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박상건의 치유의 섬과 등대여행기: 부산 가덕도등대

가덕도는 진해시 용원동과 4㎞, 거제도와는 10㎞, 대마도와는 48km 거리에 떨어져있다. 가덕도는 보개산이 바다에 침몰됐다가 다시 솟아났다는 전설이 깃든 부산의 가장 큰 섬이다. 가덕도는 산과 섬이 잘 어우러져 있는 게 큰 특징이다. 부산시가 추천하는 갈맷길 5코스이기도 하다. 가덕도의 주봉인 연대봉은 459.4m 높이로 해금강과 거제도 앞 바다의 올망졸망한 섬들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통통대는 고깃배와 유유히 미끄러져 가는 여객선 등 다양한 선박들의 항해를 한 편의 자연다큐를 보듯이 말이 필요 없는 이미지 중심의 영화를 감상하는 심미안을 제공하는 그런 남해바다의 섬과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 가덕도등대가는 길

 

도심에서 산과 바다 감상할 수 있는 섬

가덕도는 불편한 배편에만 의존해야 했던 시절과는 달리 신항만이 매립되면서 해안도로를 따라 승용차로도 오갈 수 있다. 트레킹과 걷기코스로 제격이다. 산책로를 개발해 짧은 구간에서 잠시 여유를 만끽할 수도 있는 코스도 있다. 연대봉은 천성진성 쪽은 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에 속하고 국수봉 끝자락 마지막 줄기를 이어받는 남산줄기에 화룡점정으로 서있는 가덕도등대는 부산시 강서구 대항동 산 13-2 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산길이 산악인들의 차지라면 해안가는 모든 바다가 강태공들의 쉼터로 가는 곳마다 입질을 즐길 수 있는 포인트이다. 바다에서는 굴, 숭어, 대구, 청어, 미역, 홍합, 조개류 등 해산물이 풍부해 맛과 멋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 연대봉 표지판

 

가덕도는 자동차 포장길 외에도 곳곳에 여유로운 황톳길이 있어서 산들바람과 갯바람을 마시면서 오솔길을 따라 멋스러운 여행길을 떠나기에 안성맞춤이다. 드넓은 바다에 항만과 선박, 아담한 어촌마을과 방파제 그리고 포구, 굴곡의 해안선, 기암괴석의 오묘함, 푸른 숲 속의 새소리 등 자연이 최대한 베풀어주는 이 향기롭고 여유로운 여백과 풍경을 감상하고 조망하기에 도심에서 이만한 섬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부산에서 배를 탈 경우 가덕도의 첫 섬마을이 장항마을이다. 용원에서 장항~두문~천성~대항~외항포에 이르는 가덕도 정기여객선이 처음 닿는 곳이다. 마을 뒤로 독뫼산이 있고, 몽돌마당이 있는 백옥포, 코바위, 처녀총각바위, 입도, 호남도, 토도 등 낚시터로 유명하다. 아직도 해녀들의 물질을 볼 수 있다. 그만큼 해산물이 풍부한 섬이다.

 

▲ 가덕도 밤등대
▲ 가덕도 옛등대

 

두 번째 마을이 두문마을이다. 몽돌해변이 장관이다. 응주봉에서 뻗어 내린 홍착골 계곡 또한 일품이다. 홍착골 계곡은 섬 안의 숲속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앞바다에는 병산열도로 일컫는 갈미섬이 출렁인다. 일제 때 금괴가 침몰됐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낚시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 가덕도 외항포포구

호수처럼 펼쳐진 포구마을, 역사와 고기잡이 체험도

세 번째 포구마을이 천성마을이다. 연대봉의 중심 마을이면서 바다가 동그랗게 호수처럼 퍼진 고요한 어촌풍경이 일품이다. 가덕도와 거제대교 구간이 지나는 지점이다. 천성진성, 천성산 국군묘지, 일본군 고사포 진지 등 가덕도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유적이 있는 곳이다. 낚시터로도 유명한 마을이어서 곳곳에 낚시점과 민박집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앞 바다는 숭어 반 물 반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숭어천국이다. 재래식 숭어잡이 방식을 200년째 이어오고 있는 마을이다. 실제로 여행가서 이곳에서 3명이 30분 동안 숭어 배낚시를 했는데 70여 마리를 잡았다.

