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여백

'소설-겨울 코스모스' 54회

이율 작가l승인2016.08.08 14:4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귀향

밤새 눈이 내린 어느 날 아침이었다. 경훈은 간수에게 부탁해 미리 받아 두었던 주홍색의 보자기로 한쪽에 쌓여있던 책들을 깔끔하게 쌌다. 그리고 나머지 짐들을 대충 정리한 뒤 때마침 들어온 간수와 함께 독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간수가 안내하는 대로 출소절차를 마쳤다. 얼핏 마당을 보니 죄수들이 저마다 나무로 짜여진 널판지와 싸리나무 빗자루 등을 이용,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눈은 멈췄다. 대신 하늘엔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눈 위에 분신을 발산하고 있다. 경훈은 오랜만에 시각을 자극하는 그 분신들 때문에 이마를 잔뜩 찡그려야 했다.

언젠가 보았던 육중한 철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열리자 마당에 있던 죄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부러운 듯 경훈과 다른 몇몇의 출소자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그저 따뜻한 햇살만이 온 세상을 뒤덮은 눈을 포근히 감싸고 있을 뿐…. 언젠가 남순과 함께 보았던 교도소 앞의 소나무들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경훈과 일행들을 지켜보았다. 경훈은 뭔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남순은 그곳에 없었다. 남순을 만날 때 불어왔던 차디찬 바람도 없었다.

경훈은 한쪽 어깨엔 책 보따리를,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국방색의 가방을 든 채 소나무 숲 옆으로 뚫어놓은 길을 따라 마치 산책을 하는 사람 마냥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자니 예의 그 조그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남순과 함께 들렀던, 그래서 막걸리를 마셨고, 새로운 인생을 다짐했던…. 그대로였다. 그때는 가을이었는데. 바람이 불었었고 어깨 위까지 내려오는 남순의 머리가 휘날리는 것을 보았는데…. 앞서가던 몇몇이 가게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잠시 주춤했던 경훈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낯선 출소자 서넛이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약간은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골라 앉았다. 머리카락 마저 듬성듬성 빠졌고 얼굴이 한층 더 말라붙은 것 같은 모습의 노파는 이미 경훈을 잊은 듯 했다.

경훈은 그전처럼 막걸리와 두부를 시켰다. 곁의 출소자들은 시끌벅적, 넉지근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다. 가끔은 힐끗힐끗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으나 경훈은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키고 두부를 크게 한 점 떼어 입에 넣은 다음부터는 깨진 유리창 밖으로만 시선을 던져 놓고 있다. 하얀 설원. 원천이 어딘지 모를 한줄기 가는 바람이 희미한 눈보라를 일으키며 교도소 쪽으로 밀려갔다. 갓 15개월이 지났건만…. 경훈의 세상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남순과 경훈을 연인 사이로 알았던 이 가게의 노파. 경훈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피었다. 남순과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던 그때를 떠올린 것이었다. 낙엽이 떨어졌었다. 눈이 쌓여있다. 그 눈처럼 노파의 머리와 얼굴에도 세월의 편린이 그때보다 잔뜩 묻어났다. 갓 15개월이 지났는데. 너무나도 긴세월이었다. 너무나도….

경훈은 몇 사발을 더 따라 목안 깊숙이 부어 넣고, 두부 한 모를 다 먹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야 할 일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용해되는 막걸리의 차가운 기운이 싸늘하게 위장을 자극해왔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뉴텍미디어그룹  |  등록번호 : 서울다07108  |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정서룡  |  발행소 : 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9길 27(숭인동) 동광 B/D 2층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광고국장 : 황석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Copyright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  master@weekly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