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렀는데도 현관문 건너편의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13층 편집국으로 올라갔다. 초판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는 때문인지 동료들은 책상에 앉아 기사 작성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저만큼, 아직 40대 초반인데도 허연 머리를 하고 있는 캡이 준오를 발견했다.

"어이구, 정씨 나으리 나오셨구만이라우."

여전히 장난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그는 준오를 맞았다. 그 말 덕분에 몇몇 동료들이 인사를 건넸건만 준오는 들은 척 만 척 미팅실로 앞장서 들어갔다. 캡이 따라 들어왔다.

"오랜만에 왕림을 하셔 가지고 뭐 그리 바쁘당가요?"

원래 경기도가 고향인 캡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준오에게는 반은 이렇게 전라도 사투리를 쓰곤 했기에 그리 어색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장난스런 말투는 금새 쏘옥 들어가고 말았다.

준오의 심상치 않은 눈빛과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준오는 그랬다. 마치 인생을 절단 내버릴지도 모르는 대전쟁을 앞둔 전사의 그것 마냥 결연한 얼굴이었다. 물론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달라지는 캡의 얼굴 표정을 보며 조금이나마 기미를 눈치챘을 뿐.

무릎까지 간신히 오는 미팅 탁자 위에 갖고 있던 노란색 봉투를 내려놓았다.

"김경훈 사건 얘긴데요."

미처 김경훈을 떠올리지 못한 캡이 그가 누구냐는 듯, 그러면서도 진지한 표정은 풀지 않은 채, 눈을 치켜 떴다. 준오는 금새 깨달았다. 그게 자기의 실수라는 걸. 워낙 혼자서 그 일에 매달려 있다보니 다른 사람도 전부 알 것이라고 무심결에 던진 말이었다. 추가 설명이 필요했다.

"아…저번에 부모 살해사건 있잖아요. 그 범인…."

"맞아. 그래 그 부모를 죽인 아들 이름이 김경훈이었든가?"

"예."

준오는 대답을 하면서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경훈이 자신에게 써준 깨알같은 글씨체의 고백서, 그것이었다.

"그런데 왜…."

캡은 이미 다 끝난 사건을 가지고 왜 그러냐는 듯 약간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자기 무릎께로 끌어갔다.

"사건이 완전히 뒤집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섭니다. 일단 한번 읽어보세요."

"이게 뭐야?"

그러고 보니 캡은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 하나를 빠트린 채였다. 돋보기 안경.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알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금새 다시 들어와서는 담배를 피워 물고 서류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준오도 하던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데다 아침부터 빈속에 줄담배다 싶을 정도로 계속해 담배를 피워 댄 탓인지 속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맛이 갔군."

서류를 쳐다보면서도 캡은 준오의 헛구역질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점차 경직되어가는 표정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이거 전부 사실이야? 하는 표정을 해서는 준오를 쳐다보았다.

"그거 김경훈이가 쓴 거에요."

그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얘기는 자꾸 길어졌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일들을 어떻게 몇 마디 만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캡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런 개같은 놈들…' 그도 아마 준오처럼 이렇게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마음일 게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거의 일주일은 빨간 날이 계속되는 음력 새해연휴를 하루 앞둔 한겨울이었는데도 눈은 보이지 않았다. 신문보급소의 총무일도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돼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할당된 확장 건도 채우는데 별 문제가 없었고 무엇보다 일에 재미가 붙었다. 보급소장이 놀랄 정도였다.

집에 간다고 하자 그는 고기라도 몇 근 사가라고 하며 월급에 얼마간의 돈까지 얹어주었다. 기분이 한껏 좋았다. 사실 집에 가는 건 그가 며칠 전부터 많이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가보았자 뻔할 뻔자였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온 이후 단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남순이 그리웠다.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혹 다른 일이나 있는 건 아닌지….

그는 결단을 내렸고 조금 전에 신문보급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장어귀의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 두 근을 산 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집이 가까워오자 무슨 이유인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그만 소요가 이는 것이 느껴졌다. 몇 년만인가. 골목에 들어섰다. 경훈이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보았던 그 철제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검은색 페인트칠이 벗겨져 회색 속살이 드러난 것도 그때와 비슷했다. 골목엔 어느새 비에 젖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딘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경훈의 귀가 쫑긋해졌다. 경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목 저편에서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우산을 쓴 채 걸어오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무슨 얘긴가를 주고 받으며, 비를 맞고 서 있는 경훈을 힐끗 쳐다보더니 반대편으로 사라져갔다.

잘못 들었다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에 소리는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다. 경훈은 몇 차례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혹 사람들이 지나갔으나 그 사람들의 표정은 별다르지 않았고 다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몇 발자국을 더 옮겨 대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무렵 이번엔 아까보다 더 또렷하고 큰 소리의 비명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오르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대문, 그러니까 자신의 집. 그건 분명 그곳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던 것이다.

걸음을 옮겨야 했다. 빨리 들어가 봐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바로 코앞이 대문인데.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면 현관문이 나올 것이고 스테인레스로 된 손잡이를 옆으로 틀어 열고 발을 밀어 넣으면 되는 것인데.

그런데 갑자기 경훈의 눈앞이 확하고 밝아졌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연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물체 하나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비틀대는.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아니 누군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집안에서 비치는 불빛 때문에 실루엣만이 드러나고 있었을 뿐. 실루엣이 다가왔다. 풀어헤쳐진 머리. 옷은 찢어져 이미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경훈의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설마….

그녀는 남순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누이 남순이었다. 그녀는 바로 어깨를 스칠 정도로 가까이 서 있는 경훈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발걸음을 뗐다. 풀려있는 눈. 무슨 말인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손을 들어 그녀의 찢어진 옷이라도 잡아야 했다. 하지만 온 몸은 얼어붙은 듯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어느새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소고기가 툭하고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경훈의 어깨가 움칠했다. 소리에 놀란 것이었다. 간신히 몇 발자국을 떼자 비릿한 냄새가 더욱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래도 한가닥 실낱같은 희망은 남겨두어야 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확인해야 했다. 어느새 부슬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어 있었다. 경훈은 떨리는 발길을 대문 안으로 들여놓았다. 발바닥에 질퍽한 물기가 느껴졌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