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구하려고 노력은 했어야지,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은 했어야지…”
“최소한 구하려고 노력은 했어야지,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은 했어야지…”
  • 구혜리 기자
  • 승인 2016.04.15 16: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광화문에서 2년을 함께한 고영수씨

“저는 활동가도 유가족도 아닌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네. 어떤 가이드북에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현지에서 만나게 될 친구를 위하여 작은 기념품을 챙겨두는 것이 좋다고 본 적이 있었지. 한국을 대표할 작은 선물이라…홍대 가게들을 전전하다가 홍대입구역 앞에서 말없이 마음을 전하는 분에게 노란 리본을 한 움큼 받아온 거야. 내심 어느 선물보다 가장 의미 있으리라 뿌듯하면서도, 그 의미의 전달자로서의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아파오는 거야. 다행히 친구는 선물을 잘 받아주었고 지금도 간간히 연락하며 보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감사할 따름이지.

 

 

그게 또 2년 전이네. 오래된 사진들을 찾아 그날의 나를 돌아봤어. 그 때 나는 막 대학교에 입학해서 사랑을 시작해 벚꽃을 보러 다니거나, 하나 뿐인 동기랑 캠퍼스를 거닐며 도서관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했더라고. 그냥 평범한 대학생으로 말이야. 그 아이들도 누릴 수 있었던, 누려야만 했던 따뜻한 봄날이었단 말이야. 2년이 지난 지금 더 나아지기도 더 고달파지기도 했지만 봄날의 볕을 만끽하기에 그 때와 변함이 없는 듯한 내 모습과 또 우리의 풍경은 새삼 잔인하게 다가온다.

“나는 작지만, 우리는 작지 않으니까요.”

세월 속에 잊어가는 것이 익숙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다 반짝- 노란 빛이 기억해달라고 팔 다리를 내밀면, 옅어져만 가는 슬픔이 다가와 끊이지 않도록 매달려 있지. 2년 동안 ‘안전’이라는 키워드는 위로 솟았어. 학교에서 교수들이 욕구이론이나 국가관리 등을 강의하기 위한 부재료가 되었고, 매체에서는 표심을 사기위한 또 다른 재료가 되기도 했지. 그러는 사이 ‘안전’이란 단어는 끝까지 허공만 맴돌았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내 삶이 불안한데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습니다. 저도 요즘 인생 최고로 물질적 빈곤을 겪고 있는데, 꽤 힘이 드네요.”

누군가는 거리에 나갔고, 또 누군가는 노란 작품을 생산했어. 나날이 치열해지는 환경에 당장 내 앞길을 찾기도 어려워 옆 사람조차 다독여주지 못하는 소시민이라, 이토록 빨리 잊고 행동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해야 했어. 그리고 저 거리 밖으로 나가, 광화문에서 2년을 보내온 고영수 씨를 만났어. 나와 똑같은 평범한 이웃으로.

 

-세월호 참사 이후 2년 동안 광화문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들었다. 영수 씨는 어떤 사람인가.

▲살다시피는 아니었다. 실제로 저보다는 많은 활동가 분들이나 유가족 분들이 지금도 광화문 앞을 지키고 계신다. 평범한 대학생, 인간과 존엄과 관련해서 활동하고 특히 환경에 대해 공부를 넓히고 있다.

 

 

-세월호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 처음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은 아침 7시에 나가서 집에 밤 11시쯤 들어왔을 거다. 아침에 다른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학교에서 수업과 시험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조용한 날이었다. 아침에 세월호 소식을 들었지만, ‘완전구조’라는 말을 듣고 안심해버렸기 때문에. 집에 들어와서야 그렇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멍- 했다. 분명 ‘전원 구조’라고 했는데…. 그래서 안심하고, 이웃이 물에 빠져 싸늘해지고 있을 때 평소와 같은 따뜻한 하늘을 만끽했는데…. 늘 정부 비판은 많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참 잘했다 생각했거늘 이게 무슨 일인가.

