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창 활터 ‘초파정’의 오늘

 

고창의 활터 ‘초파정’이 금년으로 개정 33주년을 맞이했다. 3이라는 숫자가 주역을 포함한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에서 상수로 대접받는 이유를 낱낱이 발췌하기로 하자면 아마도 인류사의 모든 과정을 훑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만나면 반가운 사람처럼 접하면 그냥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아지는 3이 두 개나 들어가 있는 해를 맞이하고 보니 이게 예사롭지가 않다. 뭐랄까. 오늘의 초파정을 있게 한 사람의 발자취를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더듬어보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아진다고나 할까.

 

▲ 너무 추워서 덜덜 떨리지만~

 

거센 파도를 가로질러서, 혹은 무시무시한 파도를 겁내지 않고 뛰어넘는다는 뜻이라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초파정의 탄생 배경을 생각하다 보면 뜻밖에도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고 개인은 자기 앞에 펼쳐지는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옳은가 등등 대단히 복잡하게 추상적인 문제를 만나게 된다.

토끼가 토끼 때문에 못 살겠다고 혈서를 쓰고 사라졌다거나 자살을 도모했다는 얘기는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사람은 사람 덕분에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기도 하는 반면 사람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이름도 남김없이 죽어가거나 이름만 겨우 남겨놓고 사라졌다는 얘기는 사람 세상의 역사에서 차고도 넘친다.

한국 역사에서 팔십 년대는 가치중립이란 이름의 잣대를 최대한 들이댄다 해도 불의한 시절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시절에 호가호위한 사람들이야 당연히 전두환 장군님을 읊조리며 일본 사람들이 신사를 참배하듯이 한다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팔십이란 단어만 접해도 치를 떠는 게 현실이다. 전두환 장군님을 읊조리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기회를 잡아서 가문을 화려하게 개비한 반면, 팔십이란 단어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횡액을 만나 꿈도 사랑도 미래도 다 잃어버렸다.

 

▲ 폭설 속의 초파정

 

그래서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한다는 말이 아마도 설득력을 갖는 것일 게다. 그런데 시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사람의 문제가 된다. 태평한 시대건 잔인한 시대건 그런 상황을 만든 주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현자는 권력자에게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도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치지만, 불의한 권력자는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듣기 좋은 아첨으로 자신의 심기를 즐겁게 해주는 간신배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팔십 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나라를 지키라고 피보다도 진한 세금을 들여 훈련시키고 월급 주고 밥 먹여 주고 총칼을 사 주었더니 바로 그 총칼을 무기로 권력을 탈취한 몇몇 군인들이 장관을 임명하고 국회의원을 임명하고 심지어는 예술가도 임명해서 그들로부터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등의 헌사와 충성 맹세를 받고 호탕하게 껄껄껄 웃어댄 세월이 팔십 년대라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바로 그 시절, 전두환 장군께서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며 국가를 보위한다는 명분의 기구를 만들어놓고 칼을 휘두르던 그 시절의 어느 하루 한 남자가 부산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지금은 스스로 일등 신문이라고 열심히 소문을 내고 있는, 당시에는 일등이고 뭐고 그런 구별 없이 그냥 신문이었던 유명 신문사에서 기자 일을 하는 중이던 그가 무슨 생각으로 취재를 그만두고 거리를 부랑자처럼 헤매고 있었는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드러난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는 그날 뭔가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뭔가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아마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그날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고 목적도 없었다. 어쩌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청년은 부산 시내를 그야말로 정처없이 헤매던 중에 활터를 발견했다. 발견하자마자 이것이다, 하는 듯이 성큼 들어가서 열심히 구경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예 활터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 단전에 힘을 주고 활을 당긴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활에 관심을 갖고 활터를 드나들기 시작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그 엄혹한 시기에 활을 배우기로 했고, 그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로 했던 것인지도 당연히 알려진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널리 전파하기는커녕 이름조차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놓지 않고 마치 장막의 뒤편으로 퇴장하는 배우처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것이 중요하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사라졌는데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잠시 어디에 가 있겠거니, 곧 돌아오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눈이나 가끔 끔뻑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서서히 잊어갔다. 잊는다는 의식도 무엇도 없이 그냥 잊어갔다.

그렇게 다 잊고 난 뒤에서야, 어느 날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그 남자를 생각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그때 그 사람을 생각해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형국이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갔다. 그 전설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 오늘날의 초파정이다. 때문에 초파정의 역사를 그 뿌리까지 제대로 온전히 아는 사람은 없다. 역사를 안다 해도 그 청년이 장막 뒤로 물러간 이후부터일 뿐이다. 심지어는 그의 막내 동생조차도 큰 형님의 발자취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글쎄 우리 큰성이 그렁게, 아유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그때는 내가 징허게도 철이 없었단 말이거든. 쬐께 철이 들라고 하니께 끝나버렸어. 나중에 머리 깎고 중이 됐다는 것까지는 아는디, 거기까지 밖에는 내가 기억을 못 헌당게.”

