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헛!> 김수복 칼럼

▲ 카트에 모셔진 신발 한 짝

 

나는 그 남자에게서 희망을 보았었다. 아니 어쩌면 그 남자 자체가 희망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이 땅에 그런 남자가 한 명이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그렇게도 반갑고, 고맙고, 뿌듯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 때문에 가끔은 누가 보고 있지도 않건만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어야만 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특조위 청문회장에서 증언을 마친 그가 절규처럼 쏟아낸 그 한 마디에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그 어떤 고매한 학자도, 그 어떤 명민한 평론가도 하지 못했던, 하고자 하지도 않았던, 어쩌면 생각조차도 해보지 못했을 그런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을 때 나는 기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개판’이 일상화된 나라에서 그런 보석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나온단 말인가.

확실히 그것은 아무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국가는 무엇이고 국민은 또 무엇인가 하는 개념이 명확하게 제대로 내부에 정착돼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흉내조차 내볼 수 없는 말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정의가 어떻다는 둥 떠들어대기보다 자신의 몸을 던지는 행동이 체질화돼 있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 세월호잠수사 고 김관홍

그렇게도 고매한 양심으로 저 파렴치한 정부 당국자들의 가슴에 비수를 날렸던 그가 죽었다. 치욕스럽게도 생활고 때문에 죽었다. 예전의 직업이었던 잠수사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면 넉넉하지는 않아도 모자람이 너무 많은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나가다가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잠수사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세월호 침몰 당시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달려가서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그는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했다. 시커먼 물속에 펼쳐진 끔찍한 장면들만 보고 돌아와야 했다. 그로 인한 마음 고통이 너무 심해서 다시는 물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그가 선택한 새로운 직업은 대리운전이었다.

‘좋은 일자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월호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박주민씨가 총선에 출마했을 때 그는 운전기사를 자원했다. 박 변호사가 당선 이후 국회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 어처구니없는 세월호 사건을 그나마 어처구니 있게 해달라는 뜻으로 운전기사를 자원했을 뿐 개인의 밥벌이 따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랬던 사람의 얼굴이 장례식장에 영정으로 걸렸다.

좋은 사람은 너무나 일찍 죽는구나. 이놈의 공식은 대체 어떻게 ‘돼처먹은’ 것인가. 빈민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제정구 전 의원이 작고했을 때 그런 철부지 같은 푸념을 했었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의 오늘날에 나는 또 다시 그런 철부지 같은 푸념이나 하고 있다. 어쩔 것인가. 내 손으로 고성능 폭탄 같은 것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파렴치한들을 폭파시켜 버릴 만한 강단도 배짱도 기술도 전략도 없는 주제에 달리 무엇을 할 것인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죽음은 분노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부에서 들끓는 분노는 밀폐된 공간을 꽉 채운 가스와 같아서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시켜 줘야만 한다. 그의 분노는 아마도 일반적인 수준을 크게 웃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치를 부르짖는 이 땅에서 그의 분노는 세월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다. 새 옷 입고 비행기 타고 외국여행을 다니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통령을 둔 나라의 국민은 그렇게도 슬프게 스스로 터져서 산산이 부서져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골프채

 

한 마디로 말해서 분통이 터져버린 그는 이제 한 장의 영정사진으로 이 서글픈 땅에 남았다. 그의 육신이 이 서글픈 땅을 떠나던 날 해가 질 무렵쯤에 나는 버려진 신발 한 짝을 보았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도무지 버려야 할 것 같지가 않은 그 신발은, 그것은 사실 오래 전에 본 것이었다. 그때는 그저 기이하다는 생각으로 사진이나 한두 장 찍어두고 말았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신발 한 짝이 잠수사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 홀연 떠올라 왔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인 것인가.

버려진 신발 한 짝에 내 마음이 아마 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잡힌 줄도 모르게 잡힌 채로 있다가 그날 문득 잡혔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나 할까. 눈을 살짝 감으면 버려진 하얀 신발 한 짝이 슬로모션으로 떠올라 왔다. 눈을 뜨면 그것이 커다랗게 확장돼서 눈앞을 가리는데 어떤 때는 침몰한 세월호와 동급의 거대한 여객선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아주 작은 통나무배가 되기도 했다.

