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오가 확인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윤간을 당한 남순은 의식을 잃고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에 발견되어서 병원에 실려간 것이었고 거기서 24시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 날 밤 사라져버렸다고 병원 사람들은 전해주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파출소가 있어서 혹시나 그곳에 들렀지만 그 이상은 어떤 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오를 정도로 기름난로를 지펴대고 있던 잎파리 세 개 짜리 견장을 단 경찰은 그저 하품으로 준오를 맞았을 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더 확인해야 할 내용도 없었다. 나머지는 뻔한 것이었다. 병원에서 빠져 나온 남순은 찢겨진 몸을 감싸안은 채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새웠고 고향행 버스에 몸을 실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고향은 그녀에겐 존재해선 안될 곳이었다. 살아져서는 결코 안될 삶. 탄생이란 짧은 두 음절의 단어는 동시에 죽음이었다. 어떤 다른 여지도 그 사이에 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창조되면서 그녀는 동시에 파괴되었다. 아주 잔혹하리만큼 철저하게. 고향은 비상구였다. 창조와 파괴를 이어주는, 탄생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하긴 외롭진 않았으리라. 끊일 듯 죄어오는 고통이 있었고, 숨쉬진 않았으나 자궁 가득 담겨져 아직 식지 않은 그녀의 체온을 고스란히 받는 아이가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렇게 죽음을 맞고 있었다.

준오가 봤던 것처럼, 버스 차창 밖으로 늦가을 생명이 다한 코스모스의 꽃씨처럼 눈이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찢어진 사지,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를 껴안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판 일정이 이틀 뒤로 다가왔다. 어찌됐든 그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황도 드러났다. 남은 건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판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끔껏 경찰에 의해, 언론에 의해 철저하리만큼 가려져 있던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준오는 밤새껏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소주 병이 하나둘 방구석에 쌓이고 있었으나 망할 놈의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기만 했다. 잠을 설쳐 본 일이 거의 없는 준오였는데, 알코올이 각성제 역할을 하는 것인지 요즘은 이런 날이 잦았다. 술 한잔을 마셨고 안주로 담배를 피워 물었고 잠시 방안을 서성거렸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새 창 밖이 밝아져 오는 걸 느끼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술기운인 모양이었다. 한번 터진 눈물보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는 통제가 되질 않았다. 나중에는 흐느끼는 소리까지 입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울자. 그래서 풀릴 수 있다면.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조금의 앙금이라도 털어 낼 수 있다면. 하지만 마음은 그럴수록 더욱 더 무거워져만 갔다. 강북대로변의 가로등이 조금씩 밝기를 덜해갈수록 세상은 점점 또렷하게 준오의 눈앞에 그 더러운 몸뚱아리를 내비치고 있었고 그럴수록 마음은 침울해지는 것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더러운 몸뚱아리에서 나오는 입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바람은 상쾌하게 느껴졌다.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론은 미궁속에 있었다. 미희한테 의논을 하는 것도 좀 그런 일이었다. 혼자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의 직업. 남순의 죽음을 접했고, 사건 소식을 들었고, 경훈을 만났고, 그러면서 한동안 잊었던 바로 자신의 직업. 그래 맞아. 기사를 이용하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간단한 일을 그저 복잡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일단은 데스크, 그러니까 사회부 캡과 의논을 하는 게 순서이리라. 지금 캡은 신문사에 나와 있을 것이었다. 오늘 조간신문이야 이미 마감이 된 상태인 게 뻔했다. 재판 때까지 남은 건 내일자 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에 모든 기사를 마감해서 넘겨야 하는 것이었다.

준오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 캡은 예상대로 사무실에 나와있었다. 아주 천연덕스럽게 준오의 전화를 받았다.

"이기자 나으리께서 왠일이셔!!"

"긴밀하게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왜 며칠동안 두문불출 하더니 드디어 특종이라도 건져 올린 게야?"

하지만 그의 얘기는 장난기가 다분한 것이었다.

"지금, 아니 열시까지는 나가겠습니다. 그때 말씀드리죠"

전화를 끊었지만 당장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약간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준오는 대충 씻는 듯 마는 듯 하고 옷을 걸쳤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한 컵 마시고는 집을 나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선지 사람들이 가끔 하나둘씩 총총 걸음을 하고는 갈 길을 재촉하고 있을 뿐 거리는 한산했다.

택시를 세웠다. 50대 중반은 돼보이는 운전사가 목적지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타라는 시늉을 한다.

위치를 얘기하자 백미러를 통해 힐끗 준오를 쳐다보는 눈길이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면회를 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경훈은 속주머니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다이어리를 꺼냈다. 다행히 일전에 몇 번 안면이 있던 교도관의 전화번호가 있다.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예, 뭐라구요?"

다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의 교도관은 면회시간이 될 때까지는 만날 수가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통사정을 하자 그래도 8시 30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도 자기 목을 내놓고 봐주는 것이라는 사족까지 붙여가면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시간은 아직 한시간 반이나 남아있었다.

삼십여분을 달렸을까, 택시는 유치장 앞에 도착했다. 어느 새 날은 훤하게 밝아 있다. 교도관 몇몇이 나와 유치장 정문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준오는 택시에서 내리기 전 속주머니를 한번 만지작거렸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경훈이 준오에게 건네줬던 고백서였다.

유치장 면회소는 다행히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유치장에 있는 것 치고는 꽤 깨끗해 보이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뽑아들었다. 입에 갖다 대자 뜨거운 김이 올라와 목구멍을 막았다. '컥' 하고 사래 걸린 것처럼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빈속에 술을 들이부은 탓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출렁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에서 커피가 쏟아졌다. 막 면회실의 조그만 창문을 열려던 아가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말없이 두루마기 휴지를 건넸다. 무언의 압력. 픽, 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요구대로 그는 순순히 휴지를 뜯어 몇 차례 바닥을 닦았다.

면회소안 나무 의자에 앉아 써야 할 기사의 내용에 몰두해 있는데 갑자기 훈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어느 틈엔가 아가씨가 기름난로에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시커먼 심지가 빠알갛게 달아오르고 있다.

준오는 문득 시간을 보았다. 어느새 여덟시를 넘어서고 있다. 준오는 아가씨에게 전화를 부탁할까 하다가 포기하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재발신을 눌렀다. 아까의 그 교도관이 전화를 받았다.

"아따 그 양반 성질 한번 뒤게 급하네…."

핀잔이 따랐지만 그는 못이기는 척 아가씨를 바꿔달라고 했다. 핸드폰을 내밀자 웬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아든 아가씨가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더니 이내 수긍을 했는지 안으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준오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잰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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