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그는 나의 선배다. 한두 해 선배가 아니다. 대선배라 해도 좋을 만큼의 선배다. 제대론 된 기억인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서당을 다니던 시절 그가 논어니 맹자를 읽을 때 나는 아마 하늘천 따지 천자문이나 겨우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너무 까마득한 선배라서 얼굴을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내 나이가 조금 더 차서 사춘기가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선배와 나는 서로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만남 비슷한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 추억을 환기시켜주는 방앗간

 

그런 선배가 지난 설 연휴 때 나를 찾아오셨다. “야 이놈아, 네가 나를 안 찾으니 내가 너한테 세배 왔다”고 했다. 명분은 뭐 그랬다. 하지만 나도 알 것은 안다. 명절이라고 고향을 왔지만, 하루 지나고 나니 심심해져 버렸다. 그래서 해리면 어디에 살고 있다는 수복이를 생각해내고, 찾으면 찾고 못 찾으면 말지 뭐 하는 심사로 길을 나섰다. 그걸 내가 왜 모르랴.

나이 차가 많은데도 그 선배와 나는 서로간에 잊을 수 없는 각별한 추억을 쌓아놓고 있었다. 하긴 그래서 굳이 나를 찾아볼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하마터면 감옥을 갈 뻔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는 그 시절의 대마초 사건은 지금도 우리의 기억을 전설처럼 채색하고 있었다.

선배가 군 입대를 앞두고 있을 즈음에 나는 미성년자 신분으로 룸살롱 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하루 발견한, 전봇대에 붙은 월수입 얼마 보장이라는 사기성 짙은 전단지를 발견하고 들어간 곳이었다. 월수입 얼마는 개뿔이나, 철부지 소년을 등쳐먹는 수작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두 달이 채 안 걸렸다. 그런 소굴을 탈출한 동기가 지금 생각하면 매우 드라마틱하게 극적이다.

어느 하루 기름독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번지르르한 사내녀석 하나가 혼자 들어와서 술을 마셨다. <아가씨>를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불러서 앉혀놓고, 오인조 벤드를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해가며 부어라 마셔라 불러라 하는데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됐는데도 일어설 줄을 몰랐다. 보다 못한 영업부장이 나섰다. 그 당시 룸살롱의 영업부장은 대개 칼 맞은 자국을 대여섯 개씩은 달고 다니는 주먹들이었다. 이 사람은 여간해서 자신의 진짜 신분을 노출하지 않지만, 저거 안 되겠다 싶으면 칼자국도 선명한 가슴이나 혹은 팔을 드러내놓고 들어가서 손님, 통금이 다 됐습니다, 하기 마련이었다.

 

▲ 향수

 

그렇게 해서 기름독에 빠졌다가 나온 손님이 빈털터리까지는 아니라 해도 ‘거지발싸개 같은 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짱도 좋지. 이게 감히 어딜 들어와서 <아가씨>를 셋씩이나 꿰차고 지랄이냐. 게다가 오인조 벤드를 한 시간도 넘게 괴롭히다니. 영업부장의 신호에 따라 비상이 걸렸다. 보이들은 서둘러 신속하게 문을 닫았고, 담당 웨이터와 영업부장은 기름독을 밀실로 데려가서 취조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자는 아주 유명한 신문사의 기자였다. 명함이 일단 그것을 증명했고,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놈이 돈 한푼 없이 룸살롱을 들어와? 뭐냐 너? 실연당했냐? 영업부장이 대충 짐작으로 그냥 던져본 질문 그대로였다.

자기는 세상에 태어나서 실패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고, 거절이라는 것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그날 거절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날이 자기 생일이고, 그래서 여자 친구가 아주 훌륭한 서비스를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그런데 건방진 여자 친구가 호텔 입구에서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래서 혼자 돈도 없이, 사실은 돈 같은 것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눈에 띈 아무 술집이나 들어오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통금 시간만 지나면, 술값 이까짓 것 순식간에 갚는다 이거야.”

