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아따 이것 참말로 환장하겠네 잉?”

금년에 새로 이장을 맡은 선배 한 분이 가슴을 탕탕 친다. 요즘 농촌은 이십 가구를 넘는 마을이 드물다. 그런데 그 양반 마을은 삼십 가구에 육박한다. 당장 우리 마을만 해도 과거에는 백 가구가 넘었다지만 지금은 열세 가구밖에 안 된다. 마을 인구가 열 명이건 백 명이건 농촌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게 없다. 과거에도 농사철이 되면 영농자금 문제로 동분서주했지만 지금도 역시 그렇다.

 

▲ 잘 정리된 밭고랑

 

영농자금은 대개 농협에서 빌린다. 농협의 주인은 농민이니 당연하다. 금리가 아주 낮은 것 역시 당연하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다가 비료도 사고 농약도 사고 심지어는 종자도 산다. 그리고 가을이면 수확을 해서 그 돈을 갚는다. 저축 같은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농민들은 매년 그렇게 농사를 지어 왔다. 론스타 같은 다국적 기업이 종자시장을 장악한 뒤로 종자 대금 때문에 더 많은 영농자금이 필요해지긴 했지만, 농협이 자신의 주인인 농민들을 돈 문제로 크게 자존심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금년에는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단다. 선배가 이장을 맡은 마을에 농협이 영농자금 대출 한도로 배정한 돈이 달랑 천칠백만 원이란다. 천칠백만 원을 삼십여 가구가 나눠서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으라는 것이다. 복잡한 계산 필요없이 그냥 대충 어림만 잡아도 한 가구에 육십 여만 원이 채 안 된다. 천칠백만 원은 두세 가구가 나눠 쓰면 그런대로 적당하다. 그런데 삼십여 가구가 나눠 써야 한다니, 이장으로서는 그저 기가 막혀서 환장할 따름인 것이다.

“이것이 가만 생각해보니께 담뱃값 느닷없이 왕창 올려버린 것하고 똑같은 수작인 것 같은디 말이여 잉? 안 그런가?”

의심은 의심을 낳기 마련이다. 상식선 이상의 담뱃값 인상은 농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무력감에 빠진 채로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담배를 새로 한 갑 살 때마다, 한 가치를 피울 때마다 절로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욕지거리는 어쩔 수가 없다. 욕지거리 뒤에는 온갖 의심이 양념으로 붙는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또 낳아서 급기야는 담뱃값 올린 돈으로 대통령이 그렇게도 자주 외국여행을 다니는 것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의심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영농자금이 대폭 줄어든 이유도 담뱃값 인상과 맥락이 비슷한 것 아니냐는 또 하나의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심 앞에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하면 내가 ‘나쁜놈’이 돼버리기 때문에 함부로 뭐라고 이견을 내놓을 수도 없다. 자산규모가 삼백 조원을 넘어서고, 중앙회장의 연봉이 팔 억여 원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농협중앙회의 정책결정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도 모르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말이다. 이럴 때는 그저 웃지요, 하는 수밖에 없긴 하지만, 아무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웃고나 있는 내 자신을 나는 좋아할 수가 없다.

 

▲ 눈보라에 얼어붙은 매화

 

슬프다. 나도 나를 좋아하지 못하는데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할까. 날씨마저도 나를 자꾸 밀어내는 것 같아서 더욱 슬프다. 그러고 보니 매화가 꽃을 피워냈는데 얼음이 얼었다. 대찬 바람 속에서 눈발이 슁슁 날리는데도 산수화는 꽃을 피워야만 한다는 듯이 봉오리를 자꾸 터뜨린다.

꽃은 피었지만 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영하의 날씨에 벌들이 무슨 정신으로 꽃을 찾으랴. 그런데도 꽃은 피어난다. 왜인가. 동백이야 본디 벌이 없어도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눈 속에서도 꽃이 아름답다지만, 산수화나 매화는 벌이 있어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는데 어쩌자고 자꾸 꽃망울을 터뜨린단 말인가. 왜 이렇게 자꾸 슬픈 짓들을 하는 것이냔 말이다.

