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굴속 난장이들, 추모는 일상이 되고…
죽어가는 굴속 난장이들, 추모는 일상이 되고…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6.06.07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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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그리고 삶> 강진수

“굴속의 사람들”.

시인 황병승의 ‘눈보라 속을 날아서(上, 下)’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 내가 쓰는 모든 글이라는 글들이 다 얽매인다. 땅굴을 파고 그 굴속에서 살아가면서 굴속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난쟁이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굴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주어진 자신들의 은신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굴 밖의 세상을 잊어먹는 것이다. 굴 밖에 무엇이 있었는지, 태양이 있었는지, 잘 익은 곡식과 과일이 있었는지, 또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생명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굴속에는 오직 죽음 뿐, 죽지 못해 굴속의 사람들은 굴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인이 무슨 의도로 시를 쓰고 이런 표현을 부렸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 어차피 내놓아진 시는 시를 읽는 사람의 것 아닌가. 그러나 그 표현에 계속 묶여있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굴은 어둡고 눅눅하다. 내가 사는 곳, 사는 세상의 벽면을 더듬거려 볼 때, 나와 우리는 모두 눈이 멀어버린, 굴속의 사람들.

며칠 전에 도시의 굴속에서 굴속의 사람이 죽었다. 아침마다 붐비는 땅굴 속에서 열리고 닫히는 문짝 하나 고치고 있었다는 난쟁이는 굴속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여 죽었다. 기계가 죽인 것이 아니다. 난쟁이는 다른 난쟁이들이 죽인 것이다. 또 난쟁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죽인 것이다. 굴속에서는 자꾸 추모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추모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 우리의 굴이 바로 그렇다.

난쟁이의 식사에는 컵라면이 올라가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는 컵라면은 난쟁이의 징표일 것이다. 숟가락을 들고 면을 불려가며 식사를 늘려 먹었다. 그런 난쟁이의 이름 따위는 지워져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시건방진 착각이 컵라면을 먹는 난쟁이의 몸을 으깨 죽였다.

난쟁이가 아닌 사람들은 난쟁이가 사는 굴속을 괘념치 않는다. 또 난쟁이들도 그 굴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불만하지 않는다. 얼마나 비극적인 굴속인가. 심지어 난쟁이들은 굴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굴의 천장이 그들에겐 하늘이고, 가끔 부서져 바닥에 박히는 종유석 조각이 그들에겐 별이다. 별이 떨어져 바닥에 부서진다. 별이 추락한다.

추락하는 난쟁이. 난쟁이는 추락하면서 또 다른 난쟁이를 죽였다. 추모를 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굴속에서 난쟁이는 계속 추락한다. 난쟁이의 몸이 부서져 있어도 굴속의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땅만 보고 걷는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래, 사람이 죽었구나, 라며 그것을 그들은 추모라고 불렀다. 언제부터 추모가 어둡고 눅눅해졌을까요. 개중에 난쟁이 하나가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담담하다. 굴속은 어둡고 눅눅하기 때문이지.

난쟁이는 추락할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굴속을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치솟는 모닥불의 열기는 굴속의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다. 추모라는 것은 모닥불에 차가운 물을 붓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눈물은 뜨거워야만 해, 난쟁이가 추락하면서 외치는 소리에도 굴속의 사람들은 차가운 눈물만을 쏟는다. 추모에 대한 끊임없는 세뇌를 굴속에서는 교양과 교육이라고 부른다. 빠져나가지 못하는 굴속에서 저항과 분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굴속에 있는 것은 오직 노래다. 굴속에는 노래가 있다. 교육받지 못하는 난쟁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원래의 눈물만큼 뜨거운 것이다. 모닥불만큼 뜨거운 것이다. 굴속의 노래는 굴 밖의 것보다도 아름답다. 가락이 흐르고 어느 난쟁이 하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굴속은 노래로 가득 찬다. 모든 난쟁이들이 노래를 부른다. 사람은 굴속에 있어도 노래는 굴 밖으로 새어나간다. 어둡고 눅눅한 사람들이 부르는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노래. 노래가 지시하고 있는 것은 맑고 선명하다. 우리는 노래한다. 굴이 아닌, 우리가 노래한다.

추모가 지겨울 때 우리는 박차고 굴을 나서야 한다. 죽은 난쟁이가 마음 아팠다면 다른 난쟁이를 굴속에서 다시 죽여서는 안 된다. 굴 바깥을 구경도 못하고 죽은 난쟁이들을 위해서라도, 굴이 될 수 없는 우리는 박차고 굴을 나서야 한다. 황병승은 시 속에서 노래한다.
 

“불같은 터키 남자는 
불이 될 시간에 
타오르지 못해서 
날마다 신경질을 냈단다” (‘눈보라 속을 날아서 上’ 중에서)
 

 

굴속에 불을 지를 시간. 불같은 난쟁이는 불이 되어야 한다. 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시리도록 차가운 것에는 뜨거울 줄을 알아야 한다. 추모라는 것이 차갑고 어두우며 눅눅한 것이라는 생각은 죽지 않은 사람에게서 튀어나오는 오만이다. 단 한 순간도 불이 되어보지 못한 난쟁이의 비겁이다. 지금 사는 굴이 무너지면 다른 굴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세상에 굴은 필요 없다. 난쟁이는 굴이 아닌 집을 지어야 한다. 어둡고 눅눅하지 않은 집. 난쟁이가 더듬거리는 벽면에는 따뜻한 벽난로가 있어야 하고 덥혀놓은 우유가 놓여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굴속에는 오직 추락하는 별이 있다.

전철역에 또 다른 열차가 들어온다. 아파트에는 또 다른 사람이 몸을 던진다. 굴속의 벽에 부딪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간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람이 죽을 것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굴속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굴속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지금은 내가 아닌 다른 난쟁이의 죽음일지라도 운명의 쳇바퀴가 누굴 가리킬지는 세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굴속의 사람이다. 우리는 굴속의 사람이다. 그래서 언젠가 굴이 나에게 죽을 것을 명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선명하게 느낀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떠야 한다.

사람에게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겨우 불씨가 살아난 모닥불을 난쟁이들은 꺼뜨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굴이 사람을 죽일 수 없도록, 굴속의 사람들은 굴을 벗어나야만 한다. 사람만큼 중요한 굴은 없다. 사람만큼 깊고 너른 굴은 없다.
 

“오스본, 메기와 부기주니어 
그리고 떠나간 냐라키 우리는, 
우리들이 찾는 것은, 
우리들이 도망치듯이 찾아 헤매는 것은 
굴속의 사람들 
굴속의 노래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름다운 센텐스” (‘눈보라 속을 날아서 下’ 중에서)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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