신발 주인이 낡아서 더 이상은 못 신겠다는 판단을 하고 버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허접한 싸구려라서 내버린 것도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것은 한눈에 봐도 매우 비싼 골프 전용 신발이었다. 그러니까 주인이 골프를 치던 중에 무슨 일로 화가 불같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홧김에 그냥 벗어 던진 신발이었다. 그런 정도의 추리는 잔디 관리를 목적으로 골프장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볼 수 있었다.

잔디를 깎는 사람들은 기계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그런 섬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기 어렵겠지만, 잔디 수선이 전문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손과 발이 도구인 까닭으로 크게는 멀리서 날아오는 공을 볼 수도 있고, 작게는 땅강아지 한 마리의 더듬이까지도 세세하게 관찰할 수가 있다. 제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면 그냥 내버릴 정도의 대범한 배짱과 그 배짱을 받쳐주는 경제력이 없다면 골프장을 놀이터로 삼기 어렵다는 것도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 차례를 기다리는 골퍼들

 

버려진 신발을 보는 순간 나는 뭔가 눈이 부신다는 느낌이었다. 내 생애 그렇게도 깨끗해 보이는 신발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 신발이 신발 가게에 진열돼 있었다면 깨끗하다는 느낌은 아마 없었을 것이고, 그저 돈깨나 있어야 신어보겠다 하는 생각이나 잠깐 해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골프장을 누비고 다니는 카트의 트레일러에 실려 있었다. 카트는 속칭 그늘막이라 불리는 매점을 관리하는 여직원이 전용으로 끌고 다니는 이를테면 작은 트럭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버려진 신발 한 짝을 매점 관리인이 발견하고 주워서 트럭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신발을 발견하는 순간의 매점 관리인도 아마 내 마음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것을 쓰레기로 분류하지 않고 트레일러에 실었다.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것도 아니었다. 단정하게 올려놓았다. 한눈에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녀로서는 어쩌면 한평생 손으로 만져볼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르는 그런 고급한 신발을 아무렇게나 마구 던져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무슨 보물이나 영물을 대하듯이 조심스럽게 카트의 트레일러 위에 올려놓았다.

신발 한 짝을 가져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그녀에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냥 쓰레기로 분류해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이 세상 거의 모든 성실한 서민들이 그렇게 살아 왔듯이 습관적으로, 몸에 익은 대로 행동을 한 것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신발 주인이 나타나서 정중하게 치하라도 해준다면 고맙고 보람찬 일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조차도 그녀가 버려진 신발 한 짝을 주워든 목적은 아니다. 그녀는 다만 버려진 신발 한 짝을 주워서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인 것이다.

 

▲ 도처에 산재한 연못

 

그나저나 신발을 벗어 던진 뒤에 신발 주인은 자기가 버린 신발을 되찾으려 했을까? 아니면, 신발을 벗어 던지자마자 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가버렸을까. 그리고 그대로 신발 따위는 잊어버렸을까? 이 주제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무엇보다 신발이 한 짝이라는 거, 이게 중요하다. 장갑이 한 짝 떨어져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왜 신발을 한 짝만 벗어서 팽개쳤을까. 애초부터 신발을 한 짝만 신고 다닌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한 켤레를 통째로 버렸는데 한 짝은 멀리 어디로 날아가서 연못 같은 데로 빠져버린 까닭으로 한 짝만 남아 있게 된 것인가? 그래서 신발 주인은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다시 찾아 신을 수도 없게 되었고, 그래서 남은 한 짝도 그냥 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물론 발이 하나뿐인 사람이 골프를 치다가 짜증이 나서 신발을 벗어던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도 있기야 있겠지만, 두 발 두 손이 멀쩡한데도 남자 비서의 손에 양산을 들려 뒤를 따르게 하고, 여자 비서에게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게 하는 사장님도 숱하게 봐온 나로서는 신발을 처음부터 한 짝만 신고 다닌 사람을 상정해볼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 세례를 제대로 정확히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실로 굉장하다. 어느 재벌가의 막내딸이 스물일곱 살 때 자살을 했는데 그녀 이름으로 된 개인재산이 칠천억 원대에 이른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 뉴스를 접했을 때 나는 무한히 헷갈렸다. 돈이 그렇게도 많은 젊은 여자가 왜 자살을 한단 말인가. 만약에 내가 돈이 천억 원 정도, 아니 백억 원 정도만 있었어도 그런 어리석은 의문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끼가 토끼를 알아보고 사자가 사자를 알아보듯이, 돈이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의 어두운 민낯을 헤아릴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그게 잘 안 되기 마련이다.