기름독 기자는 큰소리를 쳤고, 영업부장은 신문사 당직 간부와 직접 통화를 하고 다시 기름독의 부친과 통화를 해서 술값은 문제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게 해서 비상은 해제되었다. 재수 없게 공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불안에 떨던 벤드 마스터와 <아가씨>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영업부장은 인근 파출소에 연락해서 경찰관을 대동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일은 웨이터와 보이들의 몫이었다. 잠을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잠을 자서는 안 되는 시간이었다. 신문사 간부든 기름독의 부친이든 술값을 들고 찾아오기 전까지는 웨이터고 보이고 <아가씨>고 모두가 깨어 있어야 했다. 기름독 기자는 다시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통금이 해제되는 시간까지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술이고 안주고 아낌없이 먹고 마시고 다하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뜻밖의 매상을 올리게 된 웨이터는 맥주와 양주를 있는 대로 끄집어냈고, 보이들은 주방에 들어가서 눈에 보이는 안주란 안주는 모조리 꺼내서 접시에 담아냈고, 벤드 마스터는 마이크 시험 중을 연발했고, <아가씨>들은 오빠오빠 사랑하는 오빠 어쩌고를 연발하는, 그야말로 부어라 마셔라 하는 심야의 환락이 시작되었다.

 

▲ 무서울 것이 없던 시절
▲ 우리는 이렇게 놀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기름독 기자는 화장실을 가야 한다면서 나를 지목했다. 그 이전에는 <아가씨>들 중에 한 명이 그의 화장실을 수행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를, 그것도 하필 나를 지목했다. 나는 몹시 불안해서 속으로 덜덜 떨었지만, 손님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너 이 새끼. 너 미성년자지? 확 집어넣어버릴까 보다 그냥.”

화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대뜸 그렇게 지껄이며 꿀밤 하나를 오지게 먹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웃어대면서 내 얼굴을 마치 씹어먹을 듯이 들여다보는데, 그 눈초리가 이상하게도 부드러웠다. 이게 대체 뭐냐. 어리둥절한 나는 벌벌 떨어대면서 눈이나 겨우 깜빡거리고 있는데, 기름독 기자는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들고 있었다. 꺼내든 그것을 일단 내 가슴속에 쑥 집어넣었다.

“이거 대마초거든. 너 한 번도 안 해봤지? 들키면 감옥갈 수도 있으니까 딴놈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고, 내가 널 특별히 생각해서 주는 거야 인마.”

그러면서 내 뺨따귀를 찰싹, 때려주는 것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어린놈이어서, 미성년자여서 대마초를 선물하기로 했다는 설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니까 그는 그날 여자 친구와 더불어 호텔방에서 대마초 파티를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자 친구의 돌연한 변심으로 그만 실의에 빠져서 룸살롱을 찾았고, 그 와중에도 미성년자가 눈에 보여서, 이걸 어떻게 할까, 신문에 기사를 크게 실어서 술집을 그냥 확 망하게 할까, 등등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다가 그만 다 포기하고 미성년자에게 세상 경험이나 제대로 한 번 시켜주자 하는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았다.

느닷없는 대마초를 손에 쥐게 된 나는 일언이 폐지하고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체험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게 뭔가. 이게 대체 뭔가.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긴 거야, 응? 망설이고, 고민하고, 번민하기를 며칠이나 하던 끝에 나는 가방을 싸기로 했다. 그리고 용산역에서 밤 열 시에 출발하는 비둘기호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꼬박 열한 시간이 걸리는 기차여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고향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 거북이는 알고 있을 거다.

 

친구들은 모두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투로 건들거리며 패싸움 같은 것에 신명을 바치기는 해도 대마초라는 건 이름이나 겨우 들어봤을 뿐 직접 피워보기는커녕 구경조차 해본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바야흐로 의기가 양양해졌고, 나한테 잘 보인 녀석들로만 몇 명 골라서 대마초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때 한 녀석이 말하기를 우리의 대선배께서 입영영장을 받았는데 입대일이 한 달도 채 안 남았다고, 그러니 송별식을 겸해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그러자 또 한 녀석이 말하기를, 대선배 송별식인데 여학생도 몇 명 섭외하자고 해서 그 또한 그러기로 했다.

