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올림픽 체조요정 시몬 바일스에 대한 단상

그렇게 배웠다, 고 해서 꼭 그게 맞는 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역사가 그렇고, 예를 들면 과학이 그랬고. 종교라든지 가정교육이든지 얼마든지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민주운동이 폭동으로 가려지거나 독재를 혁신으로 꾸며낼 수 있고, 늘 우주의 중심이던 땅이 하루아침에 태양을 중심으로 맴도는 행성이 될 수 있고, ‘괴짜들이나 타고 다니겠다’ 비웃음을 샀던 말 없는 마차는 이제 온 국민을 괴짜로 만들었고….

한 세기를 지나 겪어온 사람이라면 더 느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옳았지만 오늘날 틀린 것. 가장 대표적으로는 인종과 여자를 꼽지 않을까. “옛 시절엔 여자가…” “감히 잡종이…”로 시작된 어두에 이미 청자의 귀는 닫힌다. 그래서 길게 소통하며 살고 싶다면 우린 늘 언어에, 단어 하나에 조심해야 한다.

 

▲ 사진=유튜브 캡쳐

 

얼마 전까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화제로 곳곳이 뜨거웠다. 어렴풋한 2002년 월드컵, 거리가 붉은 악마로 물들던 때만큼 열광적인 응원은 아니겠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선수들의 승패에 눈물과 기쁨을 함께 나눴다. 특히 이번 올림픽은 펜싱과 사격에서 드라마같은 역전극을 연출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선사해 스포츠와 대중의 벽을 허물었다.

응원하는 사람이 되레 위로와 격려를 받는 스포츠의 참맛을 본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레 우리 선수단을 넘어 일부 외국 선수에게 이어졌다. 그 중 하나가 시몬 바일스다.

여자 기계체조 종목 다관왕에 오른 19세 소녀 시몬 바일스. ‘The BILES’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을 선보이며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줬다. 145cm 작은 키에도 단단한 체구와 매끈한 근육은 이제까지 여자 기계체조에서 강조하던 ‘여성성’을 벗고 힘과 탄력을 앞세운 새로운 탄환이 되었다. 수 바퀴를 회전하고도 발을 바닥에 꽂은 듯 안정적인 착지에 관중은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그녀의 동작과 동작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그녀의 불우한 유년이 공개되면서 누리꾼의 관심은 한층 뜨거웠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간절할 나이에 그녀는 약물과 알코올중독에 빠진 친모 밑에서 어렵게 자라야 했다. 그러다 6살이 되었을 무렵 외조부모에게 입양되어 친부가 누군인지 알지 못한 채 할머니를 ‘엄마’, 할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자랐다.

자라온 환경 탓이었을까. 바일스는 달궈진 쇳덩이처럼 상처에, 충격에 더 강해졌다. 그녀는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어린 어른’처럼 행동했다. 5살 때 처음 체조를 알게 되었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주 32시간씩 체조 훈련에 매진했다. 당시 소녀의 나이 13살이었다.

바일스는 2013년 세계선수권 개인종합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리우 올림픽은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으며 출전한 그녀의 첫 올림픽이었다. 역시나 대단한 활약상을 보이며 기계체조 여자 단체전 금메달 획득, 개인종합 4종목 우승으로 2관왕 등극에 성공한 것이다.

흑인 선수로는 최초였다. 이 때문에 같은 피부색의 자메이카 우사인 볼트나 같은 국적의 마이클 펠프스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나는 네그트 우사인 볼트, 마이클 펠프스가 아니라 퍼스트 시몬 바일스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당돌한 인물이 되었다.

그녀가 한국인이었다면, 우리나라 언론에 또 수많은 구설수에 소위 ‘흙수저’로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녀는 미국인이었고 한국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흙’을 대신하여 잡아낼 강력한 특징이 있었다. 그녀는 흑인 여성이다.

‘퍼스트 시몬 바일스’라는 당찬 그녀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미국 흑인 바일스는 흙수저라는 수식어를 대신해 ‘흑진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검은색의 보석. 방송 3사 언론 주요뉴스에도 버젓이 합성어 ‘흑진주 바일스’를 사용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것에 분노했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며 분노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이 글을 읽는 그대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게 왜?”

“흑진주, 나쁜 뜻은 없잖아요. 흑인이라고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릴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요. 길가에 널리고 널려 무가치한 흙돌멩이보다는 작은 알맹이 하나에 몇 십만 원의 값이 매겨지는 보석인데…좋은 말 아닌가요?” 그렇다. 쓰는 이의 의도가 불순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좋은 단어를 썼다하여 좋은 의미가 나오란 법은 없다. 생각 없이 성별을 지칭했던 ‘여교사’ ‘여학생’, 어떤 독자가 읽느냐에 따라 괜찮을 수도 불편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또, 예컨대 그대가 해외에 나가 친구를 사귀었다 치자. 말과 마음이 잘 맞았고,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내 외국인 친구는 아쉬움과 기쁨이 섞인 환한 표정으로 당신에게 인사를 한다. “넌 다른 한국인이랑 좀 다른 것 같아! 또 보자!”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가 의도한 것은 칭찬이 맞으나 그대에게 도착한 것은 칭찬이 맞는가? “넌 다른 여자(남자)랑 다르네?” “넌 다른 도련님(아가씨)들이랑 다른 것 같아!” 결국 한국인이라는 것에, 여자(남자)라는 것에, 혹은 금수저 물고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온 재벌 2세라는 것에 싸잡아 욕먹는 건데 나라고 흑진주, 김치 아닌 김치녀를 피해갈 수 있을까?

같은 맥락 속에 흑진주라는 단어는 이렇게도 읽힐 수 있다.

“흑인은 원래 치켜세워줄 감이(혹은 금메달감이) 못되지만 넌 좀 특별한 흑인이니까 조금은 인정해줄게.”

왜 바일스가 그냥 바일스가 아니라 흑인 바일스여야 하는지, 또 수식어가 필요했다면 그녀가 가진 수많은 장점과 매력 가운데 하필 피부색을 골랐어야 했는지. 우리는 그녀가 품은 생각, 가치, 경험으로 이뤄진 특별한 존재를 단지 ‘흙돌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흑색 돌멩이’라고 가둘 수 없다. 길게 소통하자. 내가 모르는 불편함에도 관심을 가지려 한 번 더 돌아보는 것,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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