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맨부커상’ 수상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그건’ 괴물이었다. ‘그건’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마’였다. 악마는 가까이 있었다. ‘그건’ 자신 보다 약한 사람을 해치고 내면의 ‘악’으로 무장한 채 우리 곁에서 숨쉬고, 먹고, 스쳐 지나갔다. 나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내가 가는 편의점에서 한 때 같은 라면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때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복불복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건, 숨 쉬고 있는 것은 그저 ‘요행’일 뿐이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거부

세계 3대 문학상이라는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거머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도 바로 그 ‘괴물’이 등장한다.

그 괴물 덕에 주인공 영혜는 고기를 삼킬 수 없게 된다. 그가 고기를 마치 핏덩어리 어린 생육의 역겨운 느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어느 날 꾼 꿈이 발단이었다.

“내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 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영혜는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다는 죄로 죽어간 개를 떠올렸다. 달리다 죽은 개가 부드럽다며 개를 묶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아버지의 모습. 그렇게 죽어간 개의 모습이 트라우마가 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죽음은 사람들의 ‘포식’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입 안에 고기가 들어가게 하는 주변의 ‘폭력성’은 그를 더욱 더 꿈속의 ‘피 웅덩이’ 속으로 몰아갔다.

웅덩이는 깊고 깊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깊은 잔인함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영혜에게 이 땅의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수많은 폭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 웅덩이는 마치 우물과 같아서 그저 뱀과 같아서 기이하고 역겨웠다. 돌아보기 싫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무엇’이 있었다. ‘그건’ 괴물이었다.

남편은 그녀를 그저 대꾸하지 않는, 무색무취의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해 결혼을 결정했다. 아침마다 갓 지은 밥과 생선, 국을 끓여댔고 더러운 양말과 팬티를 빨아 켜켜이 정리해두었지만 그건 그냥 평범한 일이었다. 그녀는 처녀 시절부터 하던 출판사 일도 밤늦게까지 조용히 해두었다. 돈을 벌면서도 영혜는 그 모든 일을 묵묵히 다 해냈다.

어느 날 불온한 꿈을 꾼 이후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그저 순순히 고기를 삼킬 수 없는 몸이 된 것 일 뿐이었다. 영혜의 아버지는 ‘아내가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사위의 불만에 딸의 뺨을 후려치고 억지로 이빨을 벌리고 입술을 벌려 고기를 처넣었다.

몸에도 피가, 손에도 피가,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어 입에도 시뻘건 피가 흥건한 모습이 떠올랐을까. 영혜의 손놀림은 누구 보다 빨랐고 그 어느 순간 보다 재빠르게 자신의 손목을 그을 수 있었다.

그녀가 채식주의자가 되기 전부터 평범에서 벗어나는 일이 한 가지, 바로 브래지어 하는 것을 힘들어했다는 점이다. 남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까지 힘들어 하지는 않지 않나, 자신에게 되물으며 영혜를 ‘기이하고’ ‘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영혜는 육식을 하는 남편에게서 냄새가 난다며 관계를 맺지 않는다. 남편은 화가 난다. “이 까짓 것!” 술의 힘을 빌려 그녀의 바지를 벗긴 뒤 필시 강간과 흡사한 그 상황에 흥분감을 느끼며 절정에 달한다. 혹 다음날 아내가 전날 일을 따질까 싶어 긴장했다가도 평상시와 다름없는 지루한 평온함에 안도하며 자신의 성적 폭력을 합리화를 한다.
 

계속된 악몽의 실체, ‘폭력 트라우마’ 여성들의 자아분열

영혜의 아버지는 폭력의 화신이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얻어맞던 유년 시절은 그녀가 육식을 하지 못하게 된 근원적 트라우마의 실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월남전에서 베트콩 7명을 죽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한때 살갑게 키우던 개를 죽이고 그 고기를 함께 먹길 강요했던 아버지. 그리고 동조하듯 그 폭력에 눈감고 함께 가해자가 되어 고기를 씹어 먹던 자신의 무력함이 봇물 터지듯 꿈으로 그리고 고기를 거부하는 몸으로 옮겨왔으리라.

작가는 그렇게 피해자이면서 어느덧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된 여성의 무력함에 항의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누구도 영혜를 도와줄 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그렇게 무방비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때 그녀의 엄마는 어디 있었을까. 분명히 흑염소를 고아 한약이라 속이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고기를 먹으며 힘을 내길 바랐던 엄마인데, 그 엄마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어쩌면 많은 영혜들은 폭력을 그저 오롯이 자신의 배로 받아들이며 시간을 흘려보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혜가 의지하는 사람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편도 아닌 언니다. 언니는 지친 어머니를 대신해 술국을 끓여주던 성실한 맏딸이었다.

변변한 돈 한 푼 벌어오지 못하는 예술가 남편을 약간이 비음 섞인 애교로 살뜰히 살피며, 열이 40도까지 들끓는 아이를 키우며, 밤 11시까지 대학가 화장품 가게를 일구며, 가장 노릇까지 해댔다. 하지만 언니 자신도 안다. 그건 강요받은 시스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온 삶이라는 것을. 숨을 끊고 싶어도 아이라는 혈육이 눈에 걸려 살아가는 것일 뿐, 영혜가 삶을 포기하려는 것과 별반 그녀의 삶의 목적도 다르지 않다. 그런 동변상련 때문이었을까?

영혜가 정신분열증 속에서도, 형부와 치정을 벌인 후에도 친언니를 따르며 의지했던 것은 그녀가 겪은 폭력의 한가운데 언니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폭력의 피해를 온전히 가슴 깊이 끌어안았던 그녀는 이제 인간이 아니길, 죽음에 다다르길 희망한다. 그의 소망은 나무로 향했다.

영혜는 어느덧 나무가 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바깥 창문을 보며 망상에 시달린다. 영혜는 친언니 품에서 아기와 같이 순수하게 꿈을 꾸듯 말한다.

“언니,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작가는 일상적인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의지를 그린다. 인간이 아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 식물로의 회귀야말로 죽음을 통해 욕망을 씻어내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평온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약한 모습에 끝내 마음이 편치 않게 한다. 이 작품이 책장을 덮고 이렇게 오랫동안 절절한 이유는 소설이 비단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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