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박상건의 치유의 섬과 등대여행기: 부산 영도등대-1회

▲ 영도태종대 해변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은 한반도의 남동단에 위치한 천혜의 양항인 부산만을 모체로 하여 발달한 세계 굴지의 무역항이자 우리나라 제2의 경제권인 동남임해공업벨트의 중심도시이다. 부산에는 총 40개의 섬이 있고 이 가운데 36개 무인도이다. 이들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다. 영도이다. 모두 0.4㎢ 이하의 섬들이지만 영도만은 면적 14.04㎢이다.

한국인에게‘아리랑’민요만큼 친숙하면서도 애잔하게 다가서는 가락도 없을 것이다. 전국민이 따라 부르는 비운의 혁명가 김산의 아리랑이 있는가 하면, 진도아리랑은 서편제의 한 많은 여인 송화의 아리랑 색채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한이 돌고 돌아 밀양아리랑을 만들었고, 아우라지 강물을 원망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안타까움은 정선아리랑으로 녹아들었다.
 

▲ 영도 태종대새

 

▲ 영도등대 가는 길

굶주림과 전쟁 상처 떠올려준 영도아리랑

6.25 최후 보루라는 낙동강 전선의 편린을 환태평양 바다로 퍼내며 물결치는 부산에도 한 많은 아리랑의 흔적은 남아 있다. ‘영도아리랑’이다. 부산 영도의 85번 버스종점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는 가난했던 그 시절 영도 아낙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숨 가쁘게 고갯길을 잇는다.

영도에 국마장이 생기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주민들은 영도 해안가로 몰려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식량이었다. 대신 바다에는 해산물은 지천으로 남아돌았다. 그래서 영도 아낙들은 말린 고기며 조개, 해초류 등을 머리에 이고 범일동 부산진시장까지 가서 해산물을 팔아 산 돈으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사왔다.

동삼동, 청학동, 신선동, 영선동 아낙네들은 무거운 해산물을 이고 아리랑고개를 넘어 봉래동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용미산 나루터에서 내린 아낙들은 다시 짐을 이고 범일동 부산 오일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가는 길은 해산물이어서 무겁고 오는 길은 쌀 보리자루를 이고 와야 해서 무거웠다. 지금도 영도 아리랑고개에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가게 간판들이 눈에 띈다.
 

 

▲ 등대 가는 길 이정표
▲ 영도등대

그림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 달리던 섬

영도(影島)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였다. 절영도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 올 정도라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붙여 절영도라 불려졌다. 뭍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이 곳 영도는 섬이기 때문에 맹수들이 없어 안전했고, 또한 조개 생선 열매 등 먹이를 구하기 가 좋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영도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조 중기까지는 목장으로 말을 방목한 곳이었다. 육지와 인접한 섬으로 말을 방목하기에 적당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던 탓에 예로부터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國馬場)이 있었으며 명마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열전’김유신의 조항을 보면 신라 33대 선덕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되새겨 김유신의 적손(嫡孫) 김윤중에게 절영도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후백제의 왕인 견훤이 절영도 명마 한 필을 고려 태조인 왕건에게 선물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도 영도를 ‘마키노시마(牧島)’라고 하였는데 일본어로‘말 먹이는 목장의 섬’이란 뜻이다. 해방 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옛 이름 절영도를 줄여서 현재의 영도로 부르게 되었다.

 

▲ 등대로 가는 길
▲ 영도등대

 

영도는 신석기 시대의 동삼동패총, 영선동패총 등으로 보아 부산지방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곳이라 추정된다. 패총이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쌓여 생긴 것인데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이 쓰던 유물이 썩지 않고 잘 남아 있어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영도는 선사시대부터 생활 여건이 당시로는 사람살기에 아주 알맞은 곳이었다.

대교동(大橋洞)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선인들의 주거지가 되어 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무인절도(無人絶島)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잇따른 침입이 두려워 주민들이 섬을 버려두고 타지로 이동한데다 초량왜관의 개설과 더불어 왜관과 가까운 까닭에 정착을 적극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1년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대교의 이름을 따서 대교동이라 불리었으며 해방 후 일본식 마을이름 변경 방침에 따라 대교동이라 불렀다.
 