 

▲ 대항마을과 연대봉

 

대항마을은 가덕도 마지막 능선인 국수봉과 그 끝자락 남산의 가덕도 등대로 가는 길목이다. 등대로 향하는 산줄기 바로 전 포구마을이 외양포. 대항마을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소요된다. 가덕도 끝자락 어촌마을인 외양포는 정기여객선으로도 종착지이다. 해송과 몽돌이 어우러지고 패총과 선사시대 유물이 산재한다. 외항포까지는 드라이브를 통해 바다를 구경하면서도 갈 수 있고 걷기여행을 하면서 사색하는 섬 여행 코스로 잡아도 아주 좋다.

 

 

▲ 장항마을

외침 흔적과 적산가옥 등 100년 역사 보듬은 마을

대학원생들의 야외 세미나 장소나 대학생들의 엠티장소로 자주 활용되는 것이다. 그만큼 유서 깊은 마을이다. 100여 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00년 역사 현장을 재현하듯이 일본 적산가옥도 그래도 남아 있다. 역설적으로 외침을 가장 강하게 받은 마을이면서 오늘날 가덕도에서는 가장 외진 포구마을로 남아 시대의 뒤안길에서 옛 정취를 보듬고 묵묵히 살아가는 마을이다.

 

▲ 외양포 적산가옥

 

반대편 산 너머에 새바지 마을이 있다. 외양포 역사의 흔적을 잇는 그 연장선에 있는 마을이다. 동쪽 끝에 새바람을 많이 받던 곳이라 해서 새바지라고 부른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가덕도를 점령한 왜군들이 연합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해안 곳곳에 인공동굴을 파고 적기의 공습에 대피하고, 한편으로는 가덕도 해안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한 사격기지로도 사용했다.

굴의 모양은 1자동굴, T자동굴, 복식동굴 등이다. 장항마을 반대편에도 동선 새바지 마을이 있다. 역시 포진지였다. 새바지에서 눌차리까지는 새바지 둑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 둑을 ‘터질목’ 이라고 부른다.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 외양포

마음을 평화롭게 치유해주는 등대 가는 숲길

아무튼 외양포에서 등대로 가기 위해서는 269m 국수봉 숲길을 타고 가다가 마지막 남산 아래줄기까지 4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오직 나뭇잎 흔드는 소리와 새 소리뿐인 숲길을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숨을 고르며 뒤안길을 돌아보면 바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 낮게 엎드려 고요한 분위기를 그려내는 어촌풍경과 들판의 평화로움, 해안가 절경 등이 빼어나다. 그 순간, 적막감에서 오는 묘한 고독과 도심의 일상에 찌든 잡념들이 사라져가는 찰나를 만난다. 그렇게 마음이 평온해진다. 헝클어진 마음의 치유는 이렇게 시작되고 여행자의 평화는 이렇게 길 떠난 자만에게 주는 특전이다. 여행길을 걷는 모험가와 방랑자는 그렇게 자연 속으로 스며들면서 위대한 문화유산의 발자취가 되는 것이다.

 

▲ 등대숲길

 

여정은 지나고 나면 모두가 역사와 문화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게 등대로 가는 길은 들판으로 물을 공급하는 긴 가덕수로가 이어지고, 가덕도 기념물로 지정된 동백군락지 등 멋진 자연풍경이 좌우로 펼쳐진다. 등대 혹은 민박집에 당도하면 여장을 푼 후에는 해안가로 나가면 볼락, 감성돔, 망상어 등 고급어종이 잡을 수 있다. 어느 해안가로 나가든 해삼, 멍게, 고동 등 싱싱한 해초류를 만날 수 있다.

 

▲ 숭어강섬돔

 

등대로 가기 위해서는 두 번에 걸쳐 초소를 거쳐야 한다. 절차가 좀 번거롭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안전하고 조용하게 여정을 보낼 수 있다. 가덕도등대 앞바다는 말 그대로 선박박물관이다. 국내외 화물선, 여객선, 컨테이너선, 군함들이 모두 이 길목을 지난다. 세상에 선박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은가 싶어진다. 수많은 배들이 오고가면서 정해진 뱃길을 안전하게 오간다. 안전한 항해는 등부표 등 바다 곳곳에 설치된 항로표지 역할이 크다. 이처럼 등대는 365일 마도로스와 선박의 곁에서 해상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등대에서 하루 정도 머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배울 것인가? 이처럼 선박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등대의 사랑, 그 불빛처럼 사랑의 메신저가 되고 있는 등대원의 참 사랑을 실감한다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곧 베푸는 것이다.

