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다리에 꽃 새기는 마음
문어 다리에 꽃 새기는 마음
  • 전라도닷컴 남인희 기자
  • 승인 2016.03.1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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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언론=전라도닷컴> ‘문어조’ 명인 황금주

 

‘제이오(第二吾)’. 옛 사람은 벗을 두고 ‘제2의 나’라 하였다.

그이에겐 평생 동고하고 평생 동락한 벗이 있으니 칼 두 자루.

바늘 실 골무 가위 자 인두 다리미 같은 ‘규중칠우(閨中七友)’ 대신 아버지는 딸에게 칼을 물려주었다. 그 중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구순 노옹의 칼은 야윈 그믐달처럼 속살이 휘었다. 쓰고 쓰고 갈고 갈면서 점점 소멸해 가는 칼날. 돌아보면 쉬임없이 칼을 허물어 온 것이 그이의 생애였다.

 

▲ 열 살 이래 평생 칼을 곁에 두고 살았다. ‘문어조(文魚條)’ 명인 황금주씨.

 

마음(心)에 칼날(刃) 올린 글자 ‘참을 인(忍)’

‘문어조(文魚條)’ 명인 황금주(60․광주시 무형문화재 ‘남도의례음식장’)씨는 열 살 이래 평생 칼을 곁에 두고 살았다.

‘마음(心)’에 ‘칼날(刃)’ 올린 글자가 ‘참을 인(忍)’자라던가.

남을 향한 칼날 대신 노상 스스로를 도려내는 ‘참을 인(忍)’ 자 하나를 품고 사노라니 가시밭길에도 능히 꽃을 피울 수 있구나 하였다.

칼과 더불어 시시때때로 만나온 것은 심해 속에서 건져 올린 문어. 글월 문(文)을 이름자에 올린 문어(文魚)는 ‘양반고기’라 하였다. 바다 깊은 곳에서 생활하는 습성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낮음을 기꺼이 지키며 사는 ‘수졸(守拙)’의 덕을 보았다. 게다가 글 읽는 이에게 없어서는 안될 먹물이 든 고기이니 관혼상제 대사에 차리는 큰상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 여겼다.

 

▲ 쓰고 쓰고 갈고 갈았다. 돌아보면 쉬임없이 칼을 허물어 온 것이 그이의 생애였다.

 

문어조는 마른 문어다리를 꽃 모양 잎 모양으로 아름답게 오려서 먹기 좋고 보기 좋게 만들어 큰상의 고임음식이나 잔치음식에 높이 괴는 것이다. <문어는 빗살처럼 어여(베어) 써러서 토막처 꼿도 만들고 란간도 만들고 꽃과 란간은 큰 어물 졉시에 꼭댁이(꼭대기)로 둘너놋나니>-《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용기, 영창서관, 1943)전통의 풍류음식 문어오림은 어물새김, 혹은 어화(魚花)라고도 불린다. 말 그대로 문어 다리에서 소담한 국화를, 함초롬 한 매화를 피워낸다. 숭얼숭얼 꽃봉오리 위로는 나비와 새가 난다. 그이의 섬세한 칼 끝에서 하늘하늘 깃털이 살아나 공작이 꼬리를 펴고 봉황이 날갯짓하고 원앙이 한 쌍이 다정하게 머리를 맞댄다. 칼 한 자루로 매난국죽을 오려 열두 달 계절을 담아낸 병풍을 만들기도 하였다. ‘신기(神技)’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손이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

 

 

▲ 납작하게 눌린 문어의 다리에 1mm 간격의 실낱 같은 칼집을 정교하게 넣어 국화꽃을 만들고 봉황새의 깃털을 오려낸다.

 

빨랫줄에 널어 둔 오징어 문어 지키던 어린 시절

▲ 바다밑 낮은 자리에서 낮음을 지키며 사는 ‘수졸(守拙)’의 덕을 가진 문어를 어루만져온 생애.

