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생각> 똘레랑스 / 강진수

얼마 전 프랑스 니스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테러가 발생해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희생당했다.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고, 작은 시골 마을의 존경 받는 노신부가 소년 테러범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연달아 발생해 충격을 더했다. 이슬람 극단 세력 이슬람 국가(IS)에 의한 테러가 프랑스를 계속해서 목표로 삼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보자면, 프랑스라는 국가는 스스로의 정체(政體)와 국민이라는 공동체적 요소가 테러 주체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고 느끼고, 이에 대한 방어로서의 ‘정당한’ 폭력 행사를 논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세계의 경찰을 자부했던 미국이 그러했고, 그 우방인 영국과 여러 서방 국가들이 그래왔다. 물론 프랑스도 역사적으로 그런 명분의 폭력을 행사해온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또는 저번 테러 사건들을 조명하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무엇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는가에 대해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국가로서, 또는 세계 사회 속에서의 정치적 구성원으로서 취하는 이해타산적인 선택이 작용하기보다는 어떤 정신과 감성의 작용이 테러 이후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똘레랑스. 그것은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택이다. 숫자가 나타내지 못하는 가치관이나 정신적 작용이 선택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똘레랑스, 즉 관용이라는 윤리적 또는 방법론적 가치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테러에 대한 대응과 자세가 달라지려는 움직임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프랑스 철학과 사상적 교육, 그리고 생활환경이 다양한 가치관을 낳으면서 동시에 똘레랑스라는 프랑스 공동체를 묶어줄 수 있는 아이디어가 과거부터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똘레랑스가 외부의 침입 또는 공격에도 작용한다는 것은 실로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전쟁과 테러, 제국주의적 침략이 난무했던 지난 19∼20세기 동안 똘레랑스는 어디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었는가.

기껏 이제 와서 똘레랑스냐는 의문과 반발이 들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변화는 그 순간이 어쨌든 변화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변화의 기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폭력으로 대할 때 비로소 누군가는 똘레랑스라는, 관용이라는 단어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항상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외치던 관용에서 이제는 폭력의 주체, 주인공들이 관용을 외친다. 그만큼 역사가 바뀌고 시간이 흘렀으며 생각이 많이 자라나고 변한 것이다. 테러의 효율성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만, 그리고 프랑스에서 시작된 변화가 아니다. 세계에서 스스로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오만함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변화해야만 하는가. 왜 관용해야만 하는가. 그간 역사 속에서 늘 타오르던 증오와 이기심, 폭력의 불씨가 왜 꺼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의 관용에서 시작되고 있다. 윤리적으로, 가치적으로, 서열상으로,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누군가 또는 다른 공동체를 틀린 것으로 낙인 찍어버리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살기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세상을 우리의 세대는 꿈꾸기 시작했다.

똘레랑스라는 논제는 테러와 폭력의 문제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성 가치관의 변화와 성역할, 유리천장의 붕괴, 장애 인권, 경제적 약자와 강자 사이의 평등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사실은 똘레랑스라는 가치관을 에둘러 싸고 있다. 그 중 가장 일부분만이 무조건적 테러라는 무자비하고 근거 없는 위협 속에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증오로만 가득한 테러에 대한 대응책으로 세계는 천천히 똘레랑스를 중심으로 서로 맞잡은 손을 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근거가 전무후무한 증오를 기반으로 한 테러를 또 다른 증오로 대꾸한다는 것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시민들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벨기에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에도 그들은 테러의 원인을 무조건적으로 무슬림에 돌리고 사태를 일단락 지으려는 것이 아닌, 명확히 원인을 규명하는 동시에 이유 없는 증오를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브뤼셀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다 같이 존 레논의 ‘Imagine’을 어깨동무하면서 부르는 모습은 그런 똘레랑스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프랑스 파리의 시민들이 광장에서 ‘나는 IS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들고 있는 무슬림 청년을 껴안아주는 모습 역시 그렇다. 우리는 서로 맞잡은 손을 풀지 않고 더 꼭 껴안고 잡아줌으로써 관용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똘레랑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론적인 배경에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토론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똘레랑스란 사람이다. 사람이 곧 관용이고 똘레랑스인데, 우리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서로를 죽이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믿을 것 역시 사람 밖에 없고, 잡을 것이라곤 서로의 손 밖에 없다. 우리는 똘레랑스다. 이 한 마디 말이 버겁다면 결코 지금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리를 두고 경계하면 불붙은 증오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들불은 꺼지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곧 다른 불씨가 다른 들에 불을 옮길 뿐이다.

우리는 실천에 옮기는 것을 망설이면 안 된다. 망설이지 않게 하는 힘은 곧 감성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감정들이 아닌, 누군가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것이 서로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실천, 감성으로부터의 관용이란 곧 그런 것이다. 그런 관용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우리는 근대 사상가 홉스가 주장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란 단순하게 내 몸의 안위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에 대한 투쟁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사회와 그것이 만든 구조다. 현재 IS의 테러가 위협하고 있는 것은 개개인의 사람이며, IS는 하나의 구조다. 구조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

헤게모니, 쉽게 말하자면 권력 간의 투쟁은 결국 사람을 죽인다. 그렇기에 사람은 살려고 사람으로서 더 똘똘 뭉치게 되기 마련이다. 똘레랑스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이 곧 똘레랑스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유 없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죽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도 타의에 의한, 이유 없는 죽음. 누군가 그런 것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강렬하게 저항해야 한다. 저항은 그 어느 것보다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똘레랑스를 두 손에 쥐고서. 옆에 있는 누군가를 꼭 안아줄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이상(理想)은 끊을 수 없는 마약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정표다. 우리는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선 안 된다. 아무리 현실이 가로막더라도. 앞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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