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연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거리에서 발견하는 두 남녀의 팔짱 낀 모습은 대체로 아름다워 보인다. 만약에 두 남녀가 거리에서 성행위를 한다면 어떨까. 행위 장면을 직접 목도한 사람은 아마 커다란 재앙으로 기록해야 마땅한 일을 당했다고 흥분하겠지만, 실제로는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이야기 소재가 되어 그의 삶을 조금 더 풍부하게 해줄 것이고 보면, 섹스에 대한 인간의 태도만큼 인간 스스로가 양가적 감정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소재도 없다고 여겨진다.

 

▲ 내려오라 설득하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의 짝짓기 장면을 거리에서 발견했을 경우 사람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어서 간단하게 정리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은 재수 없다고 침을 뱉기도 하는데 정말로 재수가 없었을까? 또 어떤 사람은 발견하는 순간 좌우를 일단 둘러보고는 못 본 듯이 외면하고 후딱 자리를 떠난다. 떠나기는 하지만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한 번 더 슬쩍 돌아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걷다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기를 되풀이하다가 비틀거리기도 한다.

만약에 내가 고양이의 짝짓기 장면을 거리에서 발견했다면 나는 아마 힐끗 한 번 일별이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이 거리도 아니고 다른 그 어디도 아닌 우리 집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장면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내 감정을 지금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이게 웬 큰 보물이냐, 하는 심사였을 것이라고 추론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첫날 이후 마지막 날까지 그들의 짝짓기 행위를 보고, 또 보고 했으니 말이다. 거리에서 그 장면을 발견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을까?

딱히 고백이랄 것도 없겠지만 고백을 하자면 처음 고양이들의 짝짓기 장면을 발견했을 때 그녀와 나는 쉬, 쉬 해가면서 창문으로 훔쳐보았다.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거나 아는 체를 하면 그 순간 고양이들이 놀라서 어디 멀리로 달아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뜻밖에 찾아온 구경거리를 온존하게 보존하는 한편 고양이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려준 셈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괜한 조심성이었다. 연애행각을 벌이는 이것들의 행태가 시간이 갈수록 영 야만스럽기만 하다. 한두 번 정도로 끝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신들의 하는 짓을 보건 말건 상관하지도 않는다. 역시 그렇구나. 고양이도 사람처럼 연애행각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는구나. 그렇다면 얘들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겠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부당하게 갈라놓으려 하면 더욱더 붙으려고 하는 건 어쩌면 모든 동물들의 공통된 기질인지도 모른다.

 

▲ 구경하고

 

암컷의 등을 집요하게 탐하는 수컷을 보면서 우리는 암컷이 참 괴롭겠다는 생각으로 수컷을 쫓아내 보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매우 짧은 소견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암컷 고양이는 짝짓기가 서너 차례 이뤄진 뒤부터 분명히, 명백하게 수컷을 향해 발톱을 세우기도 하고 공격적인 소리를 내기도 하는 등으로 수컷을 매우 귀찮아했다. 하지만 수컷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한에서만 그랬다. 수컷이 눈앞에 있으면 피하기도 하고 숨기도 하지만, 수컷이 눈앞에 없으면 매우 불안해하며 야옹, 야옹, 소리를 내며 방황을 한다.

암컷 고양이를 일시적으로 불안에 빠뜨리는 것은 필경 수컷 고양이가 선택한 고도의 전략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발톱을 세우고 덤비는 암컷이 놀랍다는 듯이, 질렸다는 듯이 머리를 돌려 밖으로 나가버리는 자세를 취할 때 암컷은 마치 자석을 따라가는 쇠붙이처럼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다가 수컷이 다시 돌아서면 암컷은 또 달아나는 자세를 취한다. 마치 나는 네가 좋아, 하지만 귀찮아, 귀찮지만 좋아, 좋지만 귀찮아, 아이 참 이런 내 마음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모른단 말이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놈의 짝짓기란 대체 무엇일까. 욕망? 아니다. 단순히 그냥 욕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끌림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저쪽에서 무엇인가가 이쪽을 당기고, 이쪽 또한 무엇인가가 작동해서 저쪽을 당긴다. 그래서 이쪽은 저쪽으로 끌려가는 한편 저쪽을 끌어당기는 것, 끌려가지 않을 수 없고,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은 좀 비약을 하자면 일종의 중력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력을 행사함으로써 서로가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섹스의 핵심이 아닐까.