예전엔 어느 집안에서나 제사 때 밤 치고 오징어나 문어 오리는 것은 남정네들 몫이었다. 헌데 그의 할아버지 황득연(1884∼1959)은 ‘오림 솜씨’가 빼어나다고 입소문이 났더란다. 농사가 주업이었으나 여기저기 잔치나 제사에 불려가서 장식음식상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농사는 짓지 않고 오림만 할까봐 오림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아들 인효(1921∼1973)는 보고 배우는 재주가 특출하여 어깨 너머 훔친 솜씨로 폐백음식 전문점을 차렸다. 집안 대사에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다 부리고 싶은 사람들이 광주는 물론 가까운 담양 장성 화순 등지에서까지 찾아와 그의 집은 늘 북적거렸다.

당시 광주 양동시장 대인시장 구동시장에서 건어물 만지는 사람치고 그의 아버지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시제가 열리는 음력 3월과 10월이면 상인들이 ‘황인효씨가 오린 작품’ 가져가야 한다고 커다란 바구니를 얹은 ‘짐바리자전거’를 대놓고 기다렸다. 시내의 난다 긴다 하는 일류 요리사들한테는 그의 아버지에게 문어오림을 배우는 게 필수 과정이었다.

결혼식에 쓰이는 폐백요리는 날짜를 지키지 않으면 ‘원수’가 되는 일인지라 어머니 아버지가 밤을 새워 가며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덩달아 온 가족이 각자 자연스레 맡게 된 역할이 있었다. 4남1녀 중 딱 가운데, 고명딸인 그에게도 주어진 일이 있었다.

“아장아장 걸음마 하던 때였을 거예요. 문어나 오징어가 너무 축축하면 안되니까 빨랫줄에 널어 두죠. 그걸 개나 고양이가 물어가지 못하게 지킨다고 쳐다보고 앉아 있었지요.”

문어는 평소에는 작업장인 부엌에다 큰 구덩이를 파놓고 저장했다. 지금의 냉장고라 할 시설이었다. 한 마리씩 사는 사람들은 쌀독 같은 곳에 넣어 보관했다. ‘떡가로(떡가루) 속에 뭇어 눅넉여 칼노 오리라.’ 1800년대 말 《시의전서》에서도 문어 저장법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굴에서 꺼낸 문어는 빨랫줄에 널어 마치맞게 꾸득꾸득해지면 다듬이에 하얀 천을 깔고 나무망치로 두드려 반듯하게 편다.

 

열 살에 문어 오림칼 잡아

그이는 열 살이 되면서 문어 오림칼을 처음 잡았다. 아버지는 장식음식은 여성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명딸에게만 오림 기술을 가르쳤다.

맨 처음엔 자투리로 국화꽃 오리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 어깨 너머로 익힌 솜씨가 어찌나 야무졌던지 그는 한참 놀러 다닐 나이에도 맘대로 나가질 못했다. 친구들은 금주 아버지가 무서워서 “금주야 노올자~” 하고 부르질 못하고 대문 앞에 와서 휘파람을 불었다. 금주는 엉덩이가 들썩이는데 아버지는

“금주 못 나간다”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도, 휘파람 소리 나는 것은 모른 척하고 넌지시 허락을 해 주는 때도 있었다.

“인자 다리 운동 좀 하고 오니라.”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금주는 쌔앵 밖으로 튀어나갔다.

‘오공오 스웨터’(505사라 하는 털실로 짠 스웨터) 양 호주머니에 오리고 남은 문어 쪼가리를 빵빵하게 채워 나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세 끼 챙겨먹는 것만도 감지덕지, 주전부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귀한 문어 쪼가리를 동무들한테 내밀곤 하던 금주는 요즘 말로 ‘인기 짱’이었다.

어린 금주는 여름이 제일 좋았다. 결혼식이 없는 철이라 친구들과 맘대로 놀 수 있어서였다. 음력 3월, 10월이 제일 싫었다. 결혼철에다 집집이 시제 모시는 이즈음이면 온 식구들이 잠을 못 잤다. 그런 가업을 그가 이었다.

 

 

▲ 문어 다리를 아름답게 오려내 큰상에 풍류를 더하는 문어조.

아버지의 유산, 두 자루의 칼

그이가 열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는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칼들을 어루만지며 그리움을 달랬다.

