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도 복지도 없는 지옥, 아우슈비츠 그 자체”
“형제도 복지도 없는 지옥, 아우슈비츠 그 자체”
  • 최충언
  • 승인 2016.08.0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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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형제복지원’ / 최충언 칼럼

부산형제복지원사건을 아십니까? 이 사건은 1975년에 만들어진 내무부훈령 제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사무 처리 지침)가 비극의 발단이었다. 이때부터 ‘부랑인 임시 수용’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의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은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훈령에 따르면,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사람이 많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으로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들을 모두 부랑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12년간 국가의 ‘위탁’으로 운영된 ‘사회복지시설’인 형제복지원사건은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형제복지원사건은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 일대에 있던 국내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에 대해 1987년에 김용원 검사가 수사를 하면서 언론매체에 보도되기 시작했고,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의 원생들이 탈출을 감행하면서 세상에 그 참상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김 검사의 수사를 부산시장, 검찰지휘부와 정부가 방해를 한다. 알다시피 박인근 원장에 대한 특수감금죄는 대법원에서 세 차례나 파기 환송되면서 무죄로 확정 되었고, 징역 2년 6월로 확정 종결되었다. ‘부랑인 청소’를 법령으로 지시한 ‘국가’는 아예 처벌받지 않았다. 동시대에 있었던 이런 지옥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한국판 아우슈비츠

찬송가 소리만 들어도 몸이 떨리고…

 

2012년 5월에 피해생존자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지난해 4월에는 피해생존자 11명이 삭발식과 함께 ‘형제복지원 특별법’제정을 요구하는 노숙농성을 국회 앞에서 12월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원 54명이 발의한 [내무부 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은 끝내 19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3000명도 넘게 수용하는 규모로 해마다 20억 원 이상 국고지원을 받아왔던 형제복지원은 납치, 감금, 강제노역, 폭행 등 온갖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513명이 숨졌다. (동아일보, 1987.2.2.)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에야 형제복지원은 문을 닫았지만, 피해생존자들은 여전히 고통의 기억 속에 갇혀 산다.

지난해에 YMCA 강당에서 가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집인 ‘숫자가 된 사람들’ 출판기념회에 간 일이 있다. 피해 증언을 듣는 도중에, 나는 탄식을 내뱉었고 분노하고 치를 떨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지도 않았고, 국가폭력의 피해를 지금도 몸으로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고통을 위무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 중에서 몇몇은 나를 형, 오빠라 부르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피해생존자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지 못한 것에 무척 아쉬워한다. 수용생활의 기억들 때문에 밤에 불을 켜놓고 자거나 불면증으로 술을 마셔야만 겨우 잠을 자기도 한다. 형제복지원 원장이었던 박인근,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불안해하거나 살의를 느끼기도 한다. 집에서 아내가 찬송가를 피아노로 치자, 형제복지원에서 많이 불렀던 곡이라며 몸을 부르르 떨며 몸서리치기도 했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옥도와 같았던 수용생활을 이야기하며 목 놓아 울기도 했다.

“밥은 꽁보리밥으로 냄새가 나고, 반찬은 지랄 같아요.”

“차라리 교도소가 나을 것입니다.”

나는 주차장에서 주차요원으로 알바를 하고 있는 피해생존자인 대우를 참 좋아한다. 어두운 암흑의 세상에서 벗어나 참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드는 동생이다. 부전역 앞에 살았던 대우는 1981년 열 살에 부랑아로 취급받고 형과 같이 형제복지원에 세 번이나 강제 수용되었다. 엄연히 아버지는 배를 타시고,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대우에게 고통스럽겠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서 벗어나려면 겪었던 일들을 대학노트에 조금씩 기록을 해보라고 권했다. 일부이지만, 페이스북에 올린 대우의 강제수용 경험담을 살짝 들여다보자.

“악몽 같은 생각들을 내 뇌리에서 꺼내는 것조차 싫지만 이제는 다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형제복지원은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만 기다려지는 곳입니다. 눈을 뜨면 오늘은 조용히 편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죠. 조장, 서무, 소대장들한테 얼차려나 매질을 당합니다. 자기들도 부랑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와 놓고서 완장을 찼다고 소대원(일반사람)들을 괴롭히고 기합을 줍니다.

 

인물이 귀여우면 밤에 자기 옆에 자라고 하면서 강제추행을 일삼습니다. 남자가 남자끼리 하는 것(동성연애)을 강제로 하고 그럽니다. 소대원은 맞지 않으려면 몸을 줄 수밖에 없죠. 안 맞고 편하게 살아남으려면 말이죠.

밥은 꽁보리밥으로 냄새가 나고, 반찬은 지랄 같아요. 김치는 소금에 담갔다가 뺀 거구요. 전어젓은 냄새가 장난이 아니어서 먹지도 못합니다. 오후 세시쯤에 빵을 하나씩 주는데 빵에다가 소다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빵이 아니라 소다빵이라고 하는 게 맞네요. 그래도 배가 고프니 먹을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교도소가 나을 것입니다. 지옥과 같았던 형제복지원. 난 공부도 하고 싶었고, 학교 친구들도 사귀고 싶었습니다. 난 고아 아닌 고아로 잡혀간 한 사람입니다. 강제로 잡혀가서 배우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나요?”

 

호의호식하는 원장과 딴청 부리는 국가

 

가장 안타까운 일은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스러움이다. 총기 있고 영리했던 대우는 서울 ‘소년의 집’에서 공부를 했고, ‘돈 보스코 직업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다가 형의 꼬드김으로 도망을 쳤다. 그 뒤, 소년원을 전전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두 딸의 어머니인 또 다른 피해생존자가 언젠가 내게 말했다.

“오빠, 오빠. 난 지금도 있잖아? 교복을 입고 있잖아? 학교에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다니고 싶어!”

이 말을 하고는 내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난 그저 그녀의 피맺힌 말을 들어주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천 억대의 자산을 가지고 호의호식하는 박인근 일가와 형제복지원을 국가는 무엇 때문에 살려주었는지 알려달라고 피해생존자들은 절규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지 최소한 우리가 왜 그 형제복지원에 들어가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단지 가난해서? 단지 몸이 불편해서? 단지 나이가 어리고 길을 잃어버린 아이라서? 도대체 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형제복지원에 갇혀야 했던 것입니까? 그들은 국가에 묻는다.

피해생존자들의 기억 속 형제복지원은 ‘형제’도 ‘복지’도 없는 지옥 그 자체였으며, 국가가 ‘위탁’이라는 형식으로 만든 ‘아우슈비츠’였다는 형제복지원 대책위 집행위원장 조영선 변호사의 말은 곱씹어볼만하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검색창에 ‘형제복지원’ 다섯 글자만 쳐도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뉴스, 게시판, 블로그, 카카오스토리, 카페 글, 트위터, 이미지, 동영상이 즐비하게 나온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게 되면, 그들에게 한 줌 햇살 같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대가 그들이 절실하게 바라는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이루어내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피해생존자들과 만나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들어주는 사람들’이 되면 어떨까요?

<외과의사이며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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