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폭설의 추억 결혼의 추억

 

“야 이거, 큰일났다. 괜히 간다고 그랬나?”

“아이 참, 그러게요.”

아침 여섯 시. 아직 날도 새지 않은 바깥은 흡사 백열전구를 수십억 개 정도 켜놓은 것처럼 환하다 못해 새하얗기만 하다. 그런데도 하늘은 아직 멀었다는 듯이 하얀 것들을 뭉텅이로 쏟아놓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 폭탄을 한참이나 보고 있던 우리는 낮은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간다고 했으니 택시만 움직여준다면 가긴 가야 하는데, 잉?”

“근데 택시도 바퀴 달린 것인데 움직일 수나 있을까-아?”

 

▲ 장화를 신고 눈속으로

 

택시가 움직인다 해도 위험이라는 문제는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꼭 가야만 하는가?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갈수만 있다면 꼭 가야 한다는 쪽으로 어제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설령 위험이 세 배, 네 배로 증가한다 해도 서른일곱 살 막내딸을 시집보내는 그녀의 아버지 즉 혼주께서는 간다고 할 것이었다.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렸던 그날이 마침내 왔는데 까짓 눈 따위가 내 걸음을 막을 것이냐 하는 마음일 터이었다.

아내도 없이 혼자서 키워낸 딸이었다. 그 딸이 자라서 객지생활을 하는데 결혼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없다는 둥의 발언으로 아버지 마음을 퍽도 쓰라리게 했다. 그런데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 왔는지 남자가 생겼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여자가 훨씬 나이 들어 보이고 남자는 이제 겨우 ‘고삘’이나 면했음직해 보이는 동안이었다. 딸은 아마 이 연하의 남자에게 필이라는 것이 확 꽂힌 모양이었다. 가는 세월이 아깝다는 투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하는 식으로 일을 밀어붙이더니 드디어 날까지 잡았다.

애물단지 같던 막내 딸내미를 ‘치우게’ 게 된 아버지는 마을 회관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오다가다 들렸다. 나 또한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피로연장을 이를테면 마지못해 간 셈이었다. 그날 마을회관 앞마당에 설치한 불판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 몇 잔을 들이키는 동안 나는 새로운 세계관 하나를 정립하고 말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결혼식장에도 참석을 해야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글쎄, 그것을 어쩌면 객기라고 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식은 아직 멀었는데 피로연을 먼저 한다. 그래서 사람이 제법 많이 왔다가 가는데, 그런데 결혼식장을 함께 간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결혼식장에 안 간다는 전제하에 미리서 하는 피로연 참석을 했을 터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딸내미 결혼식을 드디어 치르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가 혼자서 쓸쓸하게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란 이게 참, 아직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내가 상상하기에도 뭔가 참을 수가 없다는 마음이던 것이었다.

 

▲ 굴삭기로 눈을 치운다고 치워보지만...

 

내가 태어나서 미성년자 딱지를 떼어내고 어른 행세를 시작한 이후 결혼식장은 아마 열 번도 채 안가 봤을 것이다. 동생이나 아주 가까운 친척 등 도무지 빠져나갈 구실이 없을 때만 마지못해 참석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은 제법 다녔지만 결혼식장은 본인으로부터 얘기를 직접 듣고서도 가능한 한 회피할 구실을 찾아 동분서주해온 세월이었다. 뭐랄까. 장례식 현장은 상황이 분명하지만 결혼식 현장은 ‘결혼식’이라는 낱말 하나를 제외하면 분명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 거의 없다고나 할까.

장례식은 옛날 방식의 마당이 아닌 현대의 빌딩형 식장에서 하는 것이라도 삼삼오오 몰려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죽은 이의 과거 행적과 그의 사상 혹은 세계관 같은 것들을 낱낱이 끄집어내서 평가하는 등의 구체적인 그림이 있지만, 결혼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두가 안개 속의 풍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다 결혼 당사자는 물론이고 혼주와 친척, 친구 등등 현장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예외가 없이 시간에 쫓겨 허둥거려야만 한다.