눈물을 감추려고 하늘을 보면 여인의 소복처럼 새하얀 눈꽃 송이가 내 눈을 찔러대며 더 많은 눈물을 흘리라고 한다. 이런 흉흉한 날씨가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는 날씨 탓을 한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날씨가 요 모양 요 꼴이라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는 투정 비슷한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한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모두가 엉망이다. 엉망진창이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마음도 심난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는 여행을 해야 한다 해서 여행도 다녀와 봤지만 마음은 더욱더 헝클어지고 말았다. 배가 바다에 떴을 때는 최소한 뱃머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정도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배는 뱃머리가 아예 없어져 버렸다.

머리도 없는 배가 왼쪽으로 돌다가 오른쪽으로 돌다가 느닷없이 솟구치는가 하면 다시 자맥질을 해서 왼쪽으로 돌다가 오른쪽으로 돌기를 끝없이 되풀이 하는 형국이다. 도대체 이놈의 배는 어디로 갈 것인가. 가기는 갈 것인가? 그대로 그냥 침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예측 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동백

 

그래도 굶어죽을 수는 없어서 무엇이든 일을 찾아서 하기는 한다. 그런 일이 제대로 될 것인가. 하다가 문득 멈추고 보면, 또는 끝내놓고 나서 보면 거의 미친 짓으로 판명되고 만다. 쌀농사는 손해가 너무 크다 해서 작년에 양파 농사를 했다가 폭삭 망해버린 옆 동네 후배 하나는 금년에 참빗살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참빗살나무를 심으면 괜찮을까? 모른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무엇이든 해야 하니까 하기는 한다. 그나마 확실하게 예상되는 결과는 빚이 좀 더 많이 불어난다는 정도이다.

요즘 농촌 살림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것을 해도 빚이고 저것을 해도 빚이다. 이것을 해서 천만 원 빚이 발생하면 그 빚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빚을 갚기는커녕 오백만 원쯤의 빚이 추가로 발생한다. 사람은 의지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의지가 있으니 주저앉지는 않고 다시 일어선다. 작년에 이렇게 해서 실패했으니 금년에는 저렇게 해보자고, 저렇게 하면 틀림없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다시 시작해보지만, 그러나 그 확신은 근거가 없었다. 근거 없는 확신을 갖고 뛰었으니 결과는 당연히 또 한 번의 실패로 기록된다.

확신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는 아무렇게나 마구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가 있고, 정부가 있고, 우리는 국가와 정부가 우리에게 확신의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세금을 납부한다. 최소한 바다에 뜬 뱃머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정도는 국가와 정부가 제시해 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세금을 납부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국가와 정부는 그런 능력이 있는가? 능력이 없다면 의지라도 있는가? 최근 몇 년 동안에 나온 정부 정책과 그 실행방식을 보면 우리의 국가와 정부는 빚에 쪼들리는 국민들의 마음에 진실한 희망을 줘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희망인데 왜 희망을 못 갖느냐고, 대통령이 툭하면 책상을 두드리며 벌컥벌컥 화를 내는 방식으로 국민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해놓은 것 이상의 무엇을 우리는 아직 우리의 대통령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은 가슴이 먹먹한 채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먹먹한 채로 계속 살아갈 수도 있기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다는 말은 아마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 삶이 아닌, 하루를 살아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꽃을 보면 예쁘다고도 하고, 흥이 나면 노래하고 춤도 출 수 있는 그런 삶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가슴속의 먹먹한 것을 터뜨려 버려야만 한다. 그게 사람이다.