부산의 활터에서 열심히 활을 배운 그가 고향 고창으로 내려온 이유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려진 게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팔십 년대 당시에도 신문사 기자란 아무나 하고 싶다 해서 그냥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어쨌든 기자였던 그는 기자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어쩌면 기자질을 그만둔다는 생각도 없이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 다들 앉으실까요~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는 가을 추수가 끝난 뒤의 논바닥에서 활을 내기 시작했다. 논바닥에 방죽이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방죽을 가득 채운 물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물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방죽 건너편에 과녁을 세웠다. 가마떼기에 붉은 홍시처럼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서 방죽 건너편에 세워놓고 활시위를 당기는 그의 가슴에 울분이 가득 차 있었을까? 아니면 가을 하늘처럼 텅 비어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는 그때 이미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지만, 오늘날 공개된 여러 가지 자료나 보고서에 따르면 팔십 년대 당시의 기자는 취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부 관계자의 말을 열심히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시절이었다. 기자가 만일 취재를 하고자 한다면 죽음부터 각오를 해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취재를 했다 해도 그것을 사용할 방법이 없었다. 신문도 많고 방송도 많았지만 모두 막혀 있었다.

뭔가 생각이 좀 있는 기자라면 아마 답답했을 것이다. 자기 생각이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자라도 역시 답답하다는 느낌은 있었을 것이다. 활시위를 있는 힘껏 당겼다가 놓는다는 생각도 없이 탁 놓으면, 그러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렸을까? 피잉, 하는 소리를 뒤로 남기고 쏜살같이 날아가는 화살의 꽁무니를 부릅뜬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흐린 정신이 확 맑아지며 ‘지금의 여기 이런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보이곤 했을까?

 

▲ 전임 사두 이현국 씨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그랬던 셈이었다. 그는 활쏘기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보고 있었다. 주변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활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면 열심히 가르쳐주기는 했다. 활이란 무엇이냐, 어떻게 다루어야 잘하는 것이냐, 등등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성실하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기가 가르친 이른바 제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 데 신경을 쓰는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한낮에는 보이지도 않는 별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자기가 본 세상으로, 자기가 발견한 그 세상으로 떠났다. 그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막내 동생의 기억에 따르자면 아마도 속세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머리 깎고 중이 되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필경 도솔천 같은 데로나 갔을 터이었다. 어쩌면 큰 기자로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한 청년은 그렇게 자신의 이름조차도 숨기며 떠나갔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 활터 초파정이 남았다.

활터 초파정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일정한 주소지가 없었다. 원래 시작을 추수가 끝난 뒤의 논바닥에서 했던 것이고 보면 항상 그때그때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과녁을 세우고 사대를 설치해 왔다. 유리걸식, 아니 유랑생활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슬픔은 없었다. 비굴함도 없었다. 언제나 당당했다. 비바람에, 눈보라에, 거센 파도에 많은 것을 잃었지만 웃음만은 잃지 않았다.

웃음이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활터 초파정에 면면히 내려오는 가르침이 있다면 아마 그 정도일 것이다. 바로 그것, 웃음 속에서 작년에는 준공식도 열렸다. 삼십년을 넘게 유리걸식 해온 초파정이 마침내 말뚝을 박고 건물을 짓고 과녁도 반듯하게 반영구적으로 세우고 언제나 누구라도 쉽게 찾아올 수 있게끔, 편지를 보내고 싶으면 편지를 보내고 선물을 보내고 싶으면 선물을 보낼 수 있게끔 주소와 우편번호도 확실하게 정한 것이었다.

 

▲ 신임 사두 이정희 씨

 

그리고 삼십삼 주년, 정의 최고 관리자인 사두의 이취임식이 열렸다. 전임 사두 이현국씨는 초파정을 신축하는 등의 각종 ‘노가다’를 치러내느라 폭삭 늙어버렸다. 새로운 사두 이정희씨는 오늘의 초파정을 있게 한 삼심삼 년 전의 바로 그 청년과 여러 모로 닮았다. 무엇보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무릇 지도자라면 거짓말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는 유행이 도둑처럼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자기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감출 목적으로 거짓말을 동원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조합장을 한 번 더, 아니 두 번은 더 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어쩐 일인지 안 하고 농사일만 죽어라고 해대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곧잘 수군거리곤 한다. 내가 봐도 그 점이 이상하긴 했다. 크나 작으나 권력의 맛을 알고 나면 권력병 환자가 돼버리는 세상에서 그는 왜 조합장을 아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해봤으면서도 농사에만 전념하는가. 그래서 직설적으로 한 번 물어보았다. 돈이 없어서 안 한다는 전혀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돈이 없어서 안 한다? 이게 대체 뭔 소리냐. 일반적으로 조합장이란 돈 먹는 하마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데 돈이 없어서 안 한다. 안 하기로 했다. 아니 출마 자체를 포기하고 농사일에만 관심을 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걸 어찌 해석해야 하나?

“내가 어디 무슨 사람들 여럿 모인 데만 가면 음으로 양으로 술값 내라, 밥값 내라, 은근히 종용을 해대는디, 아이그, 징그럽더만. 그런 징그런 자리를 이 년씩이나 버티고 있었으니 나도 그러고 보면 어지간한 놈이제.”

어디를 가든 조합장이니까 봉투 하나쯤은 가져왔겠지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눈길이 너무너무 불편했다는 것이다. 조합장 임기 이 년을 채우고 나니 징그럽다는 느낌만 남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합장이고 뭐고 눈 딱 감고 농사만 죽어라 짓기로 했다는 사람 이정희씨. 이런 사람이 활터 초파정의 신임 사두가 되었으니 초파정의 사원들은 이제 열심히 파도를 뛰어넘는 일만 남았는가?

아, 이 대목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깊다. 그리고 넓다. 이런 광대무변의 것을 누가 감히 인위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나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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