결혼식의 이런 풍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까닭은 아마도 내가 결혼식과 장례식이 거의 동급의 축제로 인식되는 어린 시절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다. 내 어린 시절은 마을에서 누군가 죽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것은 곧 마을 전체의 축제였다. 죽은 이의 직계 가족들이야 언감생심 웃는 얼굴을 보일 수 없다 해도, 예정된 일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고 달려와서 돼지를 잡고 음식을 만들고 묫자리를 잡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멀리서 달려온 친구나 친척들의 얼굴에는 슬픔을 압도하는 웃음소리와 떠들썩함이 있었다.

장례식이 사흘 정도에서 끝나는 단거리 육상 같은 축제라면 결혼식은 장거리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장가도 준비하는 기간이 결코 짧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특히 여자의 시집인 경우는 짧게 잡아도 족히 한 달은 걸렸다. 밤이고 낮이고 틈만 나면 엄마들이 모여서 가마솥에 물엿을 만들고 그것을 접착제로 삼아 이런저런 온갖 과자를 만들어내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이 떨어지는 축제의 자리였다.

▲ 마을회관에서의 피로연

축제는 먹을 것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먹을 것 못지않게 신나는 이야기가 주렁주렁 도처에 열리기 마련이었다. 술을 담그고 콩나물에 숙주나물을 길러내는 한편 시부모 시누이 등등 시가에 혼수로 보낼 이불을 시치고 베개를 만들고 요강뚜껑 덮개를 고운 수를 놓아서 만드는 엄마들의 손길은 바쁘기 한이 없으면서도 입은 입대로 여기저기 아무데로나 마구 여행을 다니는데 이때 나오는 이야기가 요즘 말로 치자면 대개 십구금 딱지를 붙여야 마땅한 야하디야한 소재들이서 신부는 하루 종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쩔쩔매는데 그런 모든 장면들이 꼬맹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식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세월은 흐르고 시류는 변했으며 사람들의 마음도 디지털화 되었다. 아날로그 시절만 해도 누군가 결혼식 날짜가 잡히면 관광버스를 불러서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서울로 부산으로 혹은 대전으로 광주로 결혼관광을 다니며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즐기던 도중에 홀아비 홀어미가 문득 눈이 맞아 결혼을 하는 이변을 연출해 내기도 했지만,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부터는 관광버스마저 사라지고 혼주는 걸려오는 전화기에 대고 계좌번호를 불러주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날 피로연장에서 내가 목격한 것이 그것이었다. 혼주가 손님들의 술잔을 채우다 말고 전화 받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결혼식장은커녕 미리서 하는 피로연장에마저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혼주에게 전화를 해서 계좌번호를 묻고 있었고, 혼주는 그동안 자신의 계좌번호를 외우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에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내들고 계좌번호를 낭독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표정이 참으로 오묘했다. 형식상으로는 웃고 있는데 그 웃음이 글쎄, 민망과 쓸쓸함이 뚝뚝 떨어진다는 느낌이던 것이다.

그 느낌 그대로 옆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결혼식 날 관광버스 대절 안 하느냐고. 그러자 옆에 사람 왈 요새 관광버스 타고 결혼식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그 소리에 나는 엉뚱하게도 절망해 버렸다. 내가 세상 동향을 너무도 모르고 있구나 하는 허탈감 플러스 자본주의가 이렇게까지 인간의 낭만과 멋스러움을 앗아가 버렸구나 하는 상실감이 나를 맹렬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결심을 했다.

 

 

“결혼식장에 저도 가고 싶은데, 괜찮죠?”

“으잉? 에이 믓얼, 안 그래도 되는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혼주의 얼굴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고창에서 딸내미 결혼식장이 있는 광주까지는 느긋하게 달린다 해도 한 시간 남짓밖에 안 걸리거늘 함께 가겠다고 약속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현실이라니 이게 대체 어느 별에서 온 쓸쓸함이란 말인가. 내 옆의 그녀도 내 말을 듣고는 즉각 동의해 주었다. 그래요, 함께 가요.

그렇게 우리는 그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이틀 전부터 눈발이 뿌리더니 전날에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마저 엄청나서 쏟아지는 눈들이 이리저리 미친 듯이 나부꼈다. 어지간하면 내 차로 갈까 했지만 내 운전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나는 눈 위에서 운전하던 중 브레이크를 잡았다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경험을 한 뒤로 겨울철 운전은 되도록 안 한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기도 했다.

