新詞淸夜永
복숭아꽃 가지 위에 둥근 달이 높아라/桃花枝上月輪高
“계생은 부안의 창녀다. 시에 능해 세상에 알려졌다〔癸生, 扶安娼女也. 以能詩鳴於世〕“
출전/한준겸 『柳川遺稿』 '가기 계생에게 주며(贈歌妓癸生)'
이 시는 그의 문집 『柳川遺稿』에 실려 있는데 매창을 설도(薛濤, 770~834)에 비유했다. 설도는 기생신분으로 시를 잘 지어 원진, 백거이, 두목 같은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은 당(唐)나라 최고의 여류시인을 가리킨다.
심광세
심광세(沈光世, 1577~162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예문관검열을 거쳐 설서(設書)의 직에 있을 때 헛된 소문을 믿는 세자 광해군을 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로 물러났다. 1604년 전적·감찰을 거쳤고 해운판관(海運判官)·부안현감 등을 지냈다. 1613년 교리(校理)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무고를 입고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다시 교리에 임명되었다.
허균의 친구이자 가까운 처족인 심광세는 1607년 2월 부안현감을 자청해 부임해 왔다. 5월에 심광세는 함열사군(咸悅使君) 권주(權澍)와 임피사군(臨陂使君) 송유조(宋裕祚), 부안 고을의 상사(上舍) 고홍달(高弘達), 그리고 그의 아우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사람이 변산의 어수대(御水臺)·화룡연(火龍淵)·직연(直淵)·진선대(眞仙臺)·월정대(月精臺)·주암(舟巖)·용암(龍巖) 등지를 유람하고 그의 문집 『휴옹집休翁集-유변산록遊邊山錄』에 기록을 남겼다. 혹자는 이때 매창이 동행하여 <어수대에 올라(登御水臺)>를 지었다고 하나, 위의 기록처럼 동행한 이들이 모두 다섯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창이 이들(심광세, 허균)과 변산을 유람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심광세는 전 년(1606), 즉 수운판관으로 재직하던 해 여름에도 변산을 유람하였다. 또, 1608년에는, 즉 허균이 아직 공주목사로 있을 때, 심광세는 매창, 조희일, 허균과 함께 백마강을 노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매창은 <부여 백마강에서 노닐며(遊扶餘白馬江)>를 지었다. 그해 가을(1608) 허균은 공주목사직에서 파직되자 곧바로 부안으로 내려왔다. 허균은 거주처인 정사암(靜思庵)을 새로 고쳐짓는 동안 변산 일대를 유람했던 듯하다. 이때 매창과 심광세가 동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때는 심광세가 아직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이므로 그럴 가능성은 크다. 따라서 매창의 변산 유람은 다 이 시기(1606~1608)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어수대에 올라(登御水臺)>와 <천층암에 올라(登天層菴)>, <월명암에 올라(登月明庵)>, <봄날을 원망하며(春怨)> 등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봄날을 원망하며(春怨)
뜨락에 봄이 깊어 새소리 들리기에/竹院春深鳥語多
눈물에 얼룩진 얼굴로 사창을 걷었네/殘粧含淚捲窓紗
거문고를 끌어다가 「상사곡」을 뜯고나자/瑤琴彈罷相思曲
동풍에 꽃이 지고 제비들만 비껴 나네/花落東風燕子斜
『매창집』
이 시에는 다(多)·사(紗)·사(斜)를 운(韻)으로 쓴 것이라든지, 춘(春)·장(粧)·누(淚)·창(窓)·금(琴)·탄(彈)·화(花)·락(落)·풍(風)자 등 매창이 즐겨 쓰던 글자가 가장 많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매창이 ‘뜨락[竹院]’이라고 표현한 곳은 바로 대숲으로 덮였던 부안현 관아에서 심광세와 자리를 함께하며 쓴 시로 보면 될 것 같다.
심광세는 매창의 <봄날을 원망하며(春怨)>에 차운하여 화답시 <차계랑운(次桂娘韻)>을 남겼다.
깊은 시름 꿈에서 깨는 경우 많은데/閒愁壓夢覺偏多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베개를 흥건히 적셨네/籹淚盈盈濕枕紗
땅에 가득 떨어진 꽃잎들, 봄빛도 지나가는데/滿地落花春色去
발 사이로 가랑비 내리고 향대에 꽂힌 향에서 연기가 비끼네/簾微雨篆煙斜
출전 : 심광세 『휴옹집』 ‘계랑의 시에 차운하며(次桂娘韻)'
심광세는 이 시의 뒤에 매창에 대해 말하기를 ‘부안의 시기다(扶安詩妓)’라는 주를 붙였다.
심광세가 모친의 상중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서울로 돌아가자, 매창은 자신이 모신 수령이었지만 친구와 같았던 심광세를 보내는 마음이 아팠던지 시 한 편을 짓는다.
봄바람에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東風一夜雨
버들과 매화가 다투어 피네/柳與梅爭春
이 좋은 날 차마 못할 짓은/對此最難堪
술잔을 앞에 두고 임과 이별하는 일이라네樽前惜別人
출전 : 『매창집』 ‘스스로 한스러워(自恨) 1‘
권필
권필(權鞸, 1569~1612)은 조선 중기 선조, 광해 때의 시인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았다. 강화부에 있을 때 명성을 듣고 몰려온 많은 유생들을 가르쳤고, 명나라 대문장가 고천준(顧天埈)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혀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광해군 치세 때 광해의 처사를 풍자, 비방하는 <궁류시 宮柳詩>를 짓는 등,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허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권필과 매창의 만남은 1609년 1월 권필(權韠)이 부안을 방문해 이루어진다. 그때 매창은 심광세, 권필 등과 함께 고홍달의 집을 방문하였고, 이때 매창은 <선유(仙遊) 3>을 지었다.
이때 권필은 매창에게 <여자 친구 천향에게 주며(贈天香女伴)>라는 시를 지어 선물했다.
선녀같은 자태가 풍진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仙姿不合在風塵
홀로 거문고 껴안고 늦은 봄을 원망하네/獨抱瑤琴怨暮春
줄이 끊어지면 애도 끊어지니/絃到斷時腸亦斷
세상에 소리 알아주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네/世間難得賞音人
『석주집石洲集』 권7
사대부들 거의는 매창을 기생妓生, 시기詩妓, 가기歌妓, 창녀倡女 등으로 표현했지만 권필은 여반(女伴, 여자친구)이라 표현했다. 매창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살구꽃이 질 무렵, 권필이 매창을 다시 찾아와 <무제(無題)>의 시를 써 주자 매창은 <봄날의 시름(春愁) 1>을 지어 화답했다.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
1610년 여름, 매창이 38세의 나이로 죽자 거문고와 함께 부안의 봉두메에 묻혔다. 그후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 불렀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인 1655년에 고을사람들이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웠다.
매창은 평생 수백 편의 시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고을 사람들이 외어 전하던 58편을 구해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매창집」을 엮어냈다. 당시의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후 세월이 지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지금도 매년 봄 이화우가 흩날릴 무렵이면 부안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한 시인은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건만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빈상(羅衫裳, 비단적삼)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는다.
'매창뜸' 전문 이 병 기
<‘부안21’ 발행인. 환경생태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