 

▲ 태종대 등대길

부산의 살아있는 역사, 영도대교에서 태종대까지

1931년 영도대교 개통 때 인근 바다를 매립한 마을은 부산의 남항(南港)을 끼고 있다 하여 남항동(南港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봉래동(蓬萊洞)은 조봉, 자봉, 손봉 등 세봉우리의 산 이름을 고갈산(姑竭山)으로 불렀는데 절영도진(絶影島鎭)의 첨사(僉使)로서 가장 오래 재직한 임익준이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이라 명명했고 봉래산의 주맥(主脈)이 닿는 곳이라 하여 봉래동이 됐다.

동삼동(東三洞)은 상리, 중리, 하리의 3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후 영도가 빈 섬으로 남겨져 있을 때에도 동삼동만은 어장으로 어민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영도에 진이 설치되기 이전에 가장 먼저 부락이 형성된 곳이다. 동삼동 사람들은 매년 음력 3월초에 영도 동삼동 방파제에서 동삼풍어제, 속칭 용왕제를 올린다. 마을 전체의 풍어, 어부들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의 장으로 개최되고 있으며, 특히 무속신앙을 예술적으로 승화 하여 부락민과 인근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길놀이, 동해안별신굿, 선상용왕제, 선상퍼레이드 등을 함께 즐기는 민속축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 영도자갈마당
▲ 신선바위와 생도 앞 선박들

 

영도등대는 동삼동에 있다. 동삼동에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숨결이 닿는 태종대가 있다. 울창한 수목과 어우러진 기암괴석 그리고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태종대에서는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와 조도가 보이고,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보인다. 태종대라는 이름에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과 얽힌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첫째,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군사를 조련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는 이야기, 둘째는 태종이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후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곳의 해안 절경에 심취하여 활을 쏘며 풍광을 즐겼다는 이야기, 셋째는 태종이 사신으로 일본 다녀오는 길에 궁인들이 마중 나와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태종무열왕과 얽힌 사연이 많아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다.

태종대에서는 가뭄이 들 때마다 동래부사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래서 음력 5월 초열흘날 내리는 비를‘태종우’라고 불렀다. 2006년부터‘태종대 수국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태종대 안에 있는 태종사에서 35여 년 동안 가꾸어온 200여종 수국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부산시민과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국악공연, 오카리나공연 등 수국과 어우러지는 태종대의 자연향기를 나누고자 시작한 축제로 매년 열리고 있다.

 

▲ 태종대 노을

 

태종사 입구에는 영도유격부대 유적지비가 있다. 6.25 때 꽃다운 나이의 1200명의 유격대원 중 33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생존자들이 옛 동지들을 기리며 이런 글을 새겨 빗돌을 세웠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대한의 젊은 영도유격대원들은/ 한 푼의 보수나 대가 또한 바람 없이/ 다시 못 올 결의로 떠나던 날/ 태종대 이 소나무 저 바위 밑에서/ 머리카락 손톱 잘라 묻어놓고/ 하늘과 바다로 전후방에 침투하여/ 숨은 공 세우다 못다 핀 젊음/ 적중에서 산화하다.”

그렇게 해안으로 내려가는 숲에는 불에 타지 않는다는 아웨나나무, 백일홍으로 부르는 배롱나무, 목련, 그 시절 활을 만들었던 팽나무, 고기잡이로 사용한 때죽나무, 금식나무, 불면증에 좋다는 자귀나무, 수국, 그리움을 상징하는 상사화, 약으로 쓰이는 천남성, 유도화나무, 헛개나무, 후추나무 등 200여종의 식물들이 자생한다.

태종대 해안은 암석으로 이뤄져있다. 최고봉이 해발 250m에 달하며 오륙도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암석해안의 명승지이다. 영도등대를 비롯 여러 명소를 품고 있어 오래 전부터 많은 연인과 가족들의 산책, 데이트코스로 찾고 있다. 태종대 중턱에는 폭 7m의 순환 관광도로가 4.4㎞에 걸쳐 있으며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많이 찾아왔던 곳이다. <2회로 이어집니다.>

 

<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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