학교가 안산 쪽이다. 그냥, 괜히 병원에도 가보고 단원고등학교 주변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분위기 때문에 감히 들어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관계자도 유가족도 아니었기에, 해결책을 줄 수도, 심지어 지역 주민도 아니었기에 다가갔으나 보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물속에 있지만 시간은 흘러갔다. 생존자 소식은 없었다. 정말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라고 끝없는 무지함과 무기력함에 빠져들곤 했다. 그냥 몇 주는 그렇게 단원고나 병원을 기웃거리며 맴돌았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그러다 당시 활동하고 있던 단체에서 지역주민인 용혜인 씨가 ‘가만히 있으라’라는 활동을 제안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단체에서 온 사람들, 그저 순수하게 세월호를 추모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 불안과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 중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 심지어 우연히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들까지 보고 모여들었다. 행진을 할 때 따라오며 박수를 치는 분들이 계셨고, 경찰이 포위해서 통행을 막았을 때, 밖에서 ‘길을 트라’고 소리치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인지와 참여 그리고 호응이 높아질수록 정부-경찰의 대응도 격해져만 갔다. 어느 순간 그들은 불법집회라는 명목으로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잡혀 갔다. 다른 일정으로 뒤늦게 합류하기로 한 그날은, 정말 싹- 광장의 사람들이 연행되어 사라졌고 경찰이 깔려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다른 활동으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포위당하기도 했고, 연행 위협도 있었지만 연행을 당한 적은 없었다. 무서웠다. 그래서 합류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도망쳐 왔다. 새벽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연행된 사람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이상은 없는지 경찰서마다 연락을 돌려 확인을 해보자는 전달이었다. 그 새벽에 스스로가 부끄럽고 또 한심한데 미안하고 혼자 앓다가 그 전화 한 통에 바로 뛰쳐나가 택시를 탔다.

다음날 아침 세월호에 무책임한 정부에, 그 이전에 자꾸만 사람들을 밀어내고 떨어뜨리는 정권에 소리치기 위해서, 또 표현을 막고 무차별한 연행에 항의하기 위해서 몇몇 단체가 점거를 결의했다. 장소는 박정희기념관으로 했다. 기자 없는 기자회견을 자체적으로 열고 선언문을 유포했고 플래카드를 걸었다. 많은 문구들이 있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이윤보다 인간이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을 치우지 말라. 사람을 밀어내지 말라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밀려나는 사람들은 여럿이었으나 한정된 사람들이었다. 세월호와 밀양, 삼성 백혈병, 비정규직, 알바노동자, 여성, 장애인, 밀려나와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박정희기념관 점거 후에 처음으로 연행되었다. 40시간 넘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잡혀 있다가 석방되었다. 유치장 안에서, 그 전 이틀 동안 세월호 추모행진을 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가둬놓은 대통령이 해외순방 나가는걸 보고 있자니, 참. 그래도 그 이후 ‘가만히 있으라’ 행진은 계속 되었다. 6.10만민공동회에서 또 한 번 대규모로 연행되었다. 그 때는 거의 70여건의 집회신청도 금지하고, 길목마다 경찰을 세워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거나 몇 명 이상 몰려가거나 수상하다 싶으면 통행을 못하게 막았다. 그 날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걸어 올라가는데 아니 올라가지를 못했다. 막아서. 결국 택시를 타고 돌아돌아 들어갔는데 ‘가만히 있으라’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경찰들이 우르르 나와서 길목을 막고 포위했다. 비는 내리고, 경찰들은 방패로 길을 막은채 몰아세우고, 뒤편의 가게들에선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비인지 눈물인지 끊임없이 모두들 눈에서 무언가를 흘리고 있었다. 모든 문구판을 경찰이 가져가버려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은 채로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외치며 길을 터줄 것을 요구했지만 결국 모두 잡아버렸다. 그 때가 네 번째였을 거다. 행진이 시작되고 30분 만에 또 사지가 들린 채 연행되었다. 처음으로 수갑도 차보고, 인적사항 조사도 받고 하니 자정이 넘어갈 때 다른 사람들도 잡혀오더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찰이 버스 위에 올라간 사람을 떨어뜨려 의식을 잃게 했다 하고, 경찰에게 맞았다고 하고…. 당시 노동당 부대표였나, 정진우 씨도 연행되었다. 우리가 포위된 곳으로 뚫고 온 사람들도 같이 연행되었고, 새벽까지 비 맞으며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도 다 같이 연행되었다. 연행과 부상을 반복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일베같은 곳에서 폭식투쟁담처럼 분명 구조의 문제인 세월호 참사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소외층과 유가족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말들이 들렸다. 침체되고 좌절하는 일들이 쌓여온 2년이다.

 

 

 

-세월호 참사를 만든 구조적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정말, 지금 이 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경쟁하고 있고 경쟁에 내몰린 ‘우리 모두’가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모른 척 해왔고 치워왔던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여성, 밀양 주민들, 원전 지역 주민들, 삼성 백혈병 노동자들, 철탑에 올라간 사람들, 용산의 철거민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88올림픽 당시의 철거민도 있겠다. 계속 경제적 이익과 이를 위한 시장경제, 경쟁이란 이름으로 밀어내고 사회 밖으로 떨어뜨린 사람들, 그리고 치워버리고 잊어버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내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렇게 만들어 온 희생양, ‘내 일은 아니니까, 저렇게 해야 더 이익이니까, 사회 질서가 유지되니까’라는 변명으로.

