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언론=전라도닷컴> 봄의 말씀 ②

▲ 긴 어둠 속에서 스스로 출구를 찾아나온 행진. 마침내 분연히 내어민 초록깃발.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든다

너 아직 깨어나지 않았느냐고, 깜깜한 겨울 속을 걸어나와 뽀족 내민 싹.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드는 계절’이다.

<초록은 두렵다/ 어린 날 녹색 칠판보다도/ 그런데 자꾸만 저요, 저요, 저, 저요 손 흔들고/ 사방 천지에서 쳐들어 온다/ 이 봄은 무엇을 나를 실토하라는 봄이다/ 물이 너무 맑아 또 하나의 나를 들여다보고/ 비명을 지르듯이/ 초록의 움트는 연두빛 눈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섭다/ 초록에도 감옥이 있고 고문이 있다니!/ 이 감옥 속에 갇혀 그 동안 너무 많은 말들을/ 숨기고 살아왔다> (송수권, ‘초록의 감옥’)

 

▲ 겨울을 뚫고 나온 이의 얼굴.

 

달팽이뿔 위처럼 작은 세상이라 해도 부싯돌 불꽃 같은 짧은 인생이라 해도 분노해야 할 때를 만나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세상에 살되 결코 호락호락 세상의 것은 되지 말라고. 저 초록이 나를 우리를 고문한다, 이 봄.

 

 

▲ 이 자루에서 풀려난 씨앗들이 이윽고 남새밭에 남실남실 초록물결을 지을 것이다. 남원장.

“시시로 때때로 숭굴 것이 많애”

돼지나락, 까투리나락, 쌍두배나락, 오두바리수수, 눈까막이수수, 개파리콩, 어금니콩, 게발차조, 개똥차조, 물푸레차조, 오누이강냉이….

가만가만 소리내어 읽어보면 누룽지라도 오물거리는 듯 구수한 맛이 난다. ‘농자천하지대본’의 시절 이 땅에 심어지던 우리 토종씨앗들.

“촌은 시방 숭굴 때여. 촌에 산 사람은 시시로 때때로 숭굴 것이 많애.”

옹잘옹잘 보자기마다 수런수런 씨앗들 풀어놓은 남원장 씨앗전.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라고 시인은 말하였으되, 내게 땅 한뼘 없어도 이랑 두둑이 올리고 고랑 가지런하게 내어 씨앗 한 줄 묻고 싶은 봄날.

“잘 나고 잘 커주씨요 속으로 공을 딜이제. 인자 심어놓고 나문 지그들이 커. 비도 공것으로 쓰고 볕도 공것으로 쓰고.”

돌보는 이녁의 몸공에는 값을 치지 않는 어매들.

“씨 뿌리고 나문 인자 두근두근 지달리제.”

‘두근두근’ 기다리는 그것이 내가 심은 씨앗에 싹이 나는 일. 그렇듯 내내 순정한 생애.

이 자루에서 풀려난 씨앗들이 이윽고 남새밭에 남실남실 초록물결을 지을 것이니. 가을 아욱국 끓이려고 집집이 삽짝문 닫는 소리, 아욱 씨앗자루 곁에서 듣는다.

 

 

▲ “지는 크니라고 애쓰고, 나는 캐니라고 애쓰고.”

“시한내 버툰 거라 행내가 좋아”

“예말이요, 약 사갖고 가씨요.”

구례장 이숙자(78) 할매가 ‘약’이라고 자신있게 명명하는 것은 냉이.

“출 때 얼었다가 녹았다가 함시롱 큰께 봄너물은 약이여.”

장날을 앞두고 그 약을 캐오느라 할매는 이틀을 들녘에 엎드려 살았다. 아직 바람찬 들녘에서 할매가 옮겨온 이른 봄이 바구리에 가득 차 있다.

“시방 딱 묵기 좋은 때여. 눈 속에서 얼음 속에서 시한내 버툰 거라 행내가 좋아.”

남원장 조경애 할매도 “봄너물은 약’이라고 권한다.

 

▲ “옛날 어매들은 논두렁 밭두렁에서 모다 이란 것 뜯어다가 밥상 채렸어.”

 

“약이란 것은 씹씨름헌 법이여. 민들레, 씬너물, 꼬들빼기, 싸랑부리(씀바귀), 박주가리…. 잡사봐. 쌍곰하고 씹씨름해. 쓴맛으로 묵어. 오래 산 사람들은 그런 맛을 알아. 애린 사람들은 그 지픈 맛을 몰라.”

묵은 김장김치만 내어놓던 밥상에 푸릇푸릇 새것 올릴 때가 어매들한텐 비로소 봄.

“너물 묵으문 인자 봄인 것 맹이제.”

남원장 조영덕 할매는 ‘쑥 캐는 복’을 자랑하신다.

“내가 놈보다 복이 많애. 여그 있니라 허고 더듬으문 볼긋볼긋 올라와 있어. 반갑제. 저도 인자 봄인갑다 하고 나온 것인께.”

이 봄 이 산천에 돋아나는 수많은 나물들을 ‘너로구나!’ 눈밝게 알아보는 할매들이 “사방 디를 기어댕김서” 모아온 봄이 장터바닥을 푸르름으로 채운다.

 

▲ “시한에 출 때 얼었다가 녹았다가 함시롱 큰께 봄너물은 약이여.”

 

“봄에는 땅에 엎지문 뭐이라도 밥상에 올려. 옛날 어매들은 논두렁밭두렁에서 이란 것 뜯어다가 캐다가 껑꺼다가 자석들 배 채왔어.”

봄나물이 생존의 절실한 수단이던 시절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다북쑥을 캐다(采蒿)’란 시에는 눈물이 배어 있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 넘어가네/ 푸른 치마 붉은 머리/ 허리 굽혀 쑥을 캐네/ 다북쑥 캐어 무얼 하나/ 눈물만 쏟아지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엔 벼 싹 다 말랐네/ 다북쑥 캐어다가/ 둥글게 넓적하게/ 말리고 또 말려서/ 데치고 소금 절여/ 죽 쑤어 먹을밖엔/ 달리 또 무얼 하리>

다시 사방천지에 나물들이 우우우 돋아나는 철, 오로지 먹여살리는 게 일인 어매들의 채취본능은 어매들을 들밭으로 데불고 간다.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는~” 봄처녀들은 사라진 지 오래. 어매들만이, 할매들만이 여전히 이 나라 산천의 봄을 고적하게 들여다보고 캐고 모트고 있다.

 

▲ 부족함 없다. 봄이 한 바구리. 남원 주천면 용궁마을.

 

봄인가 싶은 그날부터 집이 아니라 들판에 사는 남원장 이남례 할매는 ‘지 혼자 지 스스로 크는’ 나물의 한생애를 안다.

“춘 디서 노지서 전딘 놈들이라 좋아. 온상서 캔 놈은 순 물이여. 물을 줘싼게. 노지것은 비올 때만 비 맞고 햇볕 난 디로 열심히 고개를 쳐들고 커. 지는 크니라고 애쓰고, 나는 캐니라고 애쓰고.”

봄나물 바구리마다 담긴 것이 애쓰고 살아가는 것들의 한세상임을.

사진 박갑철·최성욱·남인희·남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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