잘 드는 칼에 식구들의 생계가 달린 집이었다. 송정리 대장간에서 만들어 온 칼을 그라인더에 민 다음 아주 미세한 숫돌에 하루를 갈아서 날을 곱고 예리하게 세우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칼 가는 기술이 작품을 결정한다.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2미터 문어를 통째로 제대로 오리려면 아홉시간이 꼬박 걸린다. 납작하게 눌린 문어 다리에 거의 1㎜ 간격으로 실낱 같은 칼집을 넣는다. 칼집 30여개에 한 송이씩, 둥글게 말린 국화꽃을 숭얼숭얼 피워낸다. 예전엔 작업대도 없이 그의 키보다 큰 문어를 안듯이 앞에 놓고 무릎 위에서 문어를 오렸다.

“움직일 수가 없어요. 자세를 바꾸면 애써 오린 꽃송이가 흐트러질까봐.”

고행에 다름 아니다. 그 사이에도 문어는 계속 말라가기 때문이다. 물을 축여가며 할 수도 없다. 어물은 물이 닿으면 뻐드러지거나 색이 변형되어 버린다. 마르면 부서지고 축축하면 늘어지므로 작업중엔 공기(중의 습도)가 바뀌지 않게 문도 뻥긋 하지 않으려 한다. 화장실을 갈 수 없으니 작품을 하기 전에는 물도 먹지 않는다. 저녁에 일을 시작하면 봉창문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부동의 자세로 쉬지 않고 작업을 해야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힘들어도 견딘 거죠.”

문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원래 여염집의 제사에서는 다산과 절개를 상징하는 국화꽃이나 학(장수), 소나무(지조)를 많이 만들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용이며 봉황(금슬, 고귀)을 오히려 많이 찾는다. 폐백용 닭(밝음, 대길)을 만드는 수요도 끊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인생의 대사에 올리는 음식이니 혼을 담아야 한다.”

“친정엄마 손이 백 번 들어가는 것이 폐백음식이다.”

그런 정성 없으면 하지 않아야 할 일이라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 축원을 담은 문어조 작품들과 현대적으로 만들어낸 오징어꽃바구니(오른쪽 아래).

값비싼 문어 대신 오징어로 대중화

▲ 큰아들의 결혼식, 문어조를 올려 장식한 폐백상.

대물림한 솜씨가 입소문이 나다 보니 결혼식에, 잔치상에 그의 문어 오림을 꼭 올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값 때문에 아쉽게 돌아서는 이들의 맘을 헤아려 그이의 집안에서는 60년대 후반부터 값비싼 문어 대신 오징어를 써 왔다.

몇 해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선연애)께서 양동시장을 가서 오징어를 사갖고 와서 “오징어가 싸니 이걸로 만들어 봅시다”고 제안을 하였다. 살림하는 여자들의 심정을 헤아리신 것이다.

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폐백풍습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폐백상. 도톰해서 오리기 좋고 모양도 제대로 나는 문어에 비해 오징어는 얇아서 두 겹으로 모양을 내야 하기도 하지만, 오징어한테는 오징어 저만의 덕이 있는 법. 부드러운데다 머리 몸통 귀 다리 저마다 다른 색을 잘 쓸 줄 알면 상차림이 훨씬 즐거워진다.

국화꽃 한 송이도 줄기는 다리로, 잎은 귀로, 꽃은 껍질 벗긴 살로 만들어 다채롭게 구성한다. 오징어를 오려 ‘동양화’를 만들기도 한다. 소나무에 학이 날아들고 매화가 흐드러진다. 국화꽃 위로 봉황이 내려앉는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는 노력으로 장미나 백합 포도송이와 포도잎 같은 새로운 작품들을 오려낸다. 오징어로 줄장미를 오려내 꽃바구니도 만들어 본다.

꽃밭을 만들며 그 꽃밭에 노닐 수 있는 이 일을 그이는 ‘지복(至福)’이라 여긴다. 그 복을 아들 조용영(39)씨가 이어간다고 자청하였으니 내심 고맙고 반가울 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사람들의 소망은 한결같은 것. 넉넉하게 오래오래 사랑하며 잘 살라고 밤 대추에 원앙이니 봉황으로 꾸민 큰상 두고 만복을 소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늘 기꺼워진다.

남의 삶에 복(福) 한 상 차려 내고 싶은 그 한 마음으로 정성껏 무늬를 오려 가는 삶. ‘참 단아한 칼잡이’인 그가 늘상 행복한 이유다.

글 남인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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