세월호에 있던 많은 사람들,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도, 학생들을 인솔하던 이들도, 집으로 가던 사람들도, 장사를 하러 가던 사람들도, 그냥 이동 경로에 있던 사람들도, 왜 하필 ‘배’라는 수단을 선택해야 했는지, 왜 국회에서는 법을 바꿔서 배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했는지, 세월호를 가진 회사는 왜 일본에서 폐기하기 직전의 낡은 배를 사와서 무리하게 증축했는지, 당시 세월호는 왜 화물을 과적했는지, 대체 어쩌다가 화물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아도 검사하는 사람이 선박업계 내부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는 검사도 검사할 배가 많다는 이유로 대충하게 되었는지, 왜 선박사고와 인명구조를 담당할 기관은 혼선이 있었고 이를 조율할 컨트롤 타워는 없었는지, 해경은 왜 그랬는지 등등.

구조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가 추구하고, 사회를 유지시키고, 그래서 우리가 순응하게 되는 그것의 문제는 수없이 많다. 그래, A라는 한 명이 세월호를 타고 어디를 가다 재수 없게 배가 침몰했고 구조 받지 못한 거지. A라는 대상만 보면 그렇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왜 A가 하필 배를 타게 되었는지, 그 배는 왜 하필 안전검사를 대충 받았는지, 왜 하필 그렇게 낡은 배였는지…. 이게 구조에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면, 사실 구조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가. 소위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학문은 배울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사회나 국가라는 것을 만들 필요는 있는지부터 다시 물어야 하게 된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지 않아도, 최소한 검사는 잘 했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구하려고 노력은 했어야지,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은 했어야지, 누군가 책임지려는 모습이라도 보였어야지 하는 마음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에 슬퍼하고, 좌절했고, 분노한건지도 모르겠다.

 

 

-2년이 지난 오늘 세월호 참사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평범한 사람, 생존에 바쁘게 허덕여야 하고 쉽게 휩쓸리는 나와 같은 일반인들이 많다.

▲상처는 어찌 되었든 아문다. 상처에 피가 맺히고, 딱지가 져 말라가면 그러다 딱지가 떨어진다. 어떤 상처는 딱지가 떨어졌을 때 흉터 없이 깨끗하게 낫는다. 근데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돌봐주지 못한 상처는 크고 아릿하게 흉터를 남긴다. 당시에, 사람들이 그렇게 죽을 듯이 아파했을 때, 더 열심히 말하고 행동했다면, 조금 더 적극적이고 잘 전달했다면, 흉터 대신 새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세월호는 그런 흉터로 남았다.

요즘은 흉터를 완화시키는 연고들이 잘 나오는 것처럼, 지금도 계속 노력할 수 있다. 세월호로 가슴 아팠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부분 역시 계속 가져가야 할 과제다. 광화문 농성장에서 함께 노란리본을 만들고, 밤에 농성장을 지켜줄 수도 있다. 지금도 광화문에는 밤새 농성하는 분들이 계신다. 잠만 잘 수 있는 정말 좁고 추운 컨테이너가 있다. 시민사회단체에서 계속 분담해가며 연대하고 있다.

그렇다. 사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내 삶이 불안한데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나 역시 요즘 인생 최고로 물질적 빈곤을 겪고 있는데 꽤 힘들다. 그러나 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거고, 평범한 사람들이 호응해주지 않으면 힘이 빠지고, 잘 운영되지도 않는다. 서명을 받거나 피켓을 들고 있는 때 행진에 섞여 함께 참여해 주시거나, 말을 걸어주거나, 박수를 쳐주시는 둥…. 혹은 그저 지하철을 탄 누군가의 가방에 걸린 노란 리본을 보고도 꽤 큰 힘이 난다. 추운데 고생한다며 장갑을 사다 주신 분도 계시고, 음료를 사주신 분도 계시고, 혼자 피켓을 들고 서있는데 오셔서 같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가시는 분도 계신다. 큰 가족이 함께 있다는 걸 느낀다. 운동하는 분들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외면당하면 아프고 힘든 건 똑같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당장 옆에 서서 같이 활동하지 않으셔도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만 하는 걸로도 생각보다 정말 많이 힘이 되어 신나게 떠들게 되더라. 그게 작다고 느낀다면, 관심 있는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해보거나, 한 달에 몇 천원이라도 후원을 해보는 걸 추천한다. 항상 돈은 없고 일은 많아서 사람을 ‘갈아 넣는’ 식으로 운영하는 게 시민단체다. 같이 현장에 가지 않아도, 혼자 ‘함께’가 되는 방법은 많다. 운동을 할수록,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이라는 말이 가슴에 닿고 있다. <대학생>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