고백을 하자면, 어리석은 나는 대마초라는 것이 담배와 유사한 무엇이라고 생각했었다. 담배를 처음 피우면 머릿속이 띵하면서 헛구역질도 나고 기분도 그리 썩 좋지는 않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어떤 지위에 올랐다는 느낌이 드는데 대마초는 그보다 한두 단계쯤 높은 성취감을 주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예정된 그날이 왔다. 입대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선배가 상석에 자리를 잡았고, 대마초라는 얘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여학생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와서 호호 소리를 연발하는 식으로 선배의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다. 우리는 그 무렵에 대유행이던 라면땅과 뽀빠이 같은 안주거리를 수북이 쌓아놓고, 소주와 막걸리를 교대로 몇 잔씩 들이킨 다음 마침내 짜잔, 하고 대마초를 개봉해서 나는 이만큼, 너도 이만큼 하는 식으로 공평하게 분배를 했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많으면 십 분, 짧으면 아마 오 분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거의 기억도 못하는 상태에서 일제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열한 살 무렵에 호박잎 마른 것을 종이에 말아서 담배라고 피웠고, 점차 발전해서 아버지의 담배를 몰래 꺼내다가 피워보는 식으로 담배라면 이제 알 것 다 알았다고 자부하는 녀석들이었지만, 글쎄 이게 뭐랄까, 대마초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자였다. 한 모금 빠는 순간 티디딕, 하고 뭔가 화약이 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목구멍이 찢어진다는 느낌이었다.

공통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누가 제일 먼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벌벌 기어 다니며 헛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여학생들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의 비명을 질러대는 까닭에 모두가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의문이다. 대마초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놈의 기름독 기자가 내게 준 것만 그렇게 이상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인지.

 

▲ 막바지 겨울풍경

 

어쨌든 대선배께서는 그 뒤로 나만 보면 대마초를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어대곤 했다. 십 년이 흐른 뒤에도 나만 보면 피식피식 웃어대었고, 이십 년이 흐른 뒤에도, 삼십 년이 흐른 뒤에도, 그리고 또 십 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역시 나만 보면 피식피식 웃어대는 방식으로 뭔가를 표현하곤 하는데, 그 뭔가란 것은 굳이 물어보고 말 것도 없이 “이런 한심한 놈, 그런 한심한 놈한테 당한 나는 사실 더 한심한 놈이지”하는 뭐 그런 것쯤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 또한 그렇게 피식피식 웃기나 하는 수밖에.

군대에서 제대한 선배는 한때 음악다방 디제이도 했고, 뮤지션을 갈망하기도 했지만, 결국 현실에 굴복해서 타일 붙이는 기술을 배웠다. 그 기술로 사막의 땅 사우디를 다녀오기도 했고, 거기서 번 돈으로 결혼도 했고, 그때의 결혼으로 아들이며 딸도 낳아서 대학을 보냈고, 그리고 지금은 그 아들이 낳은 아들 그러니까 손자의 대학 등록금을 버느라 지금도 여전히 타일을 붙이러 다닌다고 했다.

선배의 그 말을 듣고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뭐냐 이게. 나이 칠십이 낼 모래인 사람이 공사장 일을 나가는 것까지는 이해를 넘어 장하다고 칭찬이라도 하겠는데, 그런데 그 이유가 손자 교육비 때문이라고? 내 일도 아니건만 괜히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하고, 짜증도 나서 그만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쳐다보며 선배는 예의 피식피식하는 웃음을 웃어대고 있었다.

“대학을 보내놓으니까 이놈들이 취직을 못 하더라. 차라리 고등학교에서 끝냈으면 어쨌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그런 생각 백 번 해본들 뭐하냐. 이미 이렇게 돼버린 걸.”

“그럼 형님 손자의 애비 어미들은 뭐 해요?”

“글쎄 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하고, 하여튼 뭐든 한다고 하기는 모양인데 돈은 안 되는 모양이여. 이제는 나도 포기했다 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죽는 날까지, 해보는 데까지 해보는 것밖에는 뭐,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냐.”

선배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의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영화의 내용과 선배의 삶이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목 자체가 주는 울림이, 그 착잡한 정서가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하늘을 우울한 구름처럼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던 것이다.

만약에 선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아들한테 대신 하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질문이 입안을 떠돌고 있었지만, 참기로 했다. 그런 대결적인 질문은 세대간 갈등을 조장해서 정치적 이득을 보고자 하는 정부 당국자들에게 초라한 면죄부나 줄 수 있을 뿐 우리네 인생사 전반에 주는 이득은 하나도 없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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