 

▲ 잔디 수선사들

 

마찬가지로, 골프장을 드나들기 시작한 뒤에서야 나는 자본주의 세례를 제대로 정확히 받은 사람들의 마음과 그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눈에 티끌 한 점이 들어오는 것 정도는 서민들에게 일상이지만 자본주의 세례를 제대로 정확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치욕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치욕감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옷이 찢어질 수도 있고,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며, 조폭이 동원되는 방식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골프장에 산재한 연못을 수색하면 아마 각종 골프용품들이 무더기로 나올 것이다. 골프공은 공이지만 고무 같은 물에 뜨는 재질로 구성된 것이 아니어서 물에 빠지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린다. 골프공만 연못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한참 즐겁게 경기를 하다가도 공이 아슬아슬하게 구멍을 피해 가버리면 그 순간 용암이 들끓듯이 화가 나서는 그만 골프채를 높이 쳐들고 있는 힘껏 빙빙 돌리다가 손에 힘을 싹 빼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골프채는 허공으로 높이 올라가면서 빙글빙글 돌고, 돌면서 가속도가 붙은 채로 직진하다가 떨어지는데 세 개 중에 한 개는 연못으로 풍덩 빠져버린다. 연못의 물은 더럽기로 유명해서 누구도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잠수복이며 물안경 등등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면 들어가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건져낸다 한들 그놈의 골프채를 다시 사용할 골퍼는 거의 없다.

뿐만이 아니다. 골프 가방에 골프채를 잘 챙겨 넣어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주는 것은 경기보조원의 임무다. 경기보조원의 마지막 임무가 끝났을 때, 그리하여 운전자가 시동을 걸고 있을 때, 그 순간 그날 경기에서 ‘재미’를 못본 골퍼는 울화통이 확 터져버리기도 한다. 내가 앞으로 골프를 치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밖으로 뛰쳐나와서 일단 한바탕 숨을 씩씩거리고, 그리고는 트렁크 쪽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고 골프 가방을 꺼내 들고 높이 쳐들어 올린다.

 

▲ 그린에서 식사중인 까치

 

가방을 쳐들어 올린 상태에서 또 한 번 거친 숨을 뿜어내고, 그리고 있는 힘껏 던져 버린다. 던지는 순간 화가 다 풀려서 조용한 걸음으로 자동차에 올라타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버린 뒤에 오히려 화가 더 증폭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방금 전에 던진 골프 가방을 한참이나 노려보고, 노려보다가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두 발로 지근지근 밟아버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화가 풀린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면서 호탕하게 한 마디 한다.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네, 아야 김기사야, 가자, 가자.”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생각나는 시 한 구절이 있다.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 물론 그들은 이런 시를 들으면 무슨 개도 안 물어갈 소리냐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분통이 터져서 죽음에 이르고 만 잠수사의 의분 같은 것도 한심한 취향쯤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제 최종적으로 남는 문제가 하나 있다. 분통이 터져서 영정으로 남게 된 잠수사처럼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고 분해 하는 사람은 왜 항상 가난하고 힘도 없는가.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이 상해서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은 왜 항상 물려받은 재산도 많고 권력까지도 쥐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인간 존재의 법칙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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