그 말을 혼주에게 했더니 혼주는 택시를 대절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지만, 결혼식 당일에는 아예 눈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택시도 바퀴로 굴러가는 기계인데 이런 눈 속을 달릴 수 있을까? 혼주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본즉 택시가 지금 출발했다고, 어렵지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한다고, 그리니까 택시가 지나가는 버스터미널 옆 큰 도로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마당에 쌓인 눈은 이미 발등을 채우고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구두를 벗어서 비닐봉지에 담고 장화를 신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장화를 구두로 갈아 신은 다음 광주의 식장을 다녀와서 다시 장화로 갈아 신고 돌아간다는 계획이었다. 집에서 버스터미널까지 일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택시기사께서 이런 길은 못 간다고 선언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마저 몇 번이나 속으로 하고 있었지만, 택시는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와 주었다.

 

▲ 고드름이 주렁주렁~

 

어쨌든 택시는 광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달리는 것이지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속도계는 이십으로 출발해서 육십까지 올랐다가 오십, 사십, 삼십으로 계속 떨어졌다. 버스도 어지간한 노선은 운행을 중단했을 정도로 대단한 폭설이었다. 트럭은 도처에서 멈췄다. 나름 다급한 용무로 길을 나선 승용차는 일단 멈췄다 하면 움직이지를 않아서 경찰관들이 뒤를 밀어준다.

“이를 어쩌나, 어쩌나.”

자기도 모르게,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혼주의 표정은 납덩어리 같았다. 결혼 당사자인 딸내미는 수시로 전화를 해서 상황을 묻고 있었다. 아빠 어디만치 왔어? 아빠 지금 어디야? 애가 마르다 못해 타버릴 지경인 혼주는 급기야 한 말씀 하신다.

“아 애비 없다고 우리 딸이 시집을 못 갈 것이냐. 오빠는 왔지야? 그럼 됐제 뭐. 오빠 손잡고 들어가라 잉?”

“아이 참 아빠, 뭔 소리야. 그런 법은 없어.”

“법이라는 것이 사람 편하자고 있는 것인디 왜 없겠냐. 꺽정 말아라.”

마침내 혼주는 껄껄 웃어 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을 어찌 웃음이라 할 것인가. 우리는 금붕어처럼 그저 뻥긋뻥긋 웃는 흉내나 내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 시간 일찍 출발했다는 점이었다. 평소와 같이 고창에서 광주까지 한 시간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면 어쨌을 것인가, 생각하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 고속도로를 화판으로 점묘화를 그린 듯 하다.
▲ 설국이 된 고속도로

 

택시 운전기사는 수시로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서 윈도브러시에 엉킨 눈덩어리를 털어내야 했다. 바람이 어찌나 심한지 눈발이 차창을 때리면서 부서지면 그대로 얼어붙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가시거리는 오십 미터도 안 되고 어떤 때는 오 미터 앞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때는 침묵이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무엇이든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요즘은 고창에도 눈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고창을 아예 설창이라고 불러야만 할 정도로 겨우내 볼 수 있는 게 눈뿐이었다. 눈이 어찌나 많이 쌓였는지 밤이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뚜두둑 아련하게 꿈속처럼 들리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치우는 게 일상이었고, 낮에는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에서 토끼몰이를 한다고 마을 뒷산이 온통 아우성으로 덮이곤 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택시는 어느새 고창을 빠져나와서 터널을 지나고 장성도 지나 광주 시가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택시 운전기사가 만일 경험이 일천한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새삼 택시 운전기사에게 감사를 드리며 예식장 마당으로 들어섰다.

예식장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눈뿐이었다. 굴삭기가 동원되어 주차장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고, 직원들은 저마다 손에 삽을 들고 예식장 입구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그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인제는 눈이 아니라 눈 할애비가 와도 안 무섭다.”

우리의 혼주께서는 갑자기 기운생동한 목소리를 내서 우리를 웃겨 주었다. 눈이 키를 넘게 쌓인다 해도 결혼한 딸내미와 사위가 옆에 있으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고 와하하, 너털웃음을 웃어내는 혼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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