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언론=전라도닷컴> 봄의 말씀 ①

▲ 삶이 혹독한 겨울 같구나 싶은 날, 쳐다보면 낯빛 환해졌을까. 한 조각 붉은 마음(一心) 같은 꽃. 담양 금성면 원천리 내천마을.

“꿈 같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2016년 대한민국을 사는 한 중학생의 말이 아프다.

먼 데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겨울이 참으로 길다. 강정의 봄도 밀양의 봄도 세월호의 봄도 아직 오지 않았다.

<옛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을 뻔했다. 그들은 전쟁을 겪었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땀 흘려 오래 만드는 일을 존중했고 자유를 찾아 싸웠으며 돈을 섬기지 않았다. 그들은 천박하지 않았다. 염치가 있었다. 도리를 알았다.> (황현산, 《밤은 선생이다》 중)

모두에게 공평한 봄 햇살처럼 모두에게 꽃 시절을 염원하는 이들이 핍박받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을 일러 우리는 ‘봄’ 이라 한다.

 

▲ “오매 봄이 와뿔었네!” 눈 대는 사람마다 입으로 꽃처럼 내어놓는 그 말 ‘봄’. 구례장.
▲ 가지런히 쌓은 ‘물견’을 다 폴고 나면 비로소 그 쟁반에 만개한 꽃밭을 만난다. 보성장.

 

“나만 보문 아깝제. 여러 눈에 질거우라고”

조촐하고 어여쁜 풍경 한 점 저잣거리에 정성으로 차려놓은 이는 뉘시온가.

“나만 보문 아깝제. 여러 눈에 질거우라고.”

좋은 것은 남과 함께 하는 그 마음. ‘꽃보시’ 하는 인정의 말씀을 구례 오일장에서 듣는다.

가는 발걸음 불러세워 한 줌 덤을 얹어주는 인심이 꽃처럼 피는 장터.

“암만해도 서운해서. 더 도라고 헌 것을 안 줬구나 허고 오늘 밤에 내가 짠헐깨미.”

일일삼성(一日三省)의 목록에 ‘남한테 그때 더 줄 수 있는 것을 덜 줬다는 반성’이 들어 있는 할매. 이름도 얼굴도 물짜서 내놓을 것 없다 하신다.

“나는 놈한테는 약해. 내한테만 강했어.”

내 인생의 시작은 내가 정하지 못하나 내 인생의 끝은 내가 정한다는 정신으로 걸어온 날들. 세한에 푸르르고 봄 앞서 꽃등 들어올리는 동백 같은 생애였다.

“꽃낭구는 배 안부르제만 맘적으로 좋잖애.”

누구 탓도 없고 누구 숭도 없고 저 혼자 어여쁜 꽃분 하나 들고 나와 세상길 함께 걸어가는 동무들한테 선사하는 그 사람.

“왜 나를 숭글 디가 없어 여그다가 숭궈 놨나” 싶은 돌밭에서 스스로 일어나 꽃이 된 할매의 말씀이 향기로왔다.

 

▲ 낡고 해진 자리 꿰매고 잇대어 보듬어 온, 어매의 삶이 꼭 이와 같았다. 영암 신북면 이천리 이목동마을.
▲ 어제는 흙밭에, 오늘은 새로 씻어 봄볕에. 강진 도암면 석문리.

 

“끄터리라도 좋은 시상을”

이미 망가진 것이라 해도, 이미 해진 것이라 해도,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 해도 버리지 않는다. 어매이기에 끝까지 보듬어 지켜내는 것들. 자식이 그러하고 버선 한 짝도 그러하다.

낡고 해진 자리 꿰매고 잇대어 다독거리는, 사무치게 극진한 어매의 정성. ‘흔헌 것이라곤 없었던 세상’에서 내게 온 모든 것을 귀하게 대접하는 것이 어매의 삶이었다.

장독대에서, 말래에서 볕바라기 하는 꽃버선, 혹은 ‘버선꽃’. 주인은 들에 아니면 뻘에 엎드려 있을 터.

장터 옷가게에 흔전만전 피어난 ‘꽃가라’들을 문신처럼 옮겨 심고 봄내 여름내 가으내 겨우내 백만 송이 꽃숭어리를 휘감고 사는 꽃어매들.

“전에 어매들한테는 독아지 긁는 소리가 이 시상에서 질로 슬픈 소리여. 쌀독아지에서 양석 한톨을 못 주서내고 굴 속 같은 빈 솥에다 기냥 물만 붓고 불을 때.”

굴뚝에 연기라도 내려고 ‘헛불’을 땠었더라고, 너나없이 가난하였던 시절을 꺼내놓는 장흥 안양면 사촌리 마을회관 할매들.

 

▲ 일보(一步) 일보. 대지를 푸르게 바꾸는 전진. 무안 현경면 가입리.
▲ 사람도 꽃버선도 ‘잠꽌 고실고실’한 계절. 장흥 안양면 사촌리 마을회관.

 

“놈 부끄런께. 굶었단 소리 안 들을라고. 놈한테 피 지칠깨비(폐 끼칠까봐).”

그런 시절을 오로지 ‘나놔묵는 습관’으로 견뎌내었다.

“거지가 대문간에 들어서문 밥 묵다가도 이녁 식구 밥을 십시일반 덜어서 채려줘. 없다고 해도 뭐이든 나놔묵어.”

내 식구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인데 아이들은 그릇 들고 고샅으로 ‘음식 심바람’을 했다. 가난한 어매들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없이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

그 겨울 지나니 마침내 봄이 왔다 하신다.

“바늘에 실도 안 뀌어보고 요런 보신을 신다니. 우리는 인자 괜찮해. 우리는 끄터리라도 좋은 시상을 만내고 가네. 우리 앞에 돌아가신 어매들이 불쌍허제.”

꽃버선 꿰어신고 밭에 나가는 오늘을 ‘끄터리라도 좋은 시상’이라 감읍하는 할매들.

“감사하다!” 외치는 꽃청춘들이여, 너희가 이 할매들의 감사를 아느냐.

 

사진 박갑철·최성욱·남인희·남신희 기자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