 

 

▲ 외항포 그물질

등대여행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을 것인가

그렇다면 등대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사실 등대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꼭 좋은 일에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가 문명의 진전을 위해 유럽진출을 꾀할 때 그 출구를 바다에서 찾았고 싸움의 시작과 방어의 수단이 등대였다. 누가 등대를 먼저 만들고 등대를 점령하느냐는 전쟁승패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끊임없는 대륙진출 야망 역시 한반도 요충지에 등대를 세우는 일에 먼저 집착했고 그런 의도는 먼 훗날 역사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그렇게 우리나라 대부분의 등대는 일제 치하에서 만들어, 최근 들어 순수 국산 기술에 조형미를 더하며 한국적 등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등대에는 기쁨과 슬픔을 버무린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드리워져 있다.

 

▲ 일제시대 우물

 

육지에서 러시아인들이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길거리 표지판을 거꾸로 돌려놓아 적은 군사로 방어할 수 있었듯 섬나라에서는 등대를 이용한 해상 전략을 자주 폈다. 해적선들은 포클랜드해전에서도 독일과 영국간 보급선 방어와 탈취 작전 와중에 끼어들어 상대의 적이 하는 것으로 위장해 약탈하거나 함선이나 보급선으로 위장해 등대 아래 보급 창고를 털어내기도 했다.

또 암초에 장작불 등을 피워 거짓 등대(False fire)를 만들어 불빛으로 선박의 항해를 교란시켜 암초에 좌초된 선박으로부터 화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복잡한 해안선과 기상악화가 심했던 남아메리카의 카리브해와 영국의 코니쉬 해안이 그 대표적인 곳으로 이런 이유로 이곳을 죽음의 바다라 불렀다. 14세기 스코트랜드 알보스성의 아보트라는 사람은 암초 위에 소리를 내는 큰 종을 설치해 종소리로 위험을 알리기도 했지만 이마저 해적들이 떼버리고 난파선으로부터 금괴와 생필품 등을 약탈했다.

 

 

▲ 가덕도 선박

등대와 이순신, 전쟁과 선박의 발달사

이런 상황과는 반대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이순신장군은 일본군 침략에 맞서 적은 병사로 대항하기 위해 전남 완도 당사도 등대 건너 육지에 불을 밝혀 일본군이 바다로 오인해 항해를 가속화토록 유인해 배가 육지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지략을 펴기도 했다.

가덕도등대 앞 바다에 수많은 선박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문득, 기원전 55,000년경 소나무를 파내어 만든 카누를 이용해 호주대륙으로 건너갔던 뉴기니의 원주민들로부터 시작된 선박의 역사가 떠올렸다. 본디 선박의 용도는 맨 처음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배는 점차 군사적 경제적인 전쟁의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야만 했던 스페인, 태평양을 가로질러야 했던 미국 등은 장기간의 항해 부담 탓에 전쟁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보급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적기에 보급선이 올 수 있느냐는 문제는 곧 군사들의 사기 문제와 직결되었다.

 

▲ 등대계단
▲ 가덕도 등대 야경

 

이러한 보급선을 노린 해적들이 생겨나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국가 간의 충돌이 잦아졌고, 포클랜드 해전에서는 독일과 영국 간에 보급선 방어와 탈취 작전이 반복됐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보급선이 상륙할 수 없도록 막아 굶주린 왜군들의 사기를 땅에 떨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보급선의 역할 탓에 미국은 모든 함선에 한 달 이상 식량을 적재토록 했고 이라크전쟁 때도 보급선 문제를 가장 먼저 고려한 후 작전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등대에 가면 역사가 보인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을 비춰준다. 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등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관을 가르쳐 준다. 그런 역사의 깨우침은 이제는 우리 등대가 미래의 새 역사를 써야 하고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거대한 역사의 빛줄기와 동행하는 사람들. 조국영토의 최전선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 지난한 세월 속에서 때로는 외롭게, 때로는 굳건하게 여러 환경을 이겨내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저 바다의 안전과 평화의 메신저가 되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 그 등대원들이 오늘은 더욱 위대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험난한 시절, 저 절벽 위에서 오직 등댓불을 위해 살아갔을 그 시절 그 등대지기를 생각하며 영국민요 속의 등대지기 노래를 음미해본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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