 

▲ 추위도 아랑곳없이 피어나는 산수화

 

그래서 불안했던 것일까? 불안해서 미리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우리의 대통령께서는 급기야 생각이나 행동이 남다른 자는 누구라도 개인전화를 포함한 살림살이 정보 일체를 합법적으로 감시한다는 내용의 법을 만들어 내라고 국회의장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회의장은 삼권분립이 엄연하건만 대체 무슨 책을 잡혔는지 납작 엎드려 버렸다. 그 법이 시행되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같은 자도 대통령을 반대하는 자로 찍힐 것이고, 대통령을 반대하는 자는 테러를 음모할 소지가 다분한즉 사생활 일체를 수집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 명약관하하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요즘처럼 ‘때깔만 좋은 개살구’로 여겨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칠팔십 년대 그 살벌한 시기에도 민주주의는 찬란한 꽃이었다. 하긴 그 시기에는 권력자들이 조금 순진하기도 했었다. 최소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교활하지는 못했다. 얼굴에도 제법 사람의 핏기가 돌아서 누구라도 거짓말 때문에 부끄러워한다는 감 정도는 잡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거짓말도 진화를 하는 모양이다. 요즘의 권력자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일말의 부끄러움은커녕 눈썹 하나 까딱을 안 하다. 두 눈 부릅뜨고, 두 귀 활짝 열어놓고 듣지 않으면 거짓말을 구분하기도 어려워졌다. 일이 다 끝난 뒤에서야 아차 속았구나, 해보지만 일은 이미 끝나버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속은 것이 아니라 상황이 변했다고 자위를 한다. 상황이 변했으므로 대통령의 예전 약속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을 신과 동급으로 추앙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신과도 같아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무조건 진실이요 진리라고 여기는 이른바 콘크리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약 사십 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 막강한 콘크리트 계급은 어쩌면 자신들은 다른 인간들과는 영 다른 인간 즉 옛날식으로 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들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대통령이 이승을 떠나는 날 함께 청룡열차나 곤돌라 같은 것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고, 대통령은 그런 믿음을 에너지로 툭하면 책상을 탕탕 두드리는 식의 열정을 과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징검다리

 

이런 생각, 이런 상상, 이런 공상은 유익하면서도 무익하다. 오늘 당장을 해석하는 데는 약간의 유익함이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 이익은커녕 자멸을 초래할 뿐이다. 북극이나 남극 같은 얼음덩어리 위에 화톳불을 피워놓은 형국인데 무슨 미래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늘날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공상, 상상, 생각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간다.

대통령께서는 틈만 나면 경제가 희망이라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반드시 살리겠다고 습관적으로 공언하고 계시지만 설득력 있는 방법론을 내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급기관이 명시되지 않은 일종의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는 셈이다. 설령 우연히 어떻게 ‘운때’가 맞아서 경제가 활활 살아난다 해도 그 자체가 희망이 되어 절망을 압도하기에는 절망의 크기가 이미 공룡괴물 급으로 성장해 버렸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람은 이미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태어났다. 이것도 관심 있고 저것에도 관심이 있다. 정의도 필요하고 신뢰도 필요하다. 웃으면서도 울 수 있고, 울면서도 웃을 수 있는, 감성과 이성이 찰떡궁합처럼 착 달라붙은 존재로 태어난 사람이 어찌 한 가지에만 열광할 수 있으랴. 눈물이 오직 슬픔만은 아니고, 웃음이 오직 기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찌 돈이면 다 된다는 대통령 말씀에 아 예 알겠습니다, 할 것인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본다. ‘귀향’도 보고 ‘동주’도 본다. ‘귀향’의 소녀는 끌려가서 노예가 되고, ‘동주’의 청년은 감옥에서 이상한 주사를 강제로 맞아 가면서 죽어간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채 백 년도 안 된 지난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아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왜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가? 대통령이 뭔가를 제대로 잘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이런 영화를 봐야 할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역사 따위는 생각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대통령은 이런 영화들을 죄다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고 싶겠지만, 물은 이미 흐르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을 누가 무슨 재주로 막을 수 있으랴.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밀어붙인 대담한 대통령이니까 혹시 가능할까? 언제까지? 한 삼 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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