어쨌든 귀찮아하면서도 쫓아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고양이들의 짝짓기 행위를 우리는 일단 사랑놀음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사랑놀음이 뭐지? 왜 그런 놀이를 하는 거지? 다만 하나 즐겁기 위해서,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 하는 놀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 즐겁기 위해서 하는 놀이라면 아무 때 아무 데서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짝짓기란 그런 것이 아니다.

 

▲ 달래고

 

사람의 경우는 일단 예외로 치고 본다면, 사람보다 그 개체수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짝짓기는 매우 엄격한 룰이 있다. 발정기가 아니면 안할 뿐만 아니라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이 규칙은 마치 도장을 찍듯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 유전자의 명령체계는 매우 정교하고 엄격하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암컷은 발정기에 이르면 각자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수컷을 불러들이는데 종에 따라서는 수컷이 때맞춰 오지 않을 경우 온 세상이 떠나갈 정도의 고함을 질러댄다. 그리고 수컷은 발정기에 이른 암컷이 옆에 있으면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조차도 망각해 버린다.

검은 고양이 야옹이의 선택을 받은 수컷 고양이는 짝짓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사흘 동안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암컷을 달래고 얼러서 그 등에 올라타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컷 고양이는 마침내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개 수컷이 발정기에 이른 암컷 주변을 맴도는 동안 영양부족으로 털에 윤기가 빠지고 갈비뼈가 드러나듯이, 고양이도 그렇게 털이 마치 옥수수수염 말라빠진 것처럼 부수수하니 곤두선 채로 엉키고 몸뚱이는 마치 누군가 정교한 기술로 살점을 죄다 도려내 가버리는 것처럼 비쩍비쩍 말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백신스키의 그림 중에 한 쌍의 남녀가 발가벗은 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데 남자의 허벅지를 여자가 타고 앉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 상태로 두 남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있어 왔는지 살이 다 빠지고 뼈와 가죽 그리고 해골만 남아 있다. 작가는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울어요’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제목이 그렇게도 뭔가 가슴을 절절하게 만들어놓을 수가 없었다.

가령 동물들의 짝짓기에 본질 같은 것이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울어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때 했었던 나로서는, 사흘 동안에 약 팔구십 회의 짝짓기를 집요하고 격렬하게 치러대면서 점점 살이 빠지고 털에 윤기를 잃어가는 수컷 고양이를 보면서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새삼 생각해 보니 모든 동물들이 고양이나 개처럼 짝짓기 과정을 거치면서 피골이 상접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그렇게 여러 날 동안 하지도 않았고, 시간이 길지도 않았다. 가령 소나 돼지 그리고 양이나 토끼 같은 동물들은 단 한 차례의 짝짓기만으로도 임신이 된다.

 

▲ 싸우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 앞에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 주인이 거대한 수소를 갖고 있었는데 색깔이 검은 것도 아니고 붉은 것도 아닌 검붉은 색이었다. 이 검붉은 수소는 근동에서도 명성이 자자해서 발정기에 이른 암소를 데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때문에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으레 그 방앗간을 경유하곤 했다. 재수가 좋은 날이면 암소의 등에 올라타서 우렁찬 소리를 질러대는 수소의 그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요즘은 그런 장면을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다. 대량 사육 체계가 완성된 이후 수소는 태어나자마자 고기 맛이 없다는 이유로 거세를 당한다. 극히 일부의 수소만이 강원도의 산골짜기 청정한 곳에서 수컷으로서의 대우를 받는다. 그렇다고 암컷과의 짝짓기를 직접 하는 것은 아니다. 고급 사료를 먹어가면서 날마다 몇 밀리그램씩 정액을 생산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산된 정액은 전국으로 공급된다. 전국 각지에 산재한 한우 사육 농가 중에는 새끼소 생산을 목적으로 암소만을 전문적으로 기르는 곳이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그런 곳이 하나 있는데 이삼일 간격으로 발정기에 이른 암소가 나타난다. 밤에도 엄청난 소리를 질러대며 아우성을 치는 암소의 체내 깊숙이 수의사가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정액을 넣어주는데 신통하게도 그 즉시 암소의 아우성은 진정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고 보면 수컷이란 그 존재형식이 참으로 비극적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도롱뇽과 도마뱀 그리고 사마귀와 두꺼비가 상당히 많은데 가을이면 머리를 잃어버린 사마귀의 시체가 자주 눈에 띈다. 짝짓기 도중에 암컷이 수컷의 머리를 먹어버린 것이다. 수컷 사마귀는 사실 짝짓기가 끝나면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그만 죽어버리게 되어 있긴 하다. 그렇기는 해도, 삶이란 그렇게 간단한 계산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수컷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기를 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수컷이 암컷에게 머리통을 씹어 먹히는 순간에도 수컷의 생식기는 암컷의 체내 깊숙한 곳에서 활동을 계속한다는 점이다. 이를 가리켜 소설가 박상륭씨는 암컷이 수컷을 먹는다기보다 새끼들이 아비를 먹는다고 보는 게 옳다고 했다. 아비의 존재이유는 결국 새끼들에게 잡아먹히기 위해서인 셈이다.

