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울타리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 최충언
  • 승인 2016.08.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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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최충언 칼럼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시골의 풍경 속에는 집집마다 울타리가 있었다. 정겨운 싸리 울타리를 지금은 보기 어렵다.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일이다. ‘만남’에 대한 신영복 선생의 글에 공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라는 것이다. 마치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만남이 아니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서운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준다는 것은 어쩌면 바보짓일지도 모른다.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알피(Alpi)라는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일 때문이다. 요즘처럼 조선업계를 필두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부는 경기가 좋지 않은 시절에는 이주노동자의 취직자리를 알아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녹산공단에 있는 지인을 통해서 알아보아도 “경기가 안 좋다” “외국인이라 분위기를 흐릴 수 있다” “이런 불경기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먼저 짤린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거절의 변을 읊어댄다. 전공을 살려 치기공 분야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동창에게 부탁을 해도 돌아온 답은 “필리핀으로 가는 게 정답”이란다. 답답한 노릇이다. 돕긴 도와야 하는데 말이다.

부산교구 노동사목에서 의료 자원활동을 하면서 알피와 만났다. 벌써 십년도 넘었다. 마닐라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치과의사 면허를 따지 못한 알피는 나름 꿈을 찾아 한국에 오게 되었다. ‘도로시의 집’에서 치과진료에 참여하기도 하고 환자들의 진료차트 정리도 하고 통역도 하면서 더욱 친해졌다. 알피는 이주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소인 ‘도로시의 집’에서 십 년째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많은 의료진들이 자원봉사를 지원했고, 지금도 초량성당에서 영어미사 뒤에 꾸준한 진료가 십 년째 이루어지고 있다.

알피와 나는 좀 특별한 인연이 있다. 6년 전, 중앙성당에서 한국여성과 혼배성사를 할 때 나는 알피의 아버지 노릇을 했다. 마닐라에 계신 어머니가 심장병이 있어 비행기를 타지 못해 결혼식에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폐백도 받았다. 그 뒤로 알피는 나를 “Dad”로 불렀다. 양산, 안산, 경주, 진영, 김해, 부산 등지에서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고된 노동에 힘들면 물리치료를 받으러 오고, 장염으로 입원하기도 했으며, 항문주위에 염증이 생겨 직접 치루수술을 해주기도 했다. 행복하게 잘 사는가 싶더니 최근에 전화가 왔는데 코뼈를 다쳐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문제가 심각했다. 부부간의 금슬이 깨진 지는 오래됐고, 네 살 난 아들 도미니크를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태 전에 알피 부부와 도미니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혼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비골절 수술은 잘 마쳤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모처에서 한 달 간 머물게 되었다. 거기서도 불편한 생활이 계속된 모양이었다. 수녀가 싫어하는 눈치며, 언제 나가느냐고 자꾸 물어본다고 했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하기에 일자리가 필요하고, 당장 잘 곳을 걱정할 처지였다. 아는 동생네에 빈 방이 하나 있어 어렵사리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 날 밤에 바로 짐을 싸서 나와 잠자리 문제는 해결되었다.

‘바자울’이라는 부산교구 노동사목에서 달마다 펴내는 소책자가 있다. ‘바자울’은 대나무, 갈대, 수수깡 따위로 발처럼 엮어 만든 울타리라는 뜻으로 순 우리말이다. 이 책자에 알피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의료 자원활동가로 지내면서 비자 문제로 필리핀으로 다시 떠날 때, 6년 동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내용이었다.

 

 

“‘나한테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등이 아파서 치료를 받으려고, 가톨릭이주노동자센터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의사 선생님이 계시는 병원에 갔을 때 선생님한테서 들은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도 없는데, 알피는 나름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곤경에 처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는 것,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연대성의 원리일 것이다. 연대성의 원리는 개인끼리 또는 개인과 사회, 민족들 간에 상호 의존과 유대를 바탕으로 서로의 책임을 지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서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이웃과 자신의 선익을 위해 투신하고자 하는 결의이고, 분열을 넘어 일치를 추구하는 게 연대이다. 이런 연대성의 영적인 힘은 바로 이웃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놓고, 화해하고,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고자 하는 다짐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주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바자울’이 되어 주는 것.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은 알피의 일자리 얻는데 적은 힘이나마 보태는 일이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도로시의 집’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을 믿는 의료팀 자원활동가들의 수고로 십 년째 이어오고 있듯이, 굳건한 연대로 의료소외계층과 이주노동자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며, 우리의 주인임을 고백한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서 12,16)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사진 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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