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태국에서 살아보기, 사랑하기-2회

사람 냄새가 국수 냄새처럼 나는 골목

그날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이 축축하게 침대를 적신 채로 아침을 맞았고 주어진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실은 몸이 안 좋더라도 끝까지 일행들 사이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의 관습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자꾸 내가 민폐로 남는 것만 같아서 먼저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혼자서 낯선 나라의 지하철 토큰을 사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의 역사까지 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매가리 없는 팔 다리를 전철 좌석에 살짝 기대어 놓고, 도착지까지 잠깐 눈을 붙였다. 주위에는 온통 낯선 사람들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또 한편으로는 외로운, 짧은 순간의 여정.

열 정거장 정도는 지났을까. 내려야 할 역에 내리고, 계단을 걸어 다시 땅 위로 올라섰다. 몸은 여전히 눅눅했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택시를 혼자서 잡아야만 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내 도착지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라서 택시들이 굳이 태워주려 하지 않았다. 두세 개 정도의 택시를 그냥 떠나보내고, 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혼자가 될 수 없다. 다시 일행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 속에서 나를 잃고 지내게 될 것이다. 결국 길도 대충 택시를 타면서 그동안 익혔겠다, 어림짐작으로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눅눅한 몸은 그날의 습한 날씨와 마주치면서 더 무거워졌다. 나는 무거운 사람.

 

 

 

몸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발걸음을 움직였다. 큰 길을 따라가다가 금방 좁은 골목길로 접어 들었는데, 아마 그동안 택시를 타면서 내가 걷고 싶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을 것이다. ‘라차다피섹’ 골목에는 좁은 간격으로 집과 가게들이 붙어 있고, 사람들과 떠돌아다니는 개들이 골목 양 가를 거닐고 있었다. 국수를 파는 가게의 솥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생선을 굽는 화로도 곳곳에 보였다. 라차다피섹에서는 국수를 먹는가. 사람들은 국수를 먹으면서 국수자락 같은 대화들을 나누고. 날씨가 후덥지근하더라도 사람들은 따뜻한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내 아픈 몸은 벌써 그 골목에서 국수를 말고 있었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나눠먹을 국수 한 그릇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 냄새가 국수 냄새처럼 나는 골목.

국수 같은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빗줄기는 무겁고 강했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정신이 들어 부리나케 근처의 편의점으로 몸을 피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뭐라도 사야겠다는 마음에 당연히 우산을 찾았다. 우산은 조잡한 것에 비해 값이 꽤 나갔다. 우산을 사서 편의점 건물의 처마 밑으로 나왔지만 함부로 우산을 쓰고 돌아다닐 빗줄기가 아니었다. 처마 밑에 놓여 있는 의자 하나에 무겁고 눅눅한 몸을 앉혔다. 비가 오자 아무도 골목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나만 비 오는 골목 한 편에 앉아 있다. 갑자기 울음이 났다. 비는 아픈 몸을 더 쑤셔댄다. 향을 피우고, 연기를 맡았다. 우산은 사버렸지만 쓸모가 없다. 아무도 이런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지 않는다. 앉아야 한다. 앉아서 잠시 쉬어가야 한다.

 

 

눈물이라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게, 같은 물이 떨어진다고 그렇게 쏟아져 내렸나보다. 그러나 비는 금방 그치고, 눈에서도 금방 그쳤다. 다시 골목을 걷는다. 다시 걷자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인다. 눈물은 눈을 씻어내 준다고 들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눈이 건강한 사람. 나는 새로 가진 눈으로 새로 골목을 바라보고. 꽤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우산을 아까의 의자 옆에 그냥 두고 떠났다. 누군가 쓰겠지. 누군가, 잠시 쉬어가지 못하는 그 누군가가. 그러나 비가 오면 잠시 쉬어가야 한다. 나는 잠시 쉴 수 있는 골목을 빗속에서 보았고, 내가 바쁘게 걸어온 지난 골목도 볼 수 있었다. 쉬어가다 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온통 시멘트 건물에 엉성한 포장도로만 있는 줄 알았던 라차다피섹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목공소와 여러 공방 가게에서는 현관에 새장을 놓고 새를 기른다. 개는 길러지지 않고 자유로우며, 새는 날아가지 못하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사람은 쉬어가지 못하고 국수를 말아 먹는다.

숙소로 돌아와서 방 발코니에 한참 기대어 있었다. 침대에 바로 누우면 몸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아서. 발코니에서 다시 향을 피우고, 연기를 맡았다. 그동안 조급해 했던 모든 것이 다 쉬어갈 수 있는 것들이었고.

함께 국수를 말아 먹고 싶은 사람들을 설핏 떠올린다.

 

 

안녕, 안녕.

방콕을 떠나야 할 시간. 방콕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과도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임지로 흩어져야 할 때가 왔다. 이주 동안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또 다시 이별, 그리고 시작이다.

떠나기 하루 전, 내가 사랑하는 모질이 형 한 명이 자기 방에 놓고 간 내 시계와 책을 돌려주겠다며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때라 알겠다고, 무심코 받고 옆에 치워두었다. 형은 금방 방을 나섰고, 그제야 돌려받은 책에 눈길이 갔다. 최인호 작가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손을 뻗어 책장을 넘겨보다가 그 사이에 형이 끼워 넣은 편지 한 통이 툭 하고 떨어졌다. 모질이. 무슨 편지를 이런 식으로 주고 그래.

 

 

한참을 멍하니 편지를 읽고 있었을 것이다. 글자 하나하나 꾹꾹 눌러쓴 것이 티가 난다. 온통 걱정하는 소리들과 밝은 생각을 하자는 격려. 지독한 히스테리가 많은 걱정을 낳았는지, 종이 한 장에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말과 다르게 글씨만으로 쓰는 사람의 온도를 느낄 수 있는 편지는 역시나 신비로운 것. 한밤중에 베개를 끌어안고 답장을 끼적였다. 모질이 동생이 편지를 쓴다. 나는 아무래도 편지가 따뜻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그리고 내일이 밝으면 그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오늘의 날짜에 결국 내일을 담아버리고 말았다. 편지는 차갑게 식어간다.

안녕. 날이 밝았고 방콕으로부터 버스로 다섯 시간 떨어져 있는 ‘피짓’이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다. 몰래 쓴 답장을 건네고, 버스에서 흔들려가며 적은 짤막한 쪽지도 전해준다. ‘컨캔’, ‘핏사놀룩’이라는 다른 지역으로 흩날리는 사람들과 서로 손 잡고 껴안으며. 안녕. 이제 당분간은 우리에게도 헤어짐이라는 것이 익숙해져야 한다. 언젠가 다시 안녕, 할 것이고, 또 다시 안녕, 인사를 남기고 떠날 것이다.

그러니 안녕. 그리고 안녕 피짓. 인사는 흔하고 아름답다. 편지보다 짧고 가볍다. 그래서 슬퍼지고 만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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