 

▲ 어르고

 

꿀벌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수컷의 비극성은 한층 극적으로 드러난다. 희한하게도 수벌은 먹이 채집을 못 하게 되어 있다. 일벌이 수확해 온 것을 몰래 훔쳐 먹다가 쫓겨나고, 쫓겨나면 그대로 죽는다. 그런데도 수벌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개체수 또한 일벌 못지않게 많다. 목적은 단 하나, 뭔가 변고가 발생해서 새로운 여왕의 등극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이다.

여왕벌은 다른 벌들에 비해 체격이 두 배는 되고, 날개도 훨씬 크다. 때문에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오를 수가 있다. 수컷 벌들은 일벌에 비해 체격이 약간 더 크고, 날개도 제법 발달돼 있긴 하지만, 여왕벌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나 잡아봐라”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여왕벌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야만 한다.

여왕벌이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는 이유는 가장 튼튼한 수컷을 가려내고자 함이다. 대개의 수컷들은 여왕벌을 향해 모든 역량을 발휘한다고 발휘해 보지만 대부분 중도에서 탈락한다. 탈락은 곧 죽음이다. 날아오르던 도중에 생명이 끊어져서 툭툭 떨어져 내린다. 모두 죽고 남은 마지막 한 마리, 그 한 마리에게 여왕은 자신의 몸을 열어준다. 결혼은 아니다. 언감생심 결혼은 무슨, 수컷 벌은 한 차례 여왕의 몸을 얻었다는 영광을 안고 미련 없이 죽어가야 한다.

여왕은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기 전에 날개를 털어버린다. 이제 다시는 날개를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 수컷의 역량을 가늠할 목적으로 날개를 달았던 것이기 때문에, 수컷의 정액을 흠뻑 취한 여왕은 날개 따위는 내버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알을 낳기 시작한다. 수컷의 정액은 암컷의 내부에서 무한히 자체 증식을 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수컷이 필요도 없다.

 

▲ 올라타고

 

한편 진화 과정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동물들이 처음부터 짝짓기를 했던 것은 아니란다. 생물이 지구상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암컷 혼자서 새끼를 낳는 이른바 처녀생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유전자가 계속 이어졌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극히 안정적인 세상에서는 착취 전문가들인 기생충이 맹위를 펼치기 마련이다.

인간들의 세계건 동물들의 세계건, 어느 세계에서나 착취 전문가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들인가 보다. 기생충들은 자기가 침실이요 식탁이며 놀이터를 삼고 있는 숙주가 한결같아야지,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변하면 몹시 불안해 하다가 죽어버린다. 기생충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동물들이 기생충의 이런 약점을 파악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동물들은 아마 수백만 년에 걸쳐서 자기 자신의 몸으로 임상실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와 다른 하나가 섞여지면 제3의 다른 존재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아냈고, 유전자의 섞임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기생충의 사망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또한 알아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처녀생식이 아닌 자웅이체의 결합 즉 짝짓기 내지는 섹스를 통한 번식이 최고라는 것을 알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일부 식물과 거의 모든 동물들이 암수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짝짓기 혹은 섹스의 기원은 종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데서 찾아야한다는 얘기이다.

그나저나 고양이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 회수의 짝짓기 작업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인간은 왜 발정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연애와 섹스를 그토록 선망하는 것일까. 삶의 기쁨과 그 방식의 다양성을 추구함이라고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고 보면, 섹스란 역시 한 번 생각하고 두 번, 열 번, 스무 번을 생각